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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익진의 무비세프 <20> 에바 그린(Eva Green)

  • 정익진 시인
  •  |   입력 : 2021-07-25 16: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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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에바 그린. 깊고 쓸쓸하고 아름답고 고요하다. 고요 속에 무언가 숨쉬고 있다. 스며나오거나 폭발할 수밖에 없는 에너지 같은 것.
에바 그린(1980년 생). 그녀를 생각하면 그녀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상대방을 압도하는 그런 강렬한 눈빛이라기보다 상대방 실수를 눈감아주거나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듯한 배려의 눈빛이 숨겨져 있다. 거기에다 우울하고 퇴폐적적이고 염세적인 눈동자다. 나의 느낌이다. 물론 긴 속눈썹 속 크고,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연관성은 없지만, 눈을 제목으로 한 노래가 생각난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성 보컬 킴 칸스가 노래한 ‘베티 데이비스 아이즈(sung by Kim Carnes/ ’Bette Davis Eyes‘) 가사가 긴데 일부 발췌해본다.

 그녀는 당신을 집으로 초대하겠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녀의 흥미를 자극하네
 그녀는 당신을 자신의 왕좌에 누이겠지.
 그녀는 베티 데이비스의 눈동자를 가졌네.

 그녀는 당신에게 넘어지겠지.
 주사위처럼 당신을 굴리겠지.
 당신이 거의 죽을 지경이 될 때까지
 그녀는 베티 데이비스의 눈동자를 가졌네.

 그녀는 당신을 속이려고 할 때
 당신을 유혹하겠지
 그녀가 내지르는 탄성에
 기분 좋길 바래요
 그녀는 잔인해서 알고 있지
 어떻게 하면 교묘하게
 얼굴을 붉힐 수 있는지
 남자들은 모두 그녀가 스파이라고 생각하네
 그녀는 베티 데이비스의 눈동자를 가졌네


베티 데이비스(1908년생)의 눈이 에바 그린의 눈보다 크긴 크다. 가사에 나타나 있듯 베티 데이비스의 눈은 우선 겁이 없고 남자를 노예로 만들어 자신이 지배하고 군림하는 잔인하지만 유혹적인 눈빛이라면, 에바 그린의 눈동자는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아름답고 선한 눈동자이고 어쩌면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어떻게 보면 좀 어리숙한 눈빛 아닐까. 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에바 그린의 눈빛은 위험하지 않은 느낌이다.

아무튼 사람의 눈에 그의 심리가 확연하게 드러나서 일까. 사람의 눈빛이 주는 인상으로 그 사람을 어느 정도 파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에바 그린이 프랑스 배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름도 얼굴도 프랑스 사람 같지 않았다. 영화 ‘몽상가들’(The Dreamers, 2003년)을 보기 전에 그가 누군지 전혀 몰랐다. 첨 보는 얼굴이었고, 앞서 언급한 눈동자 이미지가 강렬해 오래 기억 속에 박혀있었을 뿐, 당시는 배우 프로필 같은 데에 관심이 없어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몽상가들’에서 에바 그린의 눈동자는 그저 아름다웠고, 이 영화를 본 지 20년이 됐다니 놀랍다. 남포동 부영극장(300석 이상의 옛날 극장)에서 ‘몽상가들’을 보았을까. 제니퍼 로렌스의 데뷔작 ‘윈터스 본’(2010년)을 봤을 때보다 더 오래 전이라니 참 믿기 어렵다.

   
이토록 다채롭게 변신하는 배우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007 카지노 로얄에서 치명적인 매력을 내뿜던 에바 그린은 ‘몽상가들’이라는 영화에서 수위 높은 연기를 강렬하게 표현했다. ‘몽상가들’에서 밀로의 비너스 조각상을 표현하며 오ㅗ마주를 전한 장면.


‘몽상가들’은 2003년 영화치고는 파격적인 장면이 많앗다. 대학생 자녀를 둔 프랑스 가정의의 개방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개방성(자유분방)보다 수위가 훨씬 높다. 흡연, 음주는 물론 남녀 성기가 모두 노출되며 근친상간 요소, 남녀 목욕 등이 묘사돼 개봉 때부터 외설 논란에 휩싸였다. 우리에게 영화 ‘마지막 황제’(1987년)로 잘 알려진 이 영화의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년)를 연출해 외설 논란 최고봉에 우뚝 선 바 있다.

