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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와 21세기 한국학 <18> 봉덕사의 종과 성덕왕

성덕왕 왕권 다지고 민본 통치…혜공왕(성덕왕의 손자)이 ‘봉덕사 종’ 완성 후 업적 기려

  • 정천구 고전학자
  •  |   입력 : 2020-12-27 19:54:48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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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명한 부친 신문왕과 형 효소왕
- 열다섯 나이에 왕위 오른 ‘흥광’
- 귀족 세력이 권력 다잡은 상황서
- 그들 견제 위해 왕권 강화 힘써

- 성덕왕의 보좌 관직 ‘시중’ 도입
- 태종대왕 위해 세운 ‘봉덕사’ 등
- 일연, 맥락상 필요하다 판단해
- 삼국사기와 전혀 다른 내용 서술

‘삼국유사’의 각 조목은 독립돼 있으면서 연결되어 있기도 해 그 자체로 해석할 수도 있고 다른 조목과 연결해 해석할 수도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을 염두에 둔 저술이므로 두 책과 대비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는 조목도 있다. 물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온전히 독자에게 달려 있고, ‘삼국유사’ 또한 그것을 허용한다. 그럼에도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 사이 맥락을 짚고 해석할 때 각 조목에 숨어 있는 진실과 진의뿐 아니라 전체 졸가리도 더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기이’편의 ‘성덕왕(聖德王)’은 짤막하게 또 건조하게 서술되어 그 자체로 분명해 보이는 조목인데, 맥락을 잡고 해석하면 숨은 의미가 드러남을 잘 보여준다.
   
통일신라의 철학과 예술이 집약된,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범종인 성덕대왕신종과 성덕대왕신종에 새긴 종명(鍾銘) 문장.
■성덕왕이 한 예사로운 일들

‘성덕왕’조 내용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신룡(神龍) 2년 병오년(706)에 벼가 자라지 않아 인민이 심하게 굶주렸다. 정미년(707)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까지 인민을 구제하기 위해 곡식을 나누어 주었는데, 한 사람에 하루 석 되로 정했다. 일을 마치고 헤아려보니, 30만500섬이었다. ② 왕은 태종대왕을 위해 봉덕사(奉德寺)를 처음 세우고 인왕도량(仁王道場)을 이레 동안 베풀며 크게 사면했다. ③ 비로소 시중(侍中)의 관직을 두었다.【어떤 책에서는 효성왕(孝成王) 때라 했다.】”

   
경주 월성에서 불국사 방향으로 가는 길의 동남쪽에 있는 성덕왕릉.
간단하고 모호한 구석도 없어서 의미가 명확해 보인다. ①은 흉년으로 굶주리는 인민을 구휼했다는 내용이다. ②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태종무열왕을 위해 절을 세워 기렸으며, 왕이 시주가 되어 국가의 평안과 태평 및 외적 격퇴를 기원하는 불교 의례이자 국가 행사인 인왕도량을 열었다는 것이다. ③은 왕을 보좌하는 관직을 두었다는 것이다.

세 가지 사실 사이에 맥락이 있는 듯 없는 듯하다. ①은 내치(內治)고 ②는 외교 및 군사다. 통치의 두 축을 거론한 셈이다. ③은 ①과 ②를 더욱 잘하기 위해 한 일로 보인다. 그런데 ‘성덕’ 곧 ‘거룩한 덕’이라는 시호를 생각하면, ‘성덕왕’의 내용은 평범한 수준이다. 일연은 왜 이 조목을 굳이 두었을까? ‘삼국사기’와 대비해서 따져보면, 진정한 맥락이 보일 수도 있겠다.

①과 비슷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8의 ‘성덕왕 6년조’에 나온다.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6년 봄 정월에 백성들이 많이 굶어 죽으므로 한 사람마다 하루에 조 석 되를 7월까지 대주었다”고 기록돼 있어 ‘성덕왕’에서 “일을 마치고 헤아려보니, 30만 500섬이었다”고 한 대목도 없을뿐더러 세세한 표현에서도 차이가 크다. ②는 ‘삼국사기’에 전혀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그렇다고 일연이 보완하려고 썼으리라 판단하기는 어렵다. ‘삼국사기’에서 빠뜨린 불교사가 어디 한둘인가.

