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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의 부산 가요 이야기 <33> 부산을 빛낸 작사가 야인초

北 귀향 않고 부산 정착 … 섬세한 현실묘사 노랫말로 심금 울려

  • 이동순 시인
  •  |   입력 : 2021-09-12 19:41:05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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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김봉철 … 징용 피해 일본행
- 해방 후 부산에 매료돼 눌러 앉아
- 지역 최초 추정되는 음반사 차려
- 장비 없어 참기름 틀로 음반 찍어

- 영도대교 아래 수많은 점집 묘사
- 환락가 쏘다니는 선원의 모습 등
- 현지답사 통한 생생한 현장감에
- 시적묘사·상상력 밀도 있게 배치

식민지와 분단, 전쟁을 겪으며 항도 부산은 격동의 변화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 가게 되는 중간기착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 땅의 청년들은 남녀 누구나 할 것 없이 지원병, 강제징용, 정신대, 근로보국대 따위의 명분으로 고향을 떠나 일본, 혹은 남양군도로 끌려가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대개는 고향 집, 고향 마을 동구 밖, 고향 역에서 눈물로 작별했을 터이나 떠나는 자식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는 마음으로 일본 배, 즉 연락선이 떠나는 부산항까지 따라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항구에는 왠지 까닭 모를 불안함이나 스산한 기류가 흐르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이제 가면 다시는 가족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무겁고 불길한 공감으로 작용했으리라.
야인초가 쓴 노래 가사에 등장하는 부산의 모습.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는 수리 조선소(왼쪽)와 영도다리 아래 점집들. 국제신문DB
그렇게 가족들과 작별하고 고국을 떠난 뒤 무사히 살아 돌아온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개는 만리타국의 탄광이나 활주로, 후미진 산골, 구덩이에 백골을 묻은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도쿄대지진에서도 그러했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투하 과정에서도 그러하였다. 오키나와 남부의 어느 굴은 한국인 징용자들이 집단으로 죽음을 맞은 곳이 있었다.

여러 해전, 일본 고베에서 학회가 열렸을 때 잠시 시간을 내어 한 양심적 일본인이 운영하고 있는 한국인 피해자 명부를 작성하는 단체에 초청을 받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한국인 사망자 명부를 보았다. 두툼한 여러 권의 책에는 이름과 나이, 고향, 사망 장소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일본인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들은 모두 부산항 제2부두에서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났을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떠났거나, 돈벌이 한다는 기쁨을 안고 출국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사할린으로 떠난 사람들은 그곳 탄광 막장에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으며 살다가 다시 후쿠오카 탄광의 일손 부족으로 거듭 차출되어 끌려간 사람도 있었다. 그것을 ‘이중징용’이라고 부른다.

■징용 피해자들의 고통 담긴 노래들

탄광이나 활주로 닦는 공사장에서 힘든 시간을 견디다 못해 탈출을 감행하다가 추적하는 사냥개와 감시조, 체포조에게 잡혀 죽임을 당한 경우도 있었으리라. 혹은 붙잡혀 매질이나 고문을 받다가 죽임을 당한 사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김동환 시인의 서사시 ‘승천하는 청춘’은 도쿄 대지진에서 탈출하는 한국인 청년들의 비통한 삶을 다루고 있는 드문 테마의 작품이다. ‘울며 헤진 부산항’이나 ‘연락선은 떠난다’, ‘어머님전 상서’ 등은 고국을 떠나는 장면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지극한 마음이 담겨져 있어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고향이 북쪽이지만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산에 그냥 눌러앉아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가 오늘 다루고자 하는 작사가 야인초(野人草)의 삶이 그러하다. 그의 본명은 김봉철(1919~1999·사진), 황해도 박연 출생이다. 야인초란 예명은 일본 중세의 수필가 요시다 겐코(吉田兼好)의 작품 제목 “도연초(徒然草)”의 어법을 모방한 형태로 보인다. 야인으로 거칠게 닥치는 대로 살아온 험한 인생이란 뉘앙스가 이름에서 풍겨난다. 실제로 김봉철은 징용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일본 배를 탔다고 한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그 이듬해에 귀국하는데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부산이 좋아서 그때부터 부산에 눌러앉아 살게 되었다.

