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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탄생 100주년 그를 회고한다 <4> 김종회 이병주기념사업회 대표

역사는 ‘산맥’을 기록했고, 그는 인간의 아픔 ‘골짜기’를 기록했다

  • 김종회 이병주기념사업회 대표
  •  |   입력 : 2021-09-23 19:10:36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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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림이 남긴 80여 권 분량 작품
- 역사성과 대중성 두 줄기로 양립
- 역사가 보여주지 못한 삶의 슬픔
- 디테일한 담화로 다채롭게 풀어

- 문·사·철 망라 선집 12권 곧 발간
- ‘읽기의 재미’ 공여한 그의 글로
- 새로운 독서운동 시작되길 기대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명골길에 자리한 이병주문학관에 있는 작가 이병주 조형물이다. 벤치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 조각품은 방문객이 이병주 작가 옆에 앉아 기념촬영을 하고 글의 기운(文氣)을 받는, 이병주문학관의 명물이다. 전민철기자 jmc@kookje.co.kr
■ 역사를 쓰고 신화가 된 작가

소설가 나림 이병주 선생의 탄생이 1921년이니 올해로 꼭 100주년이다. 그의 타계는 1992년으로 내년이면 30주기다. 대학 국문학과에서 30년간 문학을 강의하고 문단에서 문학평론가로 33년간 비평문을 써 온 필자의 견식으로, 나림을 일러 ‘불세출의 작가”라 호명하는 것이 그다지 무리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남긴 80여 권 분량의 소설과 에세이, 종횡무진의 서사를 자랑하는 실록소설과 춘추필법을 구사하는 에세이를 정독해 보면 이를 쉽사리 납득할 수 있다. 일찍이 그는 책상 앞에 “나폴레옹 앞에는 알프스가 있고 내 앞에는 발자크가 있다”고 써 붙여 두었던 터이니, 기량에서나 의욕에서나 천생의 작가였던 셈이다.

■ 새로운 선집 열두 권 곧 출간

이병주문학관 서가의 책.
대표적인 이병주 연구자였던 고(故) 김윤식 선생에게서 필자가 직접 들은 회고담이다. 어느 방송에 함께 출연해 나림의 장편소설 ‘비창’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작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사고와 행위가 너무 질정(質定)이 없지 않느냐.” 그랬더니 나림의 대답이 이랬다는 것이다. “나는 육십이 넘은 지금도 세상살이에 갈팡질팡하는데, 이제 삼십 넘은 술집 마담의 형편에 질정 없이 행동하는 것이 이상할 바 있겠느냐.” 김윤식 선생은 그 ‘우문현답’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고 했다. 김 선생이 말년에 토로한 바로는, 한국의 작가 가운데 사람으로나 작품으로나 가장 기억에 남는 이가 나림이라고 했다.

나림이 유명(幽明)을 달리한 지 10년 뒤인 2002년, 그의 출생지인 경남 하동에서 최증수 선생을 중심으로 한 기념사업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07년 김윤식 선생과 하동 출신 정구영 전 검찰총장 등을 중심으로 전국 규모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그리하여 주로 역사 소재의 대표작들을 중심으로 서른 권의 이병주 선집이 발간됐고, 이병주국제문학제와 이병주국제문학상 등 본격적인 현양 사업이 지속되어 왔다. 올해는 다시 대중적 수용성이 뛰어난 작품을 중심으로 열두 권 선집을 발간할 계획이고, 한국문인협회·국제펜한국본부·대산문화재단 등이 그를 조명하는 특집을 마련했다.

■ “역사는 믿을 수 없는 것이네”

1987년 유영진 감독이 이병주 원작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비창’을 담은 비디오.
필자가 나림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원 석사과정에 갓 입학한 해 봄이었다. 장소는 광화문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이었고, 대학에서 내는 잡지의 원고 청탁을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역사란 무엇이냐’는 무모한 질문을 던졌고, 선생은 매우 간략히 ‘역사는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공부를 더 하고 보니, 선생의 답변은 그의 문학관 곧 신화문학론에 근거한 문학 관점을 압축한 것이었다. 장편소설 ‘산하’의 에피그램 “태양에 바래이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나, 그의 어록인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 등이 모두 그와 동궤(同軌)의 맥락이었다.

실재적 사실로서 역사는 인간사의 깊은 굴곡에 숨어 있는 슬픔이나 아픔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장르가 소설이라는 선생의 확고한 지론(持論)이 거기 있었다. 어쨌거나 그 만남을 기점으로 필자는 나림 연구자가 됐고 2007년부터 현양 운동의 실무를 맡았으며 그 세월이 10여 년이 되었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지만, 기실 필자에게는 나림과 관련된 원죄가 없지 않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의 소설을 탐독한 전력이 그렇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소설만 열심히 읽었는데, 운명의 인과는 허술함이 없어서 오늘 여기에까지 이른 형국이다. 바라건대는 그 인연이 그야말로 선인선과(善因善果)였으면 한다.

