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5 기록
- 무왕, 신라와 일진일퇴 전쟁
- 국가 위한다며 사찰까지 지어
- 삼국유사, 서동은 낮은 신분
- 신라 진평왕에 사위 인정받고
- 인심 얻어 왕위에 올랐다 말해
- 민중 위한 왕 되달란 뜻 내포
- 무왕 앞에 나타난 미륵삼존과
- 부인 청으로 미륵사 지은 설화
- 차별·차등 은폐하려 했던 왕과
- 참됨 추구하길 원한 민중 대비
일연 스님은 아홉 살에 경산을 떠나 해양(海陽, 전라도 광주) 무량사에 가서 불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열네 살에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옮겨 갔다. ‘삼국유사’에 실린 백제 지역 이야기들을 연결해 보면, 김제 익산 공주 등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지역을 거쳐 강원도로 갔던 듯하다. 그 여정에서 백제 제30대 무왕(武王, 600∼641 재위)에 대한 색다른 이야기 곧 서동(薯童) 이야기도 들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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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의 왕흥사지 전경. |
■무왕과 왕흥사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제5의 기록에 따르면, 무왕은 이름이 장(璋)이고 법왕(法王, 599∼600 재위)의 아들이다. “풍채가 헌걸차고 기상이 호걸스러웠다(風儀英偉, 志氣豪傑)”고 한다. 무왕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백제에 큰 위협이 된 시기에 재위 2년 만에 죽은 선왕들, 즉 혜왕(惠王, 598∼599 재위)과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래서인지 즉위 초부터 신라에 꽤나 호전적으로 대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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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
재위 3년(602)에 군대를 보내 신라의 아막산성을 치게 했고, 곧바로 신라가 백제 변경을 침범해 오자 보병과 기병 4만 명으로 맞아 싸우게 했다. 6년(605)에 신라가 백제 변경을 침범했고, 12년(611)에는 백제 쪽에서 신라 가잠성을 공격해 성을 없애버렸다. 17년(616)에 백제군이 신라의 모산성을 쳤고, 19년(618)에는 신라에서 쳐들어와 가잠성을 되찾았다. 25년(624)에 신라의 속함 등 여섯 성을 쳐서 빼앗았고, 27년(626)에 또 신라의 왕재성을 쳐서 성주를 죽였다. 28년(627)에는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려고 크게 군사를 일으켜 웅진에 주둔했는데, 신라에서 급히 당나라에 위급함을 알리고 또 당태종이 조서를 보내는 바람에 중지했다. 그 뒤로도 백제와 신라는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며 서로 침범하여 싸웠다.
그렇게 신라와 계속 싸우던 와중에 무왕은 31년(630)에 사비의 궁궐을 중수하려 했다. 분위기를 일신(一新)해 국가 위세를 드높이려는 의중이었던 듯한데, 가뭄으로 말미암아 중단했다. 이윽고 35년(634)에 법왕 때 짓기 시작한 왕흥사(王興寺)가 완성됐다. 절은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왕은 늘 배를 타고 들어갔다고 한다.
왕흥사는 그 이름에서 국왕과 왕실을 중심으로 국가의 흥성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절임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 흥성과 번영에 민중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일도 포함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명분이야 어떠하든 계속된 전쟁은 인민을 죽음으로 내몰고, 거대한 사찰 조영은 오래도록 부역에 시달리게 했을 터이므로. 무왕의 시호를 ‘무(武)’라 한 것은 성품이 굳세어 곧게 다스려서(剛强直理) 또는 굳센 위력으로 적을 제압해서(威强敵德)일 텐데, 민중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서동과 미륵사
‘삼국유사’에도 ‘무왕’이 있어 민중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는 첫 문장은 ‘삼국사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나머지는 전혀 다르다. “어머니는 홀어미가 되어 서울의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못의 용과 정을 통해서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인데, 도량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마를 캐다가 팔아서 생계를 이었으므로 도성 사람들이 그것으로 이름을 지었다.”