‘몽상가들’ 내용을 간추려본다. 프랑스 파리에 온 미국인 유학생이자 영화광인 매튜(마이클 피트 분, 1981년생)와 조금 독특한 영화광 이자벨(에바 그린 분)·테오( 쌍둥이 남매가 만나고 성욕적 관계에 빠지며 일어나는 사건을 담았다. 68 혁명 당시 파리를 배경으로, 주인공들이 영화광인 만큼 여러 클래식 할리우드 영화와 누벨바그 영화를 언급한다. 그런 영화들의 짤막한 영상도 보여준다. 고전 영화 장면에 대한 오마주 외에도 예술작품에 대한 오마주가 자주 나온다. 이자벨이 검은 장갑을 끼고 검은 배경 문 앞에 선 장면은 밀로의 비너스를 모방한 장면으로 잘 알려졌다.

여기서 68 혁명이 배경이 되는데, 유럽과 프랑스 현대사에서 워낙 중요한 사건이라 잠시만 언급한다. 1968년(68년이서 68 혁명) 3월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젊은이 8명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지사를 습격한 것을 발단으로 프랑스 전역의 대학생 시위. 천만 노동자 파업으로 확산된 전례 없던 반체제·반문화 운동이다. 파리에서 시위가 시작해 냉전과 베트남전 등 시대 문제와 결부되면서 그 해 미국 독일 체코 스페인 일본 등 전 세계 피 끓는 젊은이를 저항과 해방의 열망으로 인도했다. 68 운동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으로 기록됐다. 과연 우리나라에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까.

한국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은 1· 21사태,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나 제2의 한국전쟁이 터질 가능성이 제기될 만큼, 무장간첩 침투와 휴전선 교전이 잦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 반공 분위기가 강화돼 68 혁명이 끼어들 틈새가 없었다. 68 운동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발전 단계의 궤도에 올랐을 때,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촉발된 특징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사회는 이를 수용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아무튼 영화 ‘몽상가들’은 마음 속 이상향을 하나씩 간직한 채 자유를 열망한 1960년대 후반 파리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 시대 20대에게 청춘의 힘과 희망을 생각해보게 한다. 영화는 파리의 젊은이들이 반전, 성평등, 여성해방, 직장과 학교 현장의 평등 등을 내걸고 사회 전반의 문제점을 타파하기 위해 맹렬히 싸웠던 1968년을 그려낸다. 아무튼 여러 각도에서 20년 전 본 영화치고 파격적 장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분명치 않지만 이 영화 이후 ‘크랙’(Crack, 2009년)이라는 영화에서 에바 그린을 본 듯하다. 여러 가지 면으로 우리나라 교육 환경과 사뭇 달라 영화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엄격하게 고립된 장소에 여학생의 기숙학교가 있다는 것, 모든 운동을 다 가르치는 체육교사가 아니라 전문적인 다이빙 교사가 있다는 것, 동성애 시각이 두드러진 것 등등이다.

모든 여학생의 선망의 대상인 카리스마 넘치는 다이빙 교사 미스 G(에바 그린 분)와 그녀를 추종하는 여섯 명 소녀 디(주노 템플), 릴리(엘리 넌), 포피(이모게 푸츠), 로렐(아델 맥킨), 로지(조이 캐럴) 그리고 퍼지(클레미 더그데일). 6명의 여학생 그녀들만의 특별하고 견고하던 세계는 스페인 귀족 태생의 아름다운 소녀 피아마가 전학오면서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아름답고, 다양한 경험과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고, 뛰어난 다이빙 실력까지 갖춘 피아마(마리아 발베르드)의 등장으로 리더였던 디는 질투와 위기감을 느끼고 고군분투하지만 미스 G는 피아마에게 집착(동성애)하게 되고, 더구나 피아마의 죽음으로 모든 것은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영화 ‘크랙’에서 잡힌 에바 그린의, 아주 강렬한 모습이다. 물 위에서 부드러운 자세를 취한 일상의 모습 같지만, ‘쎈’ 그 무엇이 내장돼 있는 듯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미스 G의 의외성이다. 다이빙부 아이들 앞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 면모를 과시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빵 한 개 제대로 사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면이 있고 그 외의 결점·결함도 있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은 그다지 좋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만이 가진 은밀한 분위기와 에바 그린이 맡은 미스 G라는 캐릭터가 색달랐다. 똘기 가득한 소름 돋는 연기도 볼 만했다.

에바 가엘 그린(Eva Gaelle Green)은 스웨덴 출신 치과의사인 아버지 발터 그린과 프랑스 출신 어머니 마를렌 조베르 사이에서 1980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웨덴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프랑스인의 피가 더 흐른다고 볼 수도 있다. 에바 그린은 이란성 쌍둥이로 2분 늦게 태어난 자매 조이 그린이 있다. 에바 자신은 “우리는 전혀 안 닮았다”고(unidentical) 말한다. 동생 조이는 이탈리아의 백작 후손과 결혼해 노르망디에 산다. 고모 마리카 그린도 배우이며 프랑스 가수 엘자 룅기니와는 이종사촌이다. 집안 분위기는 부르주아 풍이다. 어머니가 유대인이라 그린도 유대인이지만,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종교와는 거리가 먼 세속적 환경에서 자랐다. 그린은 종교는 갖지 않고 있지만 영적인 존재는 믿는 다고 말한다.

