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삼국유사와 21세기 한국학 <20> 선덕왕과 관련한 상반된 해석

삼국사기 닭·돼지에 빗대 선덕왕 폄하…삼국유사 민중 입 빌려 반박

  • 정천구 고전학자
  •  |   입력 : 2021-01-10 19:48:03
  •  |   본지 15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 김부식 논평서 늙은할미라 말해
- 남존여비 사상으로 선덕왕 재단
- 상층의 여성 차별 여실히 드러내

- 일연, 민중 이야기로 이에 반론
- 해석 달리해 남성 우위론 뒤집고
- 이론·관념 사로잡힌 지배층보다
- 하층이 더 공정할 수 있음 입증

‘삼국유사’에 신라 최초 여왕인 선덕왕(善德王, 632∼647 재위)과 관련된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가 있다. ‘선덕왕이 낌새를 알아챈 세 가지 일’을 뜻한다. 당 태종이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꽃씨를 신라에 보내왔을 때 꽃에 향기가 없을 것임을 미리 알아챈 일, 한겨울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도성 서쪽 교외 여근곡(女根谷)에 적병이 숨어 있음을 알아챈 일,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장사지내라며 낭산 남쪽을 지목했고 문무왕 때 그 무덤 아래 사천왕사를 세우면서 말한 대로 된 일 등이 그것이다.
   
낭산 남쪽의 선덕여대왕릉. 낭산은 고대에 신라의 신성한 산이었다.
선덕왕의 지혜와 안목을 보여주는 이 세 가지 가운데 앞의 둘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그렇다면 ‘선덕왕지기삼사’는 ‘삼국사기’와 관점이나 시각이 다르지 않은 조목일까? 아니면, 숨은 뜻이 따로 있는 것일까?

■암탉과 암퇘지에 견주다

   
하늘에서 본 사천왕사 터. 그 북쪽 숲 한가운데에 선덕여대왕릉이 있다.
‘삼국사기’ 권5 ‘선덕왕(善德王)’조는 서두에 “진평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 도성 사람들이 덕만을 세우고 ‘성조황고’라는 칭호를 올렸다”(王薨, 無子, 國人立德曼, 上號聖祖皇姑)고 썼다. 성조(聖祖)는 성골(聖骨) 계통을 이었다는 뜻이고, 황고(皇姑)는 여자로서 제왕이 됐다는 뜻이다. 이 칭호를 올린 도성 사람들은 성골이라는 혈통을 중시하며 선덕왕을 지지한 귀족 세력이었다. 성조황고라는 칭호에 이어 진평왕 때 당나라에서 보낸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보고 덕만이 향기가 없을 것이라 말했고 꽃씨를 심었더니 참으로 그러했다는 일화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덕만은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其先識如此)라고 썼다. 이로써 보면, ‘삼국사기’ 저자가 선덕왕을 높이 평가했을 듯하다. 그러나 실상은 아주 다르다.

신라 왕실 후예이기도 한 김부식은 ‘선덕왕’ 말미에 특별히 논평을 덧붙였다. 중국 역사서에서도 여자가 칭왕(稱王)하는 것을 용인한 적이 없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이치로써 말하자면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로써 말하자면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데, 어찌 늙은 할미가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재단하게 했단 말인가? 신라가 여자를 붙들어 세워 왕위에 있게 한 것은 참으로 난세의 일이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서경’에 ‘암탉이 새벽에 운다’ 했고 ‘역경’에 ‘암퇘지는 머뭇머뭇 맴돈다’고 했으니, 해서는 안 될 일을 경계한 것이리라!”

선덕왕을 늙은 할미라 한 것도 모자라 암탉과 암퇘지에 견주었다. 서두에서 덕만을 높인 것과는 사뭇 다르다. 새로 즉위하는 왕에 대한 의례적 표현이 다분한 서두와 달리 논평에는 저자의 판단이나 인식이 바로 드러난다. 그런데 위 논평은 선덕왕이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으로 신라가 위기를 겪던 시기에 즉위해 내치와 외교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사실을 깡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남존여비(男尊女卑) 관념으로 재단했다. 이는 중세 지배층과 유교 지식인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편향되고 차별적이었는지 여실하게 보여준다.