못의 용은 사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때 쓰는 은유적 표현이다. 어려서부터 마를 캐서 팔아 생계를 이었고 도성 사람들이 ‘서동’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했으니, 신분도 낮고 형편도 곤궁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활달했던 모양이다. 그런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주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 도성으로 갔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어 자신을 따르게 한 뒤에 노래를 지어서는 부르게 했다. 널리 알려진 ‘서동요’다.
“동요가 서울에 두루 퍼져 궁궐에까지 들렸다. 백관이 온 힘을 다해 간언하므로 왕은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공주가 떠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주었다. 공주가 귀양살이할 곳으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타나 절을 하고는 모시고 지키며 함께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면서도 뜻밖의 만남을 믿고 기뻐했다. 이렇게 해서 따라가다가 몰래 정을 통했다. 그런 뒤에 서동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자 동요의 효험을 믿었다.”
그 뒤 서동은 마를 캐던 곳에 쌓여 있던 금을 진평왕에게 보내면서 사위로 인정받았고 또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한 사실 여부보다는 숨겨진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 긴요하다. 민중의 처지를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인심을 얻을 수 있고, 그 공감을 바탕으로 민중이 바라는 정치를 해줄 수 있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선화 공주와 혼인해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다고 한 데에는 신라와 더는 충돌하거나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라는 백제 사람의 바람이 담겨 있다.
서동이 왕이 되어 한 일도 그런 상징적 의미를 담는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로 행차하려고 용화산(龍華山) 아래의 큰 못 가에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났으므로 수레를 멈추고 지극한 마음으로 경배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부디 큰 가람을 이 땅에 세우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왕은 허락했다. 지명(知命) 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다. 신통력으로 하룻밤 만에 산을 헐어 못을 메우고 평지로 만들었다. 곧 미륵삼존을 본떠 불상을 만들고 불전과 불탑, 낭무(廊廡)를 각 세 곳에 세우고서 미륵사(彌勒寺)라는 이름을 내렸다. 진평왕은 온갖 공인을 보내 이 일을 도왔는데, 지금도 그 절은 남아 있다.”
미륵보살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모니가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미래에 구제하기 위해 현세에는 부처가 되지 않고 다음 세상에서 부처가 되려 한 보살이며, 미래불(未來佛)이라 불린다. 현실에서 고통받는 민중이 위로받으며 기댈 수 있는 보살로서 널리 숭앙되었다. 그런 보살이 왕의 행차 앞에 나타났는데, 그곳이 용화산 아래였다. 미래에 미륵보살이 내려와 깨달음을 얻는 곳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이며, 미륵보살의 법회를 용화회(龍華會)라 한다. 익산 북쪽 미륵산이 이 용화산이고, 이 산 정상 부근에 사자사가 있었다. 그 남쪽에 미륵사지가 지금도 있다.
■서로 꿈이 달랐던 왕과 민중
부처의 마음인 자비(慈悲)는 자애와 비통을 뜻한다. 얽히고설킨 인연의 질곡 속에서 괴로워하며 허우적대는 중생의 고통을 공감하는 마음이 비통이며, 중생이 해탈해 진정한 자유를 누리도록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아끼고 사랑하며 이끄는 마음이 자애다. 그런데 ‘무왕’의 서동 이야기는 이 자비를 반드시 부처가 되어야만 갖게 되는 마음이 아니라 남녀 사이의 자연스런 애정이 참되게 커지면 차별이 없는 사랑 곧 자비가 된다는 이치를 들려준다.
세속의 임금 또한 자신을 아비라 하고 민중을 자식이라 하지만, ‘왕흥사’에서 드러나듯이 그것은 허울이고 실상은 차별과 차등을 은폐하는 구실로 삼았을 뿐이다. 그 점에서 민중이 무왕의 시호에 담은 뜻은 “거짓을 물리치고 참됨을 추구하는(除僞寧眞)” 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민중은 세속 권력과 결탁해 교세를 확장하며 불도를 저버린 불교 교단에도 기댈 수 없음을 알았다.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찾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정천구 고전학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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