에바 그린은 화려한 외모와 달리 털털한 면이 많다. 사람들이 저의 본 모습을 봤을 때 놀라워한 것은 제가 ‘강남스타일’이 아니라 약간 ‘집순이’스타일이라는 것이지요. 클럽이나 떠들썩한 파티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하루 촬영이 끝나면, 착실한 범생이처럼 집으로 직행, 고작 포도주 한 잔 정도 마시고 좋은 책을 펴 들고 불 옆에서 쉬는 걸 즐기지요. 좀 지루하죠, 그렇죠? 라고 말했을 정도다. 박제와 곤충학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고, 보존 처리된 두개골과 곤충들을 수집한다(상당히 특이하다).

한때 그린은 연극계를 옹호하며 “할리우드의 문제는 스튜디오들이 슈퍼 갑들이고, 연출자들보다 훨씬 센 권한을 가진 점이다. 현재 저의 바람은 단지 좋은 각본을 찾는 것이다”는 이유로 할리우드에서 평생 일을 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린은 유니세프를 후원한다.

그린은 2017년에는 할리우드에서 잠시 벗어나 유럽권의 규모가 작은 영화에 출연했다. 로만 폴란스키의 신작 ‘실화’(2017년)는 ‘아르센 뤼팽’ 이후 13년 만에 출연한 프랑스 영화. 오랜만에 모국어 연기를 선보였다.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설립한 영화사의 첫 작품인 ‘유포리아’에서는 비칸데르와 함께 자매 역을 맡았다. ‘유포리아’(Euphoria, 2017년)는 제 22회 부산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에서 봤다. 지독히 어두운 영화로 기억한다. 죽음을 대처하는 자세는 사람마다 다름을 강조한 영화다. 에바 그린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주구장창 시종일관 몇 장면을 제외하고 거의 ‘죽을 상’을 하고 있어 더욱 기억에 남는다. 유포리아란 ‘행복감’, ‘낙관론’과 같은 의미지만, 영화 내용은 자발적인 죽음을 택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자발적인 죽음’. 그들에겐 그것이 행복이라면 행복이겠다.

   
알리시아 비칸데르(왼쪽)가 제작한 영화 ‘유포리아’에 주연으로 나온 에바 그린. 오른쪽이 그린이다.
현실을 살다 오랜만에 만난 자매가 영화 주인공이다. 평소 서로 소홀히 지내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만난 둘. 동생 이네스(알리시아 비칸데르 분)는 언니 에밀리(에바 그린 분)가 평소와 다름을 느낀다. 에밀리는 이네스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죽기 좋은 장소)’로 데려가는데, 그곳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각자 방식으로 삶을 마감하는 곳이다. 철저히 ‘고객’(죽으려 하는 사람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들의 소소한 ‘버킷리스트’를 실현시켜준다. 예컨대 어릴 적 엄마가 해줬던 팬케이크 레시피를 그대로 이용해 음식을 마련해주고, 나만의 밴드 파티를 열어주는 서비스 등등을 제공한다(돈이 많이 든다).

삭막하고 무료한 병실 생활 대신 이와 같은 마무리(죽음)를 선택한 에밀리를 누군가는 이해할 수 있겠지만 동생 이네스는 당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기서 생긴 갈등 그리고 창고 속에 묵혀 두었던 과거 상처까지 드러내며 영화는 끝까지 시소가 한쪽으로 기울지 못하게 하는데, 그러니 영화 보는 맛이 충분하다. 시인·ijj0715@hanmail.net


<추신 >
지금까지 언급한 영화 이외에 영화 ‘퍼펙트 센스’(2011년)를 보았다는 것을 거의 잊을 뻔 했다. 펜데믹을 겪는 전 세계를 생각하면 ‘페펙트 센스’는 거기에 너무나 딱 맞는 주제를 가진 영화다. 영화 수준도 높고 흥미롭다. 자신 있게 강추한다.

영화 도입부 거리의 사람들이 ‘감각 상실’의 급습을 받는다는 점에서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떠올릴 수 있다. 이른바 감각이 사라진 세계,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여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요리사 마이클(이완 맥그리거 분), 남자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과학자 수잔(에바 그린 분)두 사람은 일상에서, 특별할 것 없는 순간에 마주치지만 순식간에 서로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어느 날 인류는 정체 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후각 청각 미각 급기야 시각까지,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감정이 요동친다.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사람들은 웃고, 울고, 먹고, 마시며, 평상시와 같이 지내려고 노력한다. 그들의 삶을 바꾸고, 적응하고, 살아가며 사랑한다. 코로나 이후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정익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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