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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탄생 100주년 그를 회고한다 <8> 하태영 동아대 교수

법과 권력 비판하는 법정소설로 데뷔 … 시대의 증언자이자 천재 작가

  • 하태영 동아대 교수
  •  |   입력 : 2021-10-24 19:33:58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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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알렉산드리아’‘운명의 덫’
- 형사사법제도와 권력범죄 비판
- 개인의 삶 파괴 고발해온 작가

- 형사재판과정 등 자세하게 묘사
- 법학·정치·역사·철학·문화 농축
- 자신만의 법사상 용기있게 다뤄

“정도전의 새끼들이구나! 뭣 때문에 왔느냐?” “가친이 위기에 몰렸다기에….” “효자로구나.” “숱한 칼과 창, 그리고 몽둥이가 두 형제의 몸뚱이에 집중적으로 가해졌다. 그들의 사체는 비참하게 끌려 삼봉의 시체에 포개졌다.”(이병주 장편소설 ‘정도전’ 중) 개혁 공신의 멸문지화는 조선사에 심각한 그늘을 드리웠다. 오늘 정치에도 이는 반복된다. 나림 이병주는 작가생활 27년 동안 소설 88권, 수필 40권을 남겼다. “역사가는 나폴레옹을 기록하지만, 문학인은 장발장을 등장시키는 것이다.”(‘문학을 위한 변명’) 그의 작품은 태양에 바래지고 월광에 물들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터졌다. 조선에 일본과 청이 들어왔다. 백성은 나라를 잃었고, 나라는 주인을 잃었다.“나는 전봉준 선생이 가신 그날을 망국의 날로 삼겠다. 그분이 뜻을 펴지 못하고 가셨다는 그 사실이 바로 망국의 조짐이 아닌가? 우리에게 희망이 없으니까. 나 최천중은 어리석었다. 전봉준 선생이 죽은 연후에야 그 위대함을 알았다. 조선인은 인재를 기를 만한 기량(器量)이 없소이다. 자라는 나무를 꺾긴 잘해도 가꿀 줄은 모른다 이 말씀입니다.”(‘바람과 구름과 비(碑)’) 나림은 패배한 인물들에 대한 깊은 통한을 곳곳에 담았다. ‘허균’ ‘포은 정몽주’로 이어진다.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에선 이름도 남기지 못한 낭만적 혁명가의 노년을 그렸다. 지금의 인물 중엔 누굴 택할까.

■ 역사의 교훈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명골길에 자리 잡은 이병주문학관에 서 있는 펜 조형물. 작가 이병주의 매운 붓끝, 깊은 사상, 열정 높은 집필을 상징한다. 전민철 기자 jmc@kookje.co.kr
‘관부연락선’은 나림의 대표작이다. 조선인 학생 4385명이 용병으로 징집됐다. 젊은 지식인의 비극적인 삶을 그렸다. 일본군 육군 소위 유태림은 대구에서 기차를 타고 제남을 거쳐 남경 그리고 양자강 기슭까지 갔다. 부슬비를 맞으면서 양자강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득한 옛날 프랑스 파리 어느 거리에서 만난 절름발이 거지를 생각한다. 나는 그에게 한 푼의 돈을 주고 다리를 어디서 다쳤느냐고 물었다. 그는 외인부대에 갔었다고 했다. 외인부대엔 뭣 때문에 갔느냐고 되물었더니 그는 품위와 위엄을 갖추고 답했다. ‘운명’이라고. 운명… 그 이름 아래서만이 사람은 죽을 수 있을 것이다. 1943년 11월 柳泰林 E에게”(관부연락선)

나림은 ‘백장미와 2월 22일’ 수필에서 용병 시절을 참회한다. “자기주장에 앞서 타협을 배워버린 스스로의 비굴함을 일제의 그 가혹한 체제를 감안하더라도 나는 아직껏 용서할 수 없다.” 역사의 고비마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민족은 다시 분열됐다.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좌익 세력은 퇴조해가는데 그 대신 학원에 우익 세력의 횡포가 시작되었다. 인민군이 후퇴할 때 그를 죽였다.”(‘여사록’) “한말(韓末)의 민족 분열이 전 민족을 노예의 처지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을 지도자들이 광복의 행운을 맞이하자마자 그 이상의 분열로써 혼란에 빠지고 통일의 의사를 작동시키지 못했다는 사실로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생각하기에 역사가 슬픈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의 자세가 슬프다.”(‘역사를 위한 변명’)

■ 나림의 법사상

   
문학관 내 이병주 작가 작업실을 재현한 방에서 찍은 그의 작품.
나림은 ‘소설·알렉산드리아’ ‘운명의 덫’ ‘그해 5월’ 등 여러 작품에서 법학·정치·역사·철학·문화 사상이 농축된 자신만의 법사상을 펼쳐 보인다. 범죄론과 형벌론에서 놀라운 논거를 제시한다. “수백수천의 알을 낳았다고 하자. 결국은 모두가 번데기가 될 운명에 있는 것이 아닌가? 번데기가 되어도 나비까지 될 수 있으면 좋지만, 간악한 인간들은 고치의 벽을 뚫기 전에 고치와 더불어 뜨거운 물속에. 집어넣어 삶아버리는 것이다.”(‘소설·알렉산드리아’)

천재 작가의 법정소설이다. 제목에 ‘소설’과 온점(·)을 썼다. 복수·분노·자유의 의미가 담겨있다. 잘못된 형사사법제도와 권력 범죄로 개인의 삶이 번데기처럼 파괴될 수 있음을 고발한다. 소급입법·긴급체포, 한국 법정과 알렉산드리아 법정을 대비해 형사재판을 자세히 묘사한다. 독재 법정과 자유 법정이다. 소설에서 한스의 살인행위를 위법성조각사유의 전제 사실(정당방위 상황)에 대한 착오로 보아 무죄를 주장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시 형법학계도 놀랐을 것이다. 정확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나림의 법사상과 온점(·)의 미학에 매료됐다.

