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레코드 가게나 문방구에서 사대여왕의 책받침은 물론이고 방의 벽면을 장식한 브로마이드를 쉽게 살 수 있었다. 이들의 인기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만약 그 세대 친구들이 모여 누가 최고인지 놓고 술이라도 한잔 한다면 지금도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난다.
나는 책받침보다는 일본에서 출판된 영화잡지에 더 관심이 갔다. ‘스크린’과 ‘로드쇼’. 이 두 잡지가 생각난다. 그러니까 부산 광복동 거리의 대각사(大覺寺 ) 근처 옛 유나백화점(현재는 대형 커피점) 옆 아주 좁은 골목에 두세 평 정도 넓이(벽에 붙어있을 정도)의 해외 서적 전문서점이 있었다. 당시 일본 서적 중 가장 유명한 잡지가 하이틴 패션잡지 ‘논노(non-no)’였다. 이 잡지, 없어진 줄 알았는데 1971년 창간해 올해 2021년 창간 50주년을 맞이했다니 놀랍다.
나는 그 서점 단골이었고 서점의 젊은 주인과도 좀 친했다. 이 글을 쓰면서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눈썹이 짙었다. 가끔 담배를 피우던 그의 모습도 생각난다. 그가 일본어를 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책을 팔기 위해 조금은 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일본어를 못한다. 잡지에 실린 배우들의 각종 사진만 봤다. 주로 여배우가 책받침을 장식했지만, 굳이 남자배우를 내세운다면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같은 홍콩 스타들이었다.
한국 배우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누가 인기가 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청순함의 대명사 이미연, ‘귀염미’ 터지는 이상아, 코카콜라 CF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배우 심혜진도 떠오른다. 얼마나 유명했으면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영화감독 겸 시인 유하는 심혜진을 대상으로 ‘콜라 속의 연꽃’이란 시를 쓰기도 했다. 이렇다.
우리 나라 신식 국자는 무슨 국자? 일명 신 식민지 국독자?
처음 코카콜라가 등장했을 때 웬 간장이냐며 국에 뿌린 년도 있긴 있을라
난 느껴요―코카콜라, 언제나 새로운 맛 신식 국독자로 떠먹는 코카콜라
그때마다
톡 쏘는 맛처럼 떠오르는 여자가 있다 코카콜라 씨에프에서
팔꿈치로 남자를 때리며 앙증맞게 웃는 여자, 그 몇 프레임 안 되는 장면
하나가 방영되자마자 연예가 일 번지 압구정동 일대가
술렁였댄다 그것 땜에 애인 있는 남자들의 옆구리가 순식간에
멍들었다는데……
왜 그 시에프가 히트했는가에 대한 항간의 썰들은 분분하다
가학으로 상징되는 남자와 피학으로 상징되는 여자의 쏘샬 포지션을
자극적으로 뒤튼 것이 주요했다는 친구도 있고
(놈은 허슬러부터 휴먼 다이제스트에 이르기까지 마조히즘 사디즘에
관한 미국의 온갖 빨간 책은 물론 마광수의 가자 장미여관, 야한 여자,
권태까지 섭렵한 권태스런 놈이다)
그 씨에프의 콘티는 말야 전세계 장래마저 자국의 문법으로 콘티 짜는
미국의 솜씨니까 당연한 거라구, 잘난 척하는 녀석도 있다
난 전율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심혜진의 보조개 패인 미소
뒤에도 얼마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은 쾌남아들의 거대한 미소가 도사리고 있는가
하여튼 단 심 초의 미소로 바보상자의 관객들과 쇼부를 끝낸 여자 심혜진
그녀가 요즘 씨에프에서 닦여진 순발력 있는 연기로 은막에서도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다 제목은 물의 나라
감독은 얼씨구나 양파 껍질처럼 끝없이 옷을 벗기기 시작하는데, 그녀만
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코카콜라를,
삼성 에이 에프 오토 줌 카메라를, 해태 화인쥬시껌을 사고 싶어지는 내
눈알, 나는 본다 저 알몸 위로 오버랩 되는......
온 산을 갈아엎는 사람들의 세상을 온통 콜라 빛 폐수로 넘실대게 하는
사람들을 이 땅을 온갖 욕망의 구매력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들을 그리하여
이 지구의 虛를 말살시키고 있는 사람들을 아아 하나뿐인 인격, 하나뿐인
지구
라오쯔의 말씀대로 빈 그릇만이 쓰임이 있는 것
또한 갖가지 색과 음과 맛이, 사람을 질주하는 미친 말처럼 만드는 것
수많은 심혜진들이 허를 상실 당하고 반짝 별로 사라지는 충무로
차차차여, 오늘도 그녀들의 금테 잔이 출렁출렁 넘치는구나
결국 색이란 건 아무리 벗겨봐야 양파처럼 空이 될 뿐, 아으
난 앞으로 심혜진을 보면 절제를 생각하겠다 목마르면 보리차나
드라이하게 한잔, 쏠리면? 에이 에이즈 땜에......