■여느 왕과 다른 여대왕

   
자인(慈仁)에서 경주 가는 길목에 있는 여근곡 전경. 국제신문 DB
‘선덕왕지기삼사’는 민중이 전하던 이야기를 그대로 실은 것이다. 이 조목은 “제27대 덕만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다”로 시작한다. ‘선덕’이 지배층 귀족이 붙여준 시호라면, ‘선덕여대왕’은 민중이 따로 붙여준 시호다. 민중에게 선덕왕은 신라 여느 왕들과 달리 ‘대왕’이었던 것이다. 낌새를 알아챈 세 가지 일도 그런 대왕 칭호가 정당함을 입증하는 근거였던 셈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롭고 중요한 대목은 따로 있다. 세 가지 일을 이야기한 뒤에 이어지는 문답이다.

“그때 신하들이 왕에게 여쭈었다. ‘꽃과 개구리 두 일이 그렇게 될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러자 왕이 대답했다.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음을 알았소. 이는 당 황제가 과인에게 짝이 없음(寡人之無耦)을 기롱한 것이오. 개구리는 성난 모습을 하고 있어 병사의 형상이고, 옥문은 여자의 생식기요. 여자는 음이 되고 그 색이 흰데, 흰색은 서쪽이오. 그래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았소. 남자의 생식기는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소. 이것으로 쉽게 잡을 줄 알았소.’ 이에 신하들은 모두 그 성스런 지혜에 감복했다.”

모란꽃과 개구리가 운 일은 별개 사건인데, 왜 한꺼번에 대답했을까? 음양 원리로 묶이기 때문이다. 왜 뒤에 따로 이 문답을 두었는가? ‘삼국사기’의 논평이 ‘서경’과 ‘역경’을 끌어와 선덕왕을 폄하한 데 대해 반박하는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이야기를 전하던 민중의 반론이고, 일연은 이에 동의했을 따름이다. 반론이라도 남자가 양이고 여자가 음이라는 전제는 그대로 따랐고, 해석을 달리했다.

당 황제는 나비(양, 남자)가 없는 꽃(음, 여자)은 향기가 없으므로 불완전하고 열등하다는 식으로 기롱했다. 그런데 이는 착각이다. 꽃은 스스로 향기를 지니거나 지니지 않는 존재이며, 그 향기는 본디 나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나비야말로 꽃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나비가 없어도 꽃은 향기를 뿜지만, 꽃이 없으면 나비는 오갈 데가 없다. “홀아비는 이가 서 말이고, 홀어미는 구슬이 서 말이다”는 속담에 담긴 뜻도 이러하리라. 선덕왕 3년(634)에 “분황사(芬皇寺)가 낙성되었다”는 ‘삼국사기’ 기사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분황(芬皇)은 ‘향기로운 황제’라는 뜻으로, 선덕왕을 가리킨다. 남자가 없이도 향기롭다는 말이다.

또 남녀 생식기를 들며 해석한 부분도 주목된다. 개구리, 성난 모습, 병사 따위로 상징되는 남자는 분명 여자보다 강하다. 그런데 개구리가 울었던 곳은 옥문지(玉門池)이며, 고작 사나흘 정도 울었을 따름이다. 그 사이에 옥문지는 마르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개구리만 지치고 울음을 그쳤다. 아무리 남자가 여자보다 강하다 해도 그 강함은 사그라지기 쉽고 지속되지 못해 결국 부드러움에 꺾이고 진다. 이것이 ‘역경’의 원리라는 것이다.

위 문답은 선덕왕의 입을 빌려 “음의 부드러움이 양의 강함을 이긴다”는 이치를 내세워 ‘삼국사기’의 논평이 음양의 원리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내놓은 남성 우위론을 뒤집은 것이다. 그렇다고 실상이나 사실(史實)과 어긋난 주장을 편 것도 아니다. 남성 우위 ‘차등론’이 그릇되었음을 일깨우려고 반박했을 따름이다.

