- 신라 헌강왕 때 관직 받은 처용
- 악학궤범에 아랍인으로 그려져
- 원성왕 능 곁의 무인석 중 하나
- 전혀 다른 모습의 아랍인 얼굴
- 가락국 수로왕과 혼인한 허황옥
- 인도로 비정되는 아유타국 출신
- 고대사의 외부 세계 포용 사실
- 삼국유사에 다양하게 표현돼
경주 월성에서 동남쪽으로 한참 내려가면 외따로 떨어진 왕릉이 하나 있다.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785∼798 재위)의 능으로 특이하게 ‘괘릉(掛陵)’으로도 불린다. 묘자리에 물이 많아 관을 매달아 두었다 해서 괘릉인데, 이름만 특이한 게 아니다. 왕릉을 지키는 무인석(武人石)은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특이하다. 곁의 문인석(文人石)이 신라인의 얼굴을 한 것과 달리 깊게 파인 눈과 오똑한 콧날, 풍성한 수염 등은 여지없이 아랍인이다. 어떻게 아랍인이 왕릉을 지키는 무인이 됐을까? 이는 어떤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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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괘릉(원성왕릉)을 지키는 통일신라 시대 문인석(왼쪽)과 무인석. 문인석은 한반도인 얼굴인데 무인석은 아랍인 모습이 완연하다. |
‘삼국유사’의 ‘기이’편에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가 있다. 제49대 헌강왕(憲康王, 875∼886 재위)이 울산 개운포(開雲浦)에 놀러 왔다가 만나서 서울로 데려온 처용에 대한 이야기다. 헌강왕은 처용에게 급간(級干)이란 관직을 주었다. 급간은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아홉째에 해당하며, 급벌찬(級伐飡), 급찬(級飡) 따위로도 불린 높은 관등이어서 진골이나 6두품만이 가질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인물에게 이런 관등을 내렸으니, 그야말로 파격적인 기용이다. 그런데 처용은 신라인이 아니었다. 그를 형용한 모습이 조선 시대의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그려져 있는데, 괘릉 무인석과 꼭 닮았다. 처용 또한 아랍인이었다. 대체로 아랍 상인으로 본다.
어떻게 신라인과는 생김새와 언어, 종교가 아주 다른 아랍인들이 예사롭게 활동할 수 있었을까? 대륙의 끝에서 해양을 마주한 나라답게 오랜 내력이 있었을 듯하다.
■신라의 왕이 된 석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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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학궤범’에 그려져 있는 처용의 얼굴. |
‘삼국유사’의 ‘신라시조혁거세왕’에서 혁거세(赫居世)는 알에서 나오고 알영(閼英)은 계룡의 왼쪽 갈비에서 나왔다고 했다. 일연은 혁거세에 대해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기리면서 ‘현인을 낳아 나라를 세웠다’고 했으니, 이 말이다”라고 주석을 덧붙였다. 심지어 알영을 서술성모의 현신(現身)으로 여긴다는 사실도 적어 두었다. 한국 고대사가 북방 대륙에서 시작되어 남쪽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생각해보면, 혁거세와 알영의 탄생은 북방에서 내려온 이주민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제4탈해왕(第四脫解王)’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제2대 남해왕(南解王) 때에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배가 와 닿았다.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할멈이 배를 당겨서 보니, 배 안에 커다란 궤짝 하나가 있었다. 궤에는 단정한 사내아이와 일곱 가지 보물, 사내종과 계집종 들이 있었다고 한다. 사내아이는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 사람입니다.【용성국은 왜(倭)의 동북쪽 1천 리에 있다.】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스물여덟 용왕이 있었는데, 사람의 태에서 태어났습니다. … 궤짝을 만들어 나를 넣고 배 안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인연 있는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이루어라’고 빌었습니다. 곧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며 자신이 태어나 배에 실려서 온 내력을 들려주었다.
