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다운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 대동세상의 이상향 꿈 꾼 공자
- 정치적으론 큰 업적 못 남겼지만
- 교육적 측면에선 엄청난 성과
- 온고지신으로 그 가치 이어가야
공자의 오랜 친구인 원양(原壤)은 요즘말로 삐딱선을 탄 사람인 모양입니다. 늘그막에도 공자로부터 이런 질책을 받았으니 하는 말입니다. “어려서는 윗사람에게 공손하지 않았고, 어른이 되어서는 뭐라 내세울 것이 없었고, 늙어서는 죽지도 않으니 이야말로 도적이다.” 공자께선 원양을 타박하는 것도 모자라 지팡이로 그의 정강이를 툭툭 쳤다고 합니다.(‘논어’ 14편 헌문 4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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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서상균 |
죽마고우끼리 흉허물 없이 지내는 모습이라기엔 원양의 행적에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공자께서 도우러 가서 관을 짜고 있었는데, 그는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관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영원한 스승, 공자 옆에 이런 친구가 있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공자의 삶과 어쩌면 이렇게 정반대인지 싶어 더 놀랍습니다. “어려서 공손하지 않았다면 부끄러운 일이고, 어른이 되어서 덕이 없다면 수치고, 늙어서 예가 없다면 죄”라는 점잖은 해석을 붙이면 더욱 두드러집니다.
15세에 배움에 뜻을 둔 이후 70세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기까지 끊임없는 자기 수양과 ‘더불어 사는 세상’이란 목표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공자입니다. 원양은 그렇지 못한 세상 사람을 나타내는 대표 단수랄까요.
미국의 전설적인 포크 가수 케이트 울프의 곡을 셜리 오스틴이 부릅니다. ‘Give Yourself To Love’(QR 코드 또는 인터넷 주소 https://youtu.be/VWUiNkE9guk)를 들으며 시작하겠습니다.
■생활정치 바탕되는 실천철학
공자는 호불호가 뚜렷했습니다. 인격을 갖춘 이상적 인간상을 군자(君子)로 높였다면, 그 반대편의 사이비 군자, 향원(鄕原)에겐 서릿발 같은 비판의 화살을 날렸습니다. “향원은 덕의 도적이다.” 집안과 사회와 국가를 망치는 덕의 파괴자라는 의미입니다. 같은 도적이지만 원양에게 “제발 정신 좀 차려라”는 정도로 핀잔을 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이 때 덕(德)은 사람됨이요, 인격의 완성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공자가 주창한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지요. 사람다운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는 세상, 바로 더불어 사는 대동사회입니다. 공자의 이상향이지요.
말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공자께서는 천하를 떠돌며 ‘상갓집 개’라는 힐난을 감수했으며,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려고 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선 실패했지만 역사가 쌓일수록 빛을 발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정치적으론 인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으나 교육적인 측면에선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성과를 거뒀다는 사실입니다. 패권에 급급한 군주들이 공자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지 그는 정치 현장을 떠나지 않고 생활정치를 실천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논어’(論語)입니다. 공자와 제자의 대화를 담은 정치 교과서이자 교육 지침서이기도 합니다. 올바른 정치를 위한 교육! 지금도 유효하고 필요한 과제 아닙니까.
공자께선 사람을 중심에 놓은 만큼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유지하는 예(禮)에 주목했습니다. 수제자인 안연에게 내린 ‘극기복례’(克己復禮), 자기 자신을 이겨서 예에 돌아감이 인을 행하는 것이란 인의 핵심 가르침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 매 상황에 맞춰 가정에서, 사회에서, 나라 일에서 맡은 바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이 나에게서 비롯되는 일이라면, 충분히 사람다운 사람으로 스스로 설 수 있겠지요. 그런 사람처럼 인격을 완성하는 모습을 음악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맹자가 음악에 빗대 공자를 떠받들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성인(聖人)의 완결판, ‘집대성’(集大成)과 이를 찬미하는 ‘금성옥진’(金聲玉振)이 그 사례입니다. 맨 처음 종(鐘)을 쳐서 합주를 시작하고, 옥돌로 소리를 내는 경(磬)으로 마무리하듯이 ‘예’는 조화로움이 중요합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인’이라는 지휘봉으로 세상을 다스리고자 했던 공자가 그려지지 않습니까.
■원칙과 변통, 공동선 추구를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도 현재의 고민을 녹여내 새로운 비전을 만들 수 없다면 그야말로 무용지물입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앞당긴 뉴노멀 시대에 맞는 비전과 인간상을 찾아낼 깊은 연못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어’의 가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인간애가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배움은 자기 수양이며 이를 실천하는 목적은 입신양명을 넘어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데 맞춰져야 합니다. 그러니 배움에 겸손하지요.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당쟁과 사대주의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한 교조로서의 유교가 아니라 조화와 이타의 실천 철학인 유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 기준이 뭘까요. 우선 온고(溫故)에서 지신(知新)으로, 옛것을 제대로 알고 그 속에서 미래를 위한 지혜를 구하는 자세입니다. 이를 실천하는 정도와 원칙, 그리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태도가 더해져야겠지요. 바로 정도와 원칙인 경도(經道),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변통인 권도(權道)입니다. 경도는 딱 부러지지만, 권도는 어렵습니다. 90세 먹은 노모를 위해 70세 노인이 꼭두각시 놀음을 하는 것에서 권도의 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익을 추구하는 방편이 권도라면 사익을 추구하는 방편은 권모술수겠지요. 그 차이에서 2500년을 잇는 희미한 끈의 숨결을 느낍니다. 종즉유시(終則有始),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논어’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활자의 의미를 찾아봅시다. 질리지 않는 그리움으로.
시인과 촌장의 ‘때’(QR 코드 또는 인터넷 주소 https://youtu.be/sp7v0j12JoM)를 들으면서 마치겠습니다. ‘당신이 쌓은 벽과 내가 쌓은 벽 사이에 꽃 한송이 피어나는’ 그 때를 함께 기다려봅시다.
정상도 수석논설위원 jsdo@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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