■유식과 무식의 역전

   
‘삼국사기’ 저자는 유교 지식인답게 역사서를 들먹이고 ‘서경’과 ‘역경’ 따위를 끌어대며 “신라가 여자를 붙들어 세워 왕위에 있게 한 것은 참으로 난세의 일이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고 말했다. 이는 어불성설이다. 참으로 역사에 밝은 지식인이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권력과 지위를 독차지한 남자들이야말로 끊이지 않는 내홍과 전란, 멸망의 빌미가 되었던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선덕왕지기삼사’는 선덕왕을 통해 음이 양을 이긴다는 이치만 주장한 게 아니다. 유식한 상층 지식인의 무지를 폭로하며 무지한 하층 민중이 음양 이치를 더 잘 알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판단하는 데서도 더욱 공정할 수 있음을 보였다. 지식인이 거창한 이론이나 고상한 관념을 중시해 실상을 왜곡한 것과 달리 민중은 이론이나 관념이 아닌 현실에서 절실한 경험으로 지혜를 터득했다. 이로써 유식과 무식이 역전됐다.

정천구 고전학자

※공동기획

·㈜상지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국제신문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부산서 미분양 1군 브랜드 486가구 통째 전세로 공급(종합)
  2. 21만석으로 줄여라? BPA 초라한 아레나돔 고집
  3. 3가덕 첫삽 끝내 연내로 후퇴…당정 “공사비 8500억 증액”(종합)
  4. 4김해공항 10개월째 수장 공백…제2 출국장 부분 운영 여전
  5. 5면접 보고 그날 합격 통보…BIFC 채용행사
  6. 6단거리 최강馬 위너클리어 짜릿한 역전승…국제신문배 우승
  7. 7선박 2척 버티기…수영만요트장 재개발 착수 해 넘기나
  8. 8“실책·기복 없어야 강팀…거인 맞춤 훈련 강화할 것”
  9. 9선거법 위반 혐의 양산시 특보 숨진 채 발견
  10. 10“지광은 국제신문 떠나라” 직원 빗속 상경투쟁
  1. 1주민자치회 정식 출범 원년…유럽 모범사례 현장을 가다
  2. 2박수영 ‘국쫌만’ 300회…888건 민원 풀어
  3. 3[와이라노] “한국은 단검” 美 안보청구서 점점 커진다
  4. 4820조 예산전쟁 개막…여야 ‘3대 메가·미래기금’ 격돌 예고
  5. 5‘주민대표’가 건축 세부사항까지 의견…지방의회 심사 반영
  6. 6“7개 정당 19명 치열하게 토론…대화·설득으로 의견 일치 봐”
  7. 7北 해커, 비트코인만 1만8270개(약 1조8701억원 ) 훔쳤다
  8. 8국회 최다선 국힘 조경태 의원, 국제신문 회생 노력 지지하고 지광 스님에게 회생 동의 촉구
  9. 9민주, 조희대 ‘계엄 동조’ 여부 정조준
  10. 10李대통령 국정 지지율 36.9%로 소폭 상승
  1. 1부산서 미분양 1군 브랜드 486가구 통째 전세로 공급(종합)
  2. 21만석으로 줄여라? BPA 초라한 아레나돔 고집
  3. 3가덕 첫삽 끝내 연내로 후퇴…당정 “공사비 8500억 증액”(종합)
  4. 4면접 보고 그날 합격 통보…BIFC 채용행사
  5. 5부산은행 김해공항점 계속 운영
  6. 6편의점 번진 요거트 인기…세븐일레븐 ‘요즘’과 맞손
  7. 7[뭐라노] 가덕 첫삽 끝내 연내로 후퇴…당정 “공사비 8500억 증액”
