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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탄생 100주년 그를 회고한다 <7> 임규찬 도서출판 함향 대표·작가

시대 위에서 시대를 내려다보며, 그는 인간의 도구화에 분노했다

  • 임규찬 대표
  •  |   입력 : 2021-10-17 19:41:43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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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산하’ 도구화 다룬 작품
- 시대 앞서가 강력한 현재성 발휘
- 돈·性 등 현재 문제 생각하게 해

- 그의 문학에 자주 등장한 ‘운명’
- 삶의 목표로서의 자기확신 성취
- 인간을 이해하고 감당해낸 표현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 -이병주

이병주 문학이 생명을 얻자면 이병주 문학의 현재성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이병주 문학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병주 문학을 알 수 있다. ‘도구화의 문제’는 여전한 현재형이고, 어떤 우연이 만드는 운명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는 공간에선 감정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감정에는 희로애락과 같은 1차적이고도 직접적인 감정이 있는가 하면, 서러움이나 연민과 같은 2차적이고도 간접적인 감정이 있다. 삶이 깊어지는 것이란 직접적인 감정에 덜 휘둘리고 간접적인 감정에 더 많이 의지하는 게 아닐까? 하동의 시월은 빛나고 있었다. 아름답게 쓸쓸했다. 2020년 10월 하동 이병주문학관이었다.

하동의 환대는 가슴에 남았고, 진교에 사는 지인이 준 근사한 선물 ‘솟대’는 사무실 원탁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나의 이병주 읽기’는 시작되었다. ‘나의 이병주 읽기’란 실은 부산을 배경으로 한 작가 이병주의 소설 ‘예낭풍물지’에 등장하는 “나도 나의 예낭이란~, 그러나 나의 예낭을~, 그렇다고 해서 나의 예낭이~, 나의 예낭은~”이라는 표현에서 유래했다. ‘나의 이병주 읽기’는 ‘나의 예낭’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 이병주 문학의 두 줄기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병주문학관에 전시된 이병주 작가의 소설 ‘예낭풍물지’ 영문판 표지이다. 이 작품은 부산이 배경이다. 전민철 기자 jmc@kookje.co.kr
‘지리산’에서 ‘산하’까지는 가파른 길이었다. 숨을 헐떡이고, 한숨짓기도 했다. ‘청사에 얽힌 홍사’에서 ‘관부연락선’ ‘소설·알렉산드리아’ ‘매화의 인과’ ‘마술사’ ‘쥘부채’ ‘패자의 관’ ‘변명’ ‘예낭풍물지’ ‘겨울밤’ ‘망명의 늪’ ‘제4막’ ‘문학을 위한 변명’까지는 평탄한 길이었다. ‘별이 차가운 밤이면’은 아까운 길이었다. ‘비창’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는 가속도가 붙은 길이었다. 그러고도 읽어야 할 책은 책꽂이에 있다. ‘바람과 구름과 비(碑)’ ‘행복어사전’ ‘운명의 덫’ ‘허와 실의 인간학’ 등.

이병주 문학은 행복한 책 읽기에 가깝다. 재밌다. 심리묘사, 상황묘사, 자연묘사가 뛰어나다. 독창적인 시도가 많다. 빛나는 통찰이 곳곳에 박혀 있다. 대사가 좋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세다. 이병주 읽기가 쌓여가던 어느 날 질문들이 솟아올랐다. ‘그는 왜 이토록 많은 글을 썼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생존해 있다면 어떤 글을 썼을까?’ 나는 이 물음에 답하고 싶었다.

이병주 문학은 크게 두 줄기로 뻗어있다. 인간의 도구화 문제와 운명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야기는 반드시 공동적으로 체험하고 전승하는 틀이 있고, 공동의 체험과 사실을 자신의 구체적 상황에 맞게끔 개인화하는 자유로움이 있다.”(‘한국 구비문학의 이해’ 16쪽) ‘지리산’과 ‘산하’와 같은 대하소설이 주로 도구화 문제를 다뤘다면, 그 외 장·단편은 대체로 운명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 자중자애(自重自愛)

작가 이병주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일곱 권짜리 소설 ‘지리산’(위쪽)과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장편소설 ‘관부연락선’.
‘지리산’은 1938~1956년 민족사를 1972~1977년 월간 ‘세대’에 연재한 것을, 1985년 원고지 3000매의 뒷부분을 첨가해 7권으로 냈다. “봉선화는 담장의 그늘 속에 이슬을 머금고 수줍은 분홍 빛깔이었다”는 문장으로 긴 드라마를 시작한다. 주인공 박태영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비로소 파르티잔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자각은 박태영으로 하여금 복잡한 자의식을 갖게 했다. 무한한 자기신뢰로써 흐뭇해진 대신 모처럼 얻은 이 자기신뢰가 보람을 꽃 피우기도 전에 절멸할 것이 아닌가 하는데 대한 허무감이었다”고 썼다.

작가후기에 “특히 하준규, 박태영은 세상을 제대로 만났더라면 대인물로서 성장할 수 있는데 그들에게 운명은 너무나 가혹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래서 ‘지리산’에는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아껴야 한다는 ‘자중자애’가 빈번히 쓰였으리라. 이념의 도구가 된 삶의 허망함과 그 도구화를 통해 잇속을 챙기는 자들에 대한 분노의 정서가 ‘지리산’ 전체에 흐른다.