“내가 고문을 받은 취조실은? 피투성이의 광경. 다리뼈가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과 영혼이 분쇄되는 절망이 엄습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고문이란 어떤 단계를 넘어 쓰면 일종의 관성이 붙는가 보았다. 아아, 저것이 내 발톱 밑으로 들어갈 대바늘이로구나. 나는 죽기로 결심하고 굴복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운명의 덫’)

‘소설·알렉산드리아’와 ‘운명의 덫’에서 “저는 앞으로 사형폐지운동을 벌일 작정입니다”라고 선언한다. “만일 1·2심 판결대로 사형당했다면 오늘처럼 여기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 아닙니까? ” ‘칸나·X·타나토스’에서 조봉암 사형집행을 다룬다. “1959년 7월 31일의 기록만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로써 새겨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1961년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에게 사형이 집행됐다(2008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 1979년에는 대구 영남일보에 ‘별과 꽃들의 향연’을 연재했다. 20년 수감 후 진범을 찾는 치열한 과정을 그렸다. 그해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총성이 울렸다. 민주주의를 살해한 진범은 ‘운명의 덫’처럼 역사의 힘으로 사형된 것이다.

나림은 그를 용서한다. “10월의 밤은 깊어만 간다.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자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주에의 인식이 허무의 바람 속에 등화와 같은데 머핼리아 잭슨의 신성을 닮은 음성에 나는 신의 존재를 알았다.”(‘긴 밤을 어떻게 새울까’) 쉽게 타협을 배워버린 비굴했던 자신의 죄는 용서할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 죄지은 자는 용서했다.

■ 문학과 저널리즘

“나는 우리나라에서 문학이 가능하려면 역사의 그물로 파악하지 못한 민족의 슬픔을 모색하며 슬퍼해 보는 데 있다고 믿는다. 나는 최선을 다해 나의 문학에 대한 신념을 지리산에 순교할 각오다.”(지리산) 나림은 식민지 청년, 일본 유학, 근대화 견학, 학병 참전, 교수, 이념 대립, 신문사 편집국장, 3·15 부정선거,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투옥, 재판, 수감생활까지 한 인간으로서 체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걸 경험한 사람이다. 국제신문(당시 국제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 시절(1959-1961) ‘도청도설(道聽塗說)’을 신설하고, 매일 명칼럼을 썼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갈 때 생각한다. 사르트르를 만나 봐야겠다. 카뮈와의 논쟁을 한 번 더 읽어보고 심판을 내려야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가운데 나폴레옹이 목욕하는 장면을 챙겨 봐야겠다. 서재에 들어서면 전등이란 전등을 죄다 켜 놓고 장군이 열병(閱兵)하듯 서가를 둘러본다. 사마천, 헤로도토스, 마키아벨리, 마르크스, 제퍼슨, 링컨 등을 한꺼번에 꺼내 놓고 토론을 시킨다.”(‘지적 생활의 즐거움’) “문학인의 불행은 정치인의 행복보다 낫다. 나는 문학인으로서의 불행을 정치인의 행복과 바꾸지 않겠다.”(‘긴 밤을 어떻게 새울까’)

나림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넘어 인간해방을 꿈꾸었다. 그가 남겨둔 통일문학이다. “저 지리산의 숭엄한 모습을 어느 해 어느 때 나와 함께 눈여겨보았다는 기억을 너희들이 길이 간직해 주었으면, 고맙겠다. 어떤 주의(主義)를 가지는 것도 좋고, 어떤 사상을 가지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주의(主義) 그 사상이 남을 강요하고 남의 행복을 짓밟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을 보다 인간답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라야 한다.”(‘지리산’)

■ 부산과 어머니

“나는 이 항구도시를 한없이 사랑한다. 파도소리는 지구의 맥박이 뛰는 소리다. 이백만 가운데는 열다섯 관의 육체를 팔아 한 근의 쇠고기를 사 먹는 여성들도 있고 자기의 인격을 팔아선 스스로의 돼지를 살찌우는 남성들도 있다. 부귀의 추잡도 있고 화려한 가난도 있다. 이 지상에 생을 지탱하기 위하여 인간의 악착함이 엮어 놓은 경관. 그 밑에 헤아릴 수 없는 비극, 헤아릴 수 없는 희극이 시간처럼 무늬를 새기고 시간과 더불어 흐른다.”(‘예낭풍물지’) 예낭은 부산이다. 그러나 부산은 이 위대한 작가를 위해 그 어떤 기념물도 남겨 놓은 것이 없다.

가을이 가기 전에 중앙동 중부경찰서(근대 고문 박물관), 영주동 남부민동 감천 마을 자갈치 영도다리(예낭 어머니 동상),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관부연락선 유태림 문장), 부산역(5·16 혁명재판소 압송 출발지·나림 만년필 동상), 남포동(부베의 연인 명국희 동상)을 돌아보아야겠다. 보고 싶은 박물관과 동상은 거기 없을 것이다. 프랑크푸르트는 괴테,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와 함께 오늘도 숨을 쉰다. 나림 작품들은 부산 문화의 교재가 될 수 있다.


   
◇ 하태영 교수는

▷동아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국회 제10기 입법지원단 위원 ▷한국비교형사법학회 회장 역임 ▷저서 ‘형사철학과 형사정책’ ‘형법조문강화’ ‘의료법’ 등.


※공동 기획 : 국제신문·이병주문학관·상지E&A/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그린조이

※후원 : 하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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