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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탄생 100주년 그를 회고한다 <6> 김언종 고려대 명예교수

믿지 못할 격동의 근현대사…그는 소설로 진짜 문제를 짚었다

  • 김언종 고려대 명예교수
  •  |   입력 : 2021-10-03 19:10:35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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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자에 따라 달라지는 역사
- 나림은 사실적 문학에 바탕 둬
- ‘그해 5월’ 같은 시대배경 소설
- 박정희 정권 18년사 등 보는듯

- 나름대로의 해결 방안도 담아
- 미래 설계하는 자료 삼게해야

옛사람들은 한 시대에 살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어리석음으로 여겼다. 공자의 “더불어 말을 나눌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러지 못했다면 사람을 잃은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을 잃지 않는다”는 말씀이 바로 이런 경우에도 속하는 듯하다.
많은 독자에게서 꾸준히 사랑받는 이병주 장편소설 ‘지리산’의 장면을 모형으로 재현한 이병주문학관의 전시물이다. 전민철 기자
한 시대를 살며 어떤 사람을 존경한다면 어떤 노력을 해서라도 직접 만나 배움을 청하는 용기와 실천력은 언제나 유용하다. 용기와 적극성이 없어 쭈뼛쭈뼛하다가 훌륭한 인물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눈앞에서도 놓치고 마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공자와 석가모니나 예수와 소크라테스가 마침 우리 동네나 우리 집 앞을 지나가고 있다고 가정하자. 득달같이 달려가 인사를 드리고 한두 마디 귀한 말씀을 청해 들은 사람도 있건만 그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귀한 순간을 놓쳐 버렸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이야말로 천추(千秋)의 한이 아니겠는가?

■ 역사를 믿을 수 없다고?

펜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인상 깊은 이병주문학관 전경. 전민철 기자
동년배인 김종회 평론가(이병주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만나면 나는 늘 주눅 드는 게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그가 약관의 나이에 나림 이병주를 만나 문학에 관한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대학 시절 이병주의 서재와 집필실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던 나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 어물어물하다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적어도 오십 년의 한(恨)은 될 것이다.

지혜로운 문학청년 김종회의 첫 물음은 “역사적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였고 이미 문단의 대가였던 나림의 대답은 “역사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였다. ‘역사를 믿을 수 없다니? 노나라 역사를 중심으로 당시 각 제후국 역사를 곁들이기도 한 ‘춘추’를 기록한 사관들의,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며 정의를 위해 바른 글을 썼다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감동했고, 궁형(宮刑)을 당하고도 아버지의 유언을 실천하기 위해 치욕스런 삶을 살면서 마침내 ‘사기(史記)’를 완성하고서야 행방불명이 된 사마천에 대한 존경심이 가슴에 가득했으며, 많은 선비의 목숨을 앗아간 필화 사건을 겪으면서도 진실만을 적어 당시의 왕도 볼 수 없게 했다는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했던 나는 나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역사를 믿을 수 없으면 무엇을 믿으란 말인가?

■ 나림을 수긍하게 된 과정

이병주문학관이 소장한 ‘바람과 구름과 비(碑)’ 연재소설 스크랩.
그런데 헤로도투스까지는 몰라도 ‘춘추’ 내용을 가장 잘 풀어 쓴 ‘춘추좌씨전’과 ‘사기’의 기록이 반은 픽션이라는 놀라운(?) 사실과 ‘조선왕조실록’도 당파의 부침에 따라 자당(自黨)에 유리하게 개수(改修)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나림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옳고 나는 그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뿐 아니라 그 누구도 그 어떤 책도 실제 있었던 역사의 진실 그대로를 기록할 수는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이나 긍정하기 쉽지 않은 사실을 의식하고부터는 나림의 생각이야말로 진실이며 나아가 역사의 빈 곳을 채우는 기제로는 소설이 가장 적절한 것임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나림의 명언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말의 뜻을 짐작하게 되었고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는 명언도 약간은 이해하게 됐다. 수많은 이병주의 소설 가운데 상당 부분은 어쩌면 산등성이를 기록할 뿐인 역사서와는 달리 그 아래 골짜기에서 벌어지는 하고 많은 별의별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일례로 사마천을 떠올리게 하는 지식인 이사마가 주인공인 ‘그해 5월’은 평론가 임헌영의 말대로 “기전체 수법으로 접근한 박정희 정권 18년사” 인 것이다. 김윤식은 가끔 “이병주의 소설이 소설도 아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의 본뜻을 나는 들은 지 오래된 지금도 모른다. 하여간 한 시대 문학계의 종장(宗匠) 김윤식은 생의 마지막 10여 년을 이병주 연구에 몰두해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 성과를 거두었음을 상기한다.