탈해는 해양을 무대로 활동한 나라에서 무리를 이끌고 온 인물이었다. 그는 토함산에 올라 성안에 살 만한 집을 살펴보고는 내려와 꾀로써 그 집을 빼앗았다. 비록 꾀로 남의 집을 빼앗았으나, 고대에는 그 또한 능력이고 미덕이었다. 남해왕은 그런 탈해를 지혜롭다고 여겨서 맏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냈고, 이윽고 탈해는 노례왕(弩禮王)을 이어 왕위에까지 올랐다. 혁거세와 알영, 탈해 등의 이야기를 통해 본디 신라 땅에 살던 사람들 곧 육촌(六村)의 사람들은 북방에서 내려온 대륙의 무리뿐 아니라 바다 건너에서 온 해양의 무리를 모두 받아들여 화합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융합를 통해 세워지고 뿌리를 내린 나라였다.
■가락국의 수로왕과 허황옥
북방의 대륙 세력과 바다를 건너온 해양 세력의 융합은 신라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신라처럼 반도의 끝자락에서 나라를 이뤄 500년을 이은 금관가야 곧 가락국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가 그 사실을 알려준다.
‘가락국기’는 후한 광무제 때인 건무(建武) 18년(42)에 구지봉(龜旨峯) 위에서 일어난 신이한 일을 서술하면서 시작된다. 하늘에서 자주색 밧줄이 드리워졌는데, 그 밧줄 끝에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이 있었다. 금합에는 황금 알이 여섯 개 있었다. 12일 지난 뒤 그 알들은 여섯 명 사내아이로 변했고 다시 십수일 만에 장성한 사내들이 되었다. 가장 먼저 나타난 수로(首露)는 가락국의 시조가 됐고, 나머지 다섯 명도 각자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수로를 비롯한 여섯 사내는 혁거세왕처럼 외부, 특히 북방에서 온 무리였다. 구지봉을 신성시하며 살던 원래 주민들은 그들을 받아들여 임금으로 세웠다. 그 과정에서 심각한 대립이나 분란이 없었다는 점에서 신라의 경우처럼 북방에서 온 무리와 원래 주민이 쉽사리 융화했음을 알 수 있다.
수로가 왕이 된 가락국에 또 다른 세력이 등장한다. 신하들이 수로왕에게 처녀들 가운데서 좋은 사람을 골라 짝으로 삼으라고 권했다. 이에 수로왕은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이 하늘의 명이듯 왕후를 고르는 일도 하늘이 명할 것이라면서 유천간(留天干)에게 배를 타고 망산도(望山島)에 나가 기다리라 명령했다. 이윽고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을 향해 오는 배가 있었다. 그 배에는 허황옥(許黃玉)과 그를 따르는 무리가 타고 있었다.
허황옥 일행은 인도 중부로 비정되는 먼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바다를 건너왔다. 그들이 가락국 앞바다에 이르자 수로왕이 보낸 사람들이 영접하려 했다. 이에 허황옥은 “나는 너희들을 평생에 본 적이 없거늘, 어찌 가벼이 따라가겠느냐?”며 예의로써 맞아들이도록 요구했고, 수로왕도 그렇게 여겨 예의를 다해 맞아들여 혼인했다. 이는 대등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화합의 길을 모색한 것이다.
수로왕과 허황옥의 혼인은 곧 북방에서 내려온 대륙의 세력과 바다를 건너온 해양 세력의 결합이요 융합을 상징한다. 실제로 가락국이 오래도록 해양 세력으로 위세를 떨친 것도 이러한 국가적 성격에 말미암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륙과 해양의 융합
고조선에서 시작한 고대사는 북방의 대륙에서 세력을 형성했던 무리들이 남방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바다를 눈앞에 둔 신라와 가야는 해양 세력까지 받아들여서 더욱더 복잡하고 다양한 주민들로 나라를 이뤘다. 이렇게 대륙과 해양의 세력이 만나는 과정은 배척과 대결이 아니라 수용과 융합이었다. 이는 곧 차별과 차등보다 대등의 원리 위에서 외부인과 세계를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외부 세력과 별다른 충돌 없이 융화한 일, 이민족이나 이주민을 배척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포용한 일은 신화 속 허구가 아니며 신라와 가야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고조선 건국이야기를 비롯해 이른바 신화라 불리는 이야기들에서 두루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고, ‘삼국유사’의 모든 이야기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정천구 고전학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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