‘산하’는 1945년 8월 15일부터 1964년까지 이야기로 1974~1979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것을 1985년 4권으로 펴냈다. 경남 김해의 노름꾼이자 일자무식꾼 이종문이 서울로 가 성공하고 몰락한 과정을 그렸다. 이종문을 둘러싼 인물은 대부분 이념형 인간이다. 그속에서 이종문은 거침없이 자기 삶을 살다 갔다. ‘산하’는 “그러나 삼각산이 춤을 추건 낙동강이 노래가락을 불렀건 우리의 이종문이 알 바가 아니었다”는 실질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반면 이념형 인간들은 “정치에 미쳐있는 사람들은 좌나 우나 봄을 몰랐다. 봄을 모른다기보다 계절에 무관했다. 핏발이 선 눈은 꽃도 신록도 보지 못한다”며 이종문과 대비했다.

■ 그는 무엇에 저항했나

인간의 도구화에 분노했다는 점에서 이병주 작가는 시대 위에서 시대를 내려다봤고, 시대를 앞섰다. 이제 지금의 도구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타인의 몸과 마음을 자기 것 같이 이용해 잇속을 챙기는 정치적 도구화의 문제는 범위가 넓지 않다. 이념의 시대는 갔고, 시민의식은 정치인의 의식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2021년 도구화의 문제는 돈이다. 돈의 힘이 막강해지면서 돈은 삶의 목표이자 의미가 됐다. 잘사는 삶이 아니라 돈을 버는 삶이 핵심이 됐다. 그 결과 삶이 돈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돈이 삶을 끌고 가는 생활방식은 보편적인 것이 됐다. 돈이 없다면 어떤 삶도 조롱과 멸시를 모면하기 어렵다. 삶에는 우정도 있고, 염치와 성실도 있다. 친절과 배려와 양보도 있다. 용기도 있고, 도전도 있다. 돈은 이것들과 어우러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삶이 비루하지 않고, 허망하지 않다. 성적 도구화 문제도 있다. 사랑과 우정이 저류에 흐르지 않는 한 그것은 폭력일 수밖에 없다. 다른 도구화 문제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도구화에 대한 감수성이다. ‘도구화되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고, ‘도구화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다. 도구화에 대한 감수성은 이병주 문학의 강력한 현재성이다.

운명을 얘기할 차례다. 이병주 문학에는 운명이란 단어가 유독 많이 나온다. “운명은 이에 순응하는 사람은 태우고 가고 이에 거역하는 사람은 끌고 간다”는 세네카의 말도 자주 인용한다. ‘관부연락선’ 마지막 문장도 “운명… 그 이름 아래에서만이 사람은 죽을 수 있는 것이다”로 끝맺는다. “운명은 이곳저곳에 함정을 파 놓기도 하지만 오묘한 인연의 줄을 엮어 놓기도 하는 것이다”(‘별이 차가운 밤이면’) “운명애(運命愛)엔 방법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방법이 뭣이냐. 친화(親和)의 화(和)를 관철하는 방법이다. 화를 관철한 인생은 성공된 인생이다.” (‘비창’) 또 ’비창‘ 작가의 말에서 “나는 이 소설에선 특히 운명을 감당하여 사람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을 의지를 강조하고 싶었다”고 썼다.

■ 삶을 이해하고 감당하기

이병주 문학의 운명을 나는, 삶의 실상과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삶을 잘 감당하기로 읽었다.

그는 야만 시대를 살았다. 야만의 직접적 피해자도 됐지만, 전체적으로 거침이 없어 보이는 삶이다. 그 거침없음은 자기 확신의 표현 아니었을까. 유치한 자기 확신이 아니라 삶의 목표로서 자기확신! 사람은 자기확신을 성취한 연후에야 고독으로 스스로 들어갈 수 있고, 거침이 없어지고, 유연해진다.

2021년 여름 나는 도구화에 분노했고, 삶의 실상을 이야기했던 사람,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운명을 거침없이 감당했던 한 사람을 생각한다. 그리고 통찰과 급소에 해당하는 그의 명문장을 생각한다. “네가 너를 알리라. 너가 네 원수라는 것을!”(‘별이 차가운 밤이면’) “이 누렇게 나락이 익어 있는 들 사이로 은빛으로 반짝이며 강이 흐르고 있었고, 멀리 갈수록 추상적인 담청색으로 되면서 산과 산은 파도를 이루고 있었다. 아아, 이 산하! 이 땅에 생을 받은 사람이면 좋거나 나쁘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모두 이 산하로 화(化)하는 것이다. 이미 이종문은 산하로 되어버렸다. 살아 있는 사람은 일단 산을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시심(詩心)관 먼 곳에 있는 이동식의 가슴에 시를 닮은 구절이 고였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산하’에서)

◇ 임규찬 대표는

▷도서출판 함향 대표 ▷칼럼니스트, 작가 ▷저서 ‘발견의 시대’ ‘환대의 도시’ 등.

※공동 기획 : 국제신문·이병주문학관·상지E&A/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그린조이

※후원 : 하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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