■ 회오리 같고 폭포 같은 문체

짧은 조우의 대화 두 마디가 김종회로 하여금 오랫동안 이병주기념사업회를 이끄는 견인차가 되는 데 결정적 동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은 까마득한 옛날의 일인데 그때 나는 김종회와 이병주가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혹 혈연관계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음습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는 어딘가 약간 닮았을 뿐이고, 이병주의 아들 이권기 교수를 만나고 보니 누가 아들 아니라 할까 걱정이라도 한 듯, 판박이여서 나림과 김종회의 관계를 의심하다 잘못하면 멱살 잡혀 땅바닥에 패대기쳐질 끔찍한 일은 내 마음속에서만 생겼다가 사그라진 것이 됐다. 다행히도.

국문과를 다니며 문학청년이었던 내 젊은 시절의 은사이신 황순원 선생께 참으로 죄송하게도 나의 우상은 그 누구도 아닌 이병주였다. 내 성향은 애초부터 한 땀 한 땀 수놓듯 정밀한 문장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 문학보다는 회오리바람 몰아치듯 계곡물 쏟아지며 흐르듯 힘찬 문세를 바탕으로 한 서사적 문학에 더 끌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림이 대표작 ‘지리산’을 쓴 1972~1978년과 ‘산하’를 쓴 1974~1979년은 나의 대학 시절과 그대로 겹친다.

은사 황순원 선생의 글이 맨정신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세하게 공을 들인 해서(楷書)라면 이병주의 글은 도도한 주흥을 못 이겨 일필휘지로 갈겨 쓰는 광초(狂草)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광초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지부해함(地負海涵)의 박식과 달변 및 사상성에 감탄과 감동을 한 나머지, 아무리 노력해도 이병주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부터 자괴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작가가 되어 명성을 얻고 싶었던 젊은 날의 허황한 꿈을 쉽사리 접고 말았다.

■ 이병주를 ‘박제’하면 안 된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박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백과사전식 박식이 아니라 일관(一貫)하는 그 무엇이 있으니 박식은 비단이요 그 무엇은 비단에 찬란하게 수놓은 꽃인 것이다. 내 머리 속에는 이런 수준의 인물이 두 명이 있는데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다. 이 두 위대한 천재의 역량을 현실에서 펼칠 수 있었더라면 역사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이가환은 그 엄청난 박식을 발휘도 기록도 해보지 못한 채 말도 안 되는 죄로 옥사해 목이 잘려 남대문에 걸렸고, 정약용은 갓 사십 나이에 숙청되어 그 이후 죽을 때까지 웅지를 펴 볼 기회를 못 가졌으며 세상을 구할 방략을 담은 500권 넘는 저술을 남겼지만, 조선이 망할 때까지 한 권도 출판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박제된 천재들이 되었다. 그들의 실학(實學)은 당대에 절실히 필요한 학문이었으니 그들이 간 지 200년이나 지난 지금 더는 실학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병주를 두 분과 합해 근 300년 3대 박식자라 부르고 싶지만, 이병주도 박제로 만들어 선 안 된다. 그 방안은 무엇일까?

■ ‘이병주 읽기 운동’ 상상한다

이병주 소설이 전개하는 역사 무대가 일제시기부터 8·15, 6·25, 4· 19, 5· 16을 거쳐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등장하는 1980년대 말까지 격변기다. 그의 소설은 역사를 포함한 어떤 형식의 글보다 생생하게 그 시대의 문제를 다양하게 제기하고 나름대로 해결방안을 제시하니 바로 ‘소설로 쓴 역사’다. 이병주 소설이야말로 좌우 어느 한 쪽으로 편향되어 적어도 과반수는 동의하지 못하는 현행 역사 교과서의 현대사를 대체하든 또는 보충하는 데 활용돼야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시대 사람들에게 소설로 쓴 역사인 이병주의 글을 읽도록 권하여 미래를 설계하는 자료로 삼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 방안이 아니겠는가?

◇ 김언종 교수는

▷고려대 한문학과 명예교수 ▷한국고전번역학회 회장, 한국고전번역원 이사 지냄 ▷저서 ‘한자어 의미 연원사전’(공저)‘한자의 뿌리’ 등.

※공동 기획 : 국제신문·이병주문학관·상지E&A/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그린조이

※후원 : 하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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