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구 초장동 출신 토박이 문화인
- 평생토록 부산에서만 창작활동
- ‘한 많은 천마산’으로 가요계 데뷔
- 1945년 경찰 시험 합격했지만
- 영남극장 사업부장으로 스카웃
- 작곡가 한복만과 수많은 곡 작업
- ‘앵두나무 처녀’ ‘엽전 열 닷냥’ 등
- 부산의 정서 잘 담아내 큰 인기
오늘은 필명이 ‘천봉’인 작사가 천상률(千相律, 1923~1989) 선생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한다.
 |
| 미도파 레코드사 시절의 가수 정향(왼쪽부터), 작사가 천봉, 가수 방운아. |
모든 노래가 그렇겠지만 작사가는 작곡가를 잘 만나야 하고, 작곡가는 작사가를 잘 만나야 한다. 두 영역의 절묘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하모니가 위력을 발휘하려면 그 악보를 최고로 소화시켜낼 수 있는 가수를 잘 만나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작사 작곡 가창, 이 세 요소는 세 발로 서 있는 솥(鼎)과도 같아서 어느 하나만 결함이 있어도 그 솥은 바르게 설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작사가로 두고 말하자면 조명암 김능인 왕평 유도순 박영호 고려성 강사랑 등의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이들과 보조를 맞추는 유명작곡가로는 박시춘 손목인 문호월 전수린 김교성 김해송 전기현 이용준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각 레코드사에서는 이들 작사가와 작곡가를 서로 엇바꿔가며 콤비를 형성하게 해서 히트곡을 생산해내도록 유도했다. 해방 후 작사가로는 반야월 손로원 유호 김문응 한산도 최치수 월견초 정두수 조운파 등이 있고, 작곡가로는 한복남 손석우 김부해 박춘석 백영호 송운선 이봉조 길옥윤 김학송 배상태 고봉산 남국인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작사가 ‘천봉’ 천상률은 부산 출생으로 일생토록 고향을 떠나지 않고 오로지 부산에서 창작 활동을 하며 히트곡을 양산했던 특별한 사례라 하겠다.
 |
| 천봉이 작사한 청춘등대 앨범 사진. |
천봉은 부산 서구 초장동에서 태어난 토박이 대중문화인이다. 부모는 자갈치어시장 제빙공장에서 매일 얼음을 떼어다 판매하는 소매상이었다. 천봉은 소년시절부터 부모의 일을 도우며 일했는데 틈틈이 책을 읽으며 열심히 독학을 했다. 시험을 쳐서 직장을 얻었지만, 부산을 다녀가는 악극단 공연에 심취해서 거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름난 공연 무대를 보러 다녔다. 평소 시집과 소설책을 늘 끼고 다니며 읽었는데 이 과정에서 시인이 되고 싶은 충동을 갖고 시를 꾸준히 썼다. 하지만 일반 자유시보다는 율격이 규칙적으로 정돈된 정형시, 그중에서도 대중가요가사에 더욱 매력을 느끼며 노랫말 습작에 빠져들었다.
1945년 8·15광복 이후 미 군정 체제가 펼쳐졌을 때 천상률은 군정청 경찰채용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1948년 그는 드디어 ‘한 많은 천마산’이란 가사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프로 자격을 갖춘 그는 6·25전쟁 시절 부산으로 피란 내려온 서울 대중음악인들과 자주 교류하며 어울리는 계기를 갖는다.
1952년 천상률의 재능을 눈여겨 본 부산 영남극장 사장에게 스카웃돼 영화와 악극단 공연 등을 섭외하는 사업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경찰직을 그만둔 것은 물론이다. 이후 천상률은 작곡가로 도미도레코드를 운영하던 한복남과 친밀한 관계가 되어 다수의 가사작품을 한복남에게 주어 본격적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 천봉이란 필명을 쓰게 되었다.
첫 히트곡은 ‘피란길 고향길’(한복남 작곡, 원방현 노래)이다. 이어 히트곡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는데 그 곡목은 모두 한국대중음악사에서 걸출한 한 자리를 차지하는 비중 높은 작품들이다. 이를테면 ‘앵두나무 처녀’(김정애 노래) ‘엽전 열 닷 냥’(한복남 작곡, 노래) ‘부산행진곡’(한복남 작곡, 방운아 노래) ‘전화통신’(한복남 작곡, 심연옥 남백송 노래) ‘온천의 하룻밤’(백영호 작곡, 신해성 노래) ‘부산 마도로스’(한복남 작곡, 김용만 노래) ‘짝사랑’(한복남 작곡, 손인호 노래) ‘동백꽃 일기’(한복남 작곡, 손인호 노래) ‘방랑일기’(한복남 작곡, 정향 노래) ‘청춘등대’(한복남 작곡, 손인호 노래) ‘울지 마라 철진아’(박현 작곡, 고봉산 노래) ‘이별 슬픈 플랫홈’(백영호 작곡, 남인수 노래) ‘저이가 누구시더라’(백영호 작곡, 이미자 노래) 등이다. 이 모든 노래가 천봉의 작사 솜씨로 이루어진 작품들이다.
곡목만 살펴보더라도 가요팬의 크나큰 사랑을 받은 빅히트곡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천봉의 노래가사 특징은 역사성 사회성 전통성 현실성을 두루 담보하는 품격 높은 노랫말을 써내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다 서민의 구체적 삶과 정서, 친화력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따뜻한 시인적 감성에 바탕을 두고 창작에 임하는 작가정신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천봉의 작품성이 형성된 바탕에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항도 부산 고유 정서와 지역성이 큰 힘으로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작품에서도 부산적 정서, 부산적 고유성이 담겨있지 않은 가사가 드물 정도라 하겠다. 천봉이야말로 자신을 낳고 키워준 고향 부산을 지극히 사랑했던 대중예술가였다.
남인수의 노래 ‘이별 슬픈 플랫홈’ 가사는 3년 동안의 부산 피란 생활을 정리하고 떠나는 모습과 부산역 주변의 처연한 이별 풍경과 그 현장감을 절절히 담아내고 있다. 가수 남인수의 절규에 가까운 창법이 백영호의 작곡솜씨와 배합되어 최대 효과를 증폭시켜낸다.
그 사람 잊어야지 그 이름도 잊어야지/ 행복을 빌어주고 떠나야 하는/ 정거장 대합실에 내 청춘이 외로워/ 타향 길 밤 열차야 손을 잡고 작별인사/ 아, 주고받을 사람도 없네
고향도 님도 잃고 마음 둘 곳 어드메뇨/ 천리 길 차표 한 장 무거운 발길/ 바람찬 플랫트홈 트렁크를 들고서/ 서러운 운명이라 기적소리 슬피 울 때/ 아, 마후라에 눈물이 젖네
나 혼자 떠나간다 밤 열차에 몸을 싣고/ 미련이 남은 사랑 한이 되어도/ 세월이 흘러가면 잊을 날이 있으리/ 담뱃불 연기 따라 그림자는 사라지고/ 아, 유리창에 밤비가 오네 -‘이별 슬픈 플랫홈’ 전문
천봉의 딸로 태어난 천 데보라는 어려서 어머니와 작별하고 불우한 소녀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타고난 예인적 끼의 발산으로 대학시절부터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일본의 미키프로덕션에 스카웃돼 일본 가요계에서 다년간 가수로 활동하며 독집앨범을 발표했다. 현재는 가요계를 떠나 선교사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시인·가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