빈 코카콜라 병은 어따 쓰게, 그거야 화염병으로라도 쓸모가 있으리니
난 느껴요―가끔은 코카콜라 든 심혜진의 미소가 폐수 위에 핀 연꽃처럼
-유하‘콜라 속의 연꽃, 심혜진論 ―난 느껴요―苦口苦來’(전문)
가히 패러디의 만물상이라 할 만하다. 한눈에 당시 한국에서 주류를 장식한 문화 현상과 사회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겠다. 책받침 여왕 소피마르소를 이야기하던 중에 잠시 옆길로 샜다. 소피 마르소를 보긴 보았는데 어떻게 처음 보게 되었는지 좀 궁금하기도 하다.
현재 우리는 스마트 폰 시대를 살면서 필요한 거의 모든 정보와 오락 욕망을 해결할 수 있지만, 책받침 속에 스타들을 가두었던 1980년대엔 그렇지 않았다. 음악도 영화도 어느 정도 제한된 루트를 통해서 접할 수 있었다. 나의 경우 음악은 광복동 무아음악실과 필하모니에서 주로 들었고 영화는 개봉관이나 KBS 명화극장에서 많이 보았다.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접하지는 않고 LP를 사서 음악을 접했다. 그렇다면 소피마르소의 데뷔작 ‘라붐’은 언제 보았을까. 비디오로 본 것도 아니고 주제곡 ‘리얼리티’가 너무 유명해 어떡하든 보게 됐을까. 프랑스에서 1980년 개봉한 영화 ‘라붐’은 국내에서는 제때 개봉하지 않았고, 정식으로 개봉한 건 무려 33년이 지난 2013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라붐’을 봤을까. 아마도 불란서 문화원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내가 기억하는 부산의 불란서 문화원은 현재 경성대학교 정문 건너편 어떤 건물 안에 있었다. 이곳을 지칭하는 또 다른 말 ‘알리앙스 프랑세즈(?)도 있었다. 제대하고 서울서 잠시 직장생활 할 때도 당시 삼청동에 있던 불란서 문화원에 자주 다니며 영화를 봤다. 할리우드 영화와는 좀 다른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게 중요했다. 영어로 자막이 돼 있어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색다른 배우들과 프랑스 영화 특유의 분위기를 호흡할 수 있어 좋았다.
'라붐’은 클로드 피노토 감독의 1980년 영화이며, 소피 마르소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이다. 영어 제목은 ‘The Party or Ready for Love’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베르사유 출신 13세 소녀 빅(Victoire “Vic” Berreton, 소피 마르소 분)이 파리로 이사하여 첫사랑을 경험한다는 이야기다. 영국 출신 가수 리처드 샌더슨이 부른 주제가 ‘Reality’가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영화를 보다 보면 정말 이 노래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장면들이 있다. 광고에서도 여러 번 패러디됐다. 영화에서 마티외(알렉상드르 스테를링 분)가 빅(소피 마르소)에게 씌워주는 헤드폰을 통해 이 노래가 울려 퍼진다. 지금 봐도 그 장면에서 ‘리얼리티’보다 더 잘 어울리는 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노래를 듣는 소피 누나의 청순한 표정 때문에 얼마나 많은 남동생들이 밤잠을 설쳐댔는가. 그 장면 자체가 뮤직비디오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노래와 영화, 배우가 서로 녹아든 명장면으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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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피 마르소의 데뷔작 ‘라붐’(1980)에 나오는 유명한 ‘헤드폰 장면’이다. 이때 이 영화 주제곡 ‘리얼리티’가 흘러나온다고 한다.. 아무도 저 잘생긴 남자 배우는 기억하지 못할 만큼, 소피 마르소(오른쪽)가 압도한 영화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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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나드 로즈 감독의 1997년 영화 ‘안나 카레니나’에서 주연을 맡은 소피 마르소의 모습이다. 소피 마르소는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다. 당시 개막 파티 등에서 소피 마르소를 직접 본 한국의 나이 든 기자들은 ‘이게 과연 꿈인가 생시인가’ 되뇌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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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 깁슨이 감독하고 주연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공주’ 역할로 출연한 ‘원조 책받침 여왕’ 소피 마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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