  8. 8에어부산, 부산~광저우 신규 취항 특가… 편도 14만9900원부터
  9. 9에어부산, 부산~광저우 신규 취항 특가… 편도 14만9900원부터
  10. 10중산층 10명 중 4명 벌이 줄었다
  1. 1김해공항 10개월째 수장 공백…제2 출국장 부분 운영 여전
  2. 2선박 2척 버티기…수영만요트장 재개발 착수 해 넘기나
  3. 3선거법 위반 혐의 양산시 특보 숨진 채 발견
  4. 4“지광은 국제신문 떠나라” 직원 빗속 상경투쟁
  5. 5여전한 특수학교 님비 “주민체육시설 끼워 짓자” 고육책
  6. 6“국제신문 위기는 민의 위기” 지역사회 잇단 지지
  7. 7[속보]미 플로리다 팜비치 카운티 도로에 제트기 추락, 탑승자 9명 전원 사망
  8. 8경비·미화 넘어 AI·관광 전문가로…은퇴 뒤 더 빛나는 삶
  9. 9국힘 과반 양산시의회, 민감한 3개 안건 부결 왜?
  10. 10대학·마을에 스며든 이전 기관…지자체는 정주지원 화답
  1. 1단거리 최강馬 위너클리어 짜릿한 역전승…국제신문배 우승
  2. 2“실책·기복 없어야 강팀…거인 맞춤 훈련 강화할 것”
  3. 3“좋은 젊은 피 많아…잠재력 극대화”
  4. 4삼성, KIA 6-1 꺾고 2년 만에 한국시리즈 진출
  5. 5BNK, 여자농구 개막전 ‘디펜딩챔프’ KB 완파
  6. 6‘친정 팀 복귀’ 이동욱 감독, “기본기 다져 승리하는 팀으로 만들겠다”
  7. 7“AG 환희 잊고…리그 첫 경기부터 승수쌓기 총력”
  8. 8마침내…밀워키, 월드시리즈 첫 우승(종합)
  9. 9괜찮을까…모레노호, ‘96라인’·손흥민 모두 품었다
  10. 10여자프로농구 절반이 女감독
우리은행
얼굴에 담긴 이야기
자연에는 길흉이 없다
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여수 ‘돌산 갓김치’와 갓김치 음식
궁리와 시도 [전체보기]
노동 운동부터 계엄까지…예술로 사회문제 비추다
비바람 견뎌낸 그의 회화…마침내 ‘고정관념 감옥’서 해방
김민우의 인서트 [전체보기]
비밀이 사라진 섬, 농담으로 건네는 회한
응원하고 함께하는 마음
문화레시피 [전체보기]
‘부산 커넥티드’…9.5 대 1 뚫은 신인 작가 10팀 한자리
‘부산 발레’ 낙동강 타고 새 물길 열다
박현주의 신간돋보기 [전체보기]
아이마다 다르게 자라는 이유 外
실크로드 연구자이자 간첩 ‘깐수’ 外
박현주의 책 이야기 [전체보기]
노력과 성공은 비례하는가…현대사회 씁쓸한 이면
히말라야 빙하 붕괴로 대참사…더 심각해진 기후 재난
아침의 갤러리 [전체보기]
배미정-나무에 기대어
송현화-Magic Airs
이 한편의 시조 [전체보기]
곰 두 마리 /황인숙
시간이 지나고 보니 /설상수
주말 영화 박스오피스 [전체보기]
‘치이카와’ 3주째 정상…관객 200만 돌파 올해 열 번째 영화
누적 180만 넘긴 ‘극장판 치이카와’ 2주 연속 정상…예매율도 1위
오늘의 운세- [전체보기]
오늘의 운세- 2026년 11월 2일 (음 9월 23일)
오늘의 운세- 2026년 10월 29일 (음 9월 19일)
오늘의 BIFF [전체보기]
오늘의 BIFF- 2026년 10월 14일
오늘의 BIFF- 2026년 10월 13일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전체보기]
조선 중기 문신 김인후가 소쇄원 단풍을 읊은 시
이여가 가을 보름달을 바라보며 읊은 시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