김봉철은 영도구 남항동에서 생계를 위해 작은 철공소를 열었다. 식민지 시절 일본에서 음반제작사의 하급고용인으로 일한 경험이 있던 그는 철공소 한쪽 구석에 음반 제작설비를 하나씩 갖추었다. 그 물품들은 미군부대 뒷문으로 흘러나오는 녹음기와 기타 장비들인데 국제시장에서 구입했다. 이 영세한 장비로 시작한 것이 부산 최초의 음반사로 추정되는 ‘코로나레코드사’의 실상이다. 이숙희의 부산블루스를 코로나레코드 이름으로 딱지를 붙여 첫 발매했지만 이후 거기서 찍어낸 음반은 소수에 불과하다. 작사가 한산도가 한종명이란 예명으로 ‘고향 아닌 고향’을 코로나에서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음반을 눌러서 찍는 프레스가 없어서 참기름 짜는 틀을 빌려와 찍어낸 이야기는 유명하다. 김봉철은 미도파레코드사의 녹음기사로도 일했다.

■부산에 정착한 야인초의 삶

야인초의 노래가 담긴 앨범.
야인초와 가장 가깝게 우정을 나누던 친구는 같은 황해도 출신의 작곡가 강남주이다. 그는 식민지 시절 가수로 활동하다가 작곡가로 변신하여 진작 부산에 터를 잡았다. 야인초는 작사가로서 차츰 두각을 나타내었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그의 작품은 60편이 넘는다. 앞으로 더 찾아낸다면 100곡까지도 늘어날 듯하다. 그 제목이나 가사를 자세히 음미해보면 야인초의 가사 작품에서 항도 부산은 매우 정확하고 섬세한 현실 묘사로 되살아나고 있다.

‘낙동강 길손’(오경환), ‘마도로스 멋쟁이’(백야성), ‘마도로스 삼총사’(백야성), ‘마도로스 샹송’(은방울자매), ‘무정한 부산항구’(성춘남), ‘무정한 연락선’(손명국), ‘부산 블루스’(이숙희), ‘부산 행진곡’(방운아), ‘부산항’(정향), ‘손금 보는 내력’(박재홍), ‘용두산 에레지’(고봉산), ‘자갈치 룸바’(은방울자매), ‘칠일 간 부산항’(정향) 등이 부산을 다룬 작품들이다.

이 가운데서 우리는 ‘손금 보는 내력’ 노랫말에는 ‘부산을 떠나볼까 제주도를 가볼까/ 제트기 껄껄대는 영도다리 난간에서/ 사주팔자 걸어놓고 손금점이 웬 말이냐’란 대목이 등장한다. 영도다리 아래쪽의 수많은 점집들을 담아내고 있다. ‘부산행진곡’은 국제적 무역항으로 한껏 발전하는 부산항의 통시적 시간성에 대한 예측을 멋지게 엮어낸다. ‘칠일간 부산항’은 ‘도꾸에 잠든 배는 7일간 수리’란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선박정비를 위해 한 주일 동안 도크에 접수시킨 선원들이 부산의 명소인 송도, 광안리, 해운대 등지의 환락가를 마구 즐기며 쏘다니는 1960년대 풍경을 담아낸다.

작사가 야인초의 작품 중 가장 대중들의 귀에 익은 노래는 ‘공양미 삼백 석’(김용만), ‘남원의 봄 사건’(황정자), ‘돌아가자 남해 고향’(손인호), ‘부산 행진곡’(방운아), ‘신라의 북소리’(도미), ‘오동동타령’(황정자), ‘용두산 에레지’(고봉산), ‘한 많은 대동강’(손인호) 등일 것이다. 이 작품들도 한국의 고전작품, 경남 남해, 마산 오동동 부근의 아름다운 밤 풍경, 두고 온 북녘 산하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부산의 여러 명소와 전형적 풍경을 담아내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작사를 위해 현지를 답사하고 메모를 했으며 가사작품에 한껏 시적 묘사와 상상력을 밀도 있게 배치하였다. 야인초 노랫말이 주는 미학적 특징은 장소와 공간묘사의 현장감, 그 시적 문맥에서 배어나는 실감나는 정서, 전통적 흥과 여운효과의 다양한 구사라 하겠다.

야인초는 노래가사 분야에서 부산을 빛내는 일에 크게 헌신했던 아름다운 작사가였다.

시인·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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