■ ‘이병주가 집에서 기다린다’

나림의 소설은 장대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유장하게 풀어나가는 데 특장이 있다. 일찍이 그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을 읽고 그 마력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한 것은 그런 점에서 사뭇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은 확고하게 ‘읽기의 재미’를 공여한다. 미상불 이는 소설 형식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책을 서재에 두면 귀가하는 발걸음이 빨라진다는 수사(修辭)나, ‘이병주가 집에서 기다린다’는 비유적 표현은 이를 잘 말해준다. 동시에 그의 소설은 인생사에 대한 교훈과 경륜을 습득하게 한다. 현란한 현대사회의 물질문명 앞에 위축된 우리 시대의 갑남을녀(甲男乙女)에게, 거대담론의 기개를 회복하고 굳어버린 인식의 벽을 부수는 상상력의 힘을 북돋울 수 있다.

오랫동안 그의 소설과 더불어 살아온 필자의 시각에는, 그 소설들이 역사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줄기의 형용으로 양립되어 있다고 인식된다. ‘관부연락선’ ‘지리산 ’ ‘산하’ 같은 한국 근·현대사 소재 3부작과 ‘바람과 구름과 비’ ‘그해 오월’ 같은 작품은 웅장하고 견고한 역사성의 성채 같다. 그런가 하면 ‘낙엽 ’‘허생과 장미’ ‘행복어사전’ 같이 시대와 사회 속에서 구체적 삶을 엮어가는 이들의 디테일한 담화들은 다채롭고 윤기 있는 대중성의 모형을 이룬다. 이 양자를 기축(基軸)에 두고 나림의 문학은 한껏 날개를 펼쳐 비상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의 산문들이 탐사하는 철학과 사상, 인문주의의 식견은 그것대로 또 하나의 괄목할 만한 획을 이룬다.

■ 새로운 독서운동 시작하자

이 글의 의도가 나림의 소설이 남긴 문학적 의의와 존재 값을 후하게 평가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실과 어긋나는 견강부회를 가져올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비평적 감식을 수행하는 것이 나림 문학의 위의(威儀)에 대한 연구자요 현창자로서의 도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림을 있는 그대로 읽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읽을 수 있도록 마당을 닦고 멍석을 까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으로 본다. 이 말은 나림의 문학과 더불어 우리 시대 새로운 독서운동을 시발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러운 기대를 안고 있다. 어느새 많은 이가 종이책과 멀어지고 문학이 먼 외계의 풍설(風說)처럼 들리는 실제적 우려가 인문학 위기라는 이름으로 제시된 형편이기에 그렇다.

문학을 통해 간접 체험으로서 세계를 탐색하고 스스로 가치 기준을 정립하는 고전적 독서론의 범례를 굳이 서구 작품이나 중국 ‘삼국지연의’ 등에서만 찾을 일이 아니다. 나림의 역사 소재 소설들은 특히 이 대목에서 바람직한 전범이 될 수 있는 것이 많다. 또한 현대사회 남녀 간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한 소설도 저마다 역할이 있다. ‘행복어사전’에서 우등생의 모범답안과 같은 삶의 지향점을 버리고, 일상의 구체적 세부를 음미하는 인물의 자기 충족은 오늘날과 같이 파편화되고 미소(微小)화한 현실 가운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微)에 신(神)이 있느니’라는 그의 소설 한 대목에 있는 기막힌 레토릭이다.

■ 화합의 고리, 나림

이병주기념사업회 발족 이후 역사성의 소설을 모은 선집 30권이 나온 것은 2006년이었다. 15년 지난 올해 대중 성향의 ‘재미 있는’ 선집 12권이 새로 나온다. 한국문학에서 문·사·철의 고급한 교양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가, 사상서 좌·우익을 망라해 문학을 통한 정치 토론을 유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작가가 나림이다. 그런 연유로 그 기념사업회에는 좌·우 이념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망라돼 있다. 이제 한국 문단은 그에 대해 대체로 인색했던 평가와 비교적 미흡했던 연구의 구각(舊殼)을 탈피해야 한다. 아름다운 고장 하동의 삼포지향(三抱之鄕)을 기리듯, 하동이 낳은 걸출한 작가 나림 이병주를 다시 돌아볼 때이다. 탄생 100년, 한 세기의 무게가 거기에 얹혀 있는 까닭에서다.

◇김종회 대표는

▷한국문학평론가협회 국제한인문학회 박경리토지학회 등 회장 역임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 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

※공동 기획 : 국제신문·이병주문학관·상지E&A/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그린조이

※후원 : 하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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