또 ‘시중(侍中)’에 대해 ‘삼국사기’에서는 진덕여왕 5년(651)에 처음 ‘중시(中侍)’를 두었고 경덕왕 6년(747) ‘중시’를 ‘시중’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③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 없는 일연이 ③을 둔 것은 ①, ②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즉, 잘못된 정보지만 맥락이 있어서 그대로 두었다는 말이다. 과연 그 맥락은 무엇인가?

■예사롭지 않은 봉덕사의 종

‘시중’은 귀족의 대표인 상대등을 견제하기 위한 관직으로, 왕의 행정적 대변자로서 왕권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③은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 덧붙인 것이고, ①과 ② 또한 왕권 강화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가 생긴다.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의외의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神文王, 681∼702 재위)의 아들이며 앞선 효소왕(孝昭王, 687∼702)의 친동생이다. 신문왕이 재위 12년 만에 죽으면서 여섯 살 어린 태자가 즉위했으니, 곧 효소왕이다. 효소왕은 재위 11년 만에 갑작스레 죽고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효소왕의 아우인 흥광(興光)이 뒤를 이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도성 사람들이 그를 세웠다”(國人立之)고 표현했다. ‘국인(國人)’은 ‘도성 사람들’이고 귀족을 가리키므로 귀족들이 의논해 흥광을 즉위시켰다는 뜻이다. 흥광이 곧 성덕왕이다.

그런데 즉위할 때 흥광의 나이는 몇 살이었을까? 형 효소왕은 687년에 태어났고, 부친 신문왕은 692년에 죽었으니, 즉위할 때 흥광은 넉넉잡아도 열다섯이 못 되었다. 게다가 신문왕은 12년을 재위했고, 이어 어린 나이에 즉위한 효소왕도 재위 기간이 11년이었다. 귀족 세력이 왕권을 압도하는 형편이었다. 효소왕 9년에 이찬 경영(慶永)이 반역을 꾀했을 정도로. 그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흥광으로서는 당연히 왕권 강화가 급선무였다. 이런 맥락에서 ‘성덕왕’을 보면, ①은 인민을 구휼함으로써 민심을 얻고 ②는 태종무열왕 계열의 사람들과 불교 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을 강화한 내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귀족들도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탑상’편에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皇龍寺鍾芬皇寺藥師奉德寺鍾)’이 있다. 봉덕사는 성덕왕이 세운 절이니, 그 종을 만든 내력을 보자. “‘경덕왕은’ 황동 12만 근을 내놓아 선왕인 성덕왕을 위해 커다란 종 하나를 주조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 혜공대왕이 대력 경술년(770) 12월에 담당 관리에게 명을 내려 공인들을 모아서 기어이 완성해 봉덕사에 안치했다. … 종명(鍾銘)의 글은 번거로워 기록하지 않는다.”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을 위해 주조하기 시작해 손자인 혜공왕이 완성한 봉덕사종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종각에 걸려 있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이다. 일연이 번거로워서 싣지 않았다는 종명에 “참되고 뛰어난 인물을 기용해 백성을 어루만지고 예의와 음악을 숭상하며 풍속을 살피셨다. … 40여 년간 나라를 다스리며 부지런히 정사에 힘쓰시고 전쟁으로 백성을 놀라게 하거나 어지럽힌 적이 한 번도 없으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할아버지를 위해 쓴 글이니, 보태거나 꾸몄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성덕왕이 재위 36년 동안 한 일을 보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종명에는 “왕의 으뜸가는 공적을 그 위에 잘 새겨 두었으니, 뭇 백성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도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는 대목도 있다. 성덕왕은 백성을 위한 통치를 했으므로 그 덕을 기리며 주조한 종 또한 소리로써 백성을 편안하게 해줄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더없이 장중하면서도 맑은 소리를 내는 ‘성덕대왕신종’은 참으로 그런 구실을 해왔다고 할 만하다.

■다음 조목을 위한 포석

   
‘성덕왕’은 왕으로서 할 일을 서술한 평범한 조목으로 보였으나, ‘삼국사기’와 견주면서 다른 조목과 연결 지을 때 그 의미가 새롭고 명확해졌다. 그런데 이 ‘성덕왕’도 이어지는 ‘수로부인(水路夫人)’ 조목의 해석에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일종의 포석(布石)이다. 흥미로운 점은 ‘수로부인’이 ‘성덕왕’과 ‘성덕대왕신종’의 종명에 대해 반론을 펼친다는 사실이다. 다음 글에서 밝혀진다.

정천구 고전학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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