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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인간극장] <4> 궁중채화 - 황수로 채화장

수백 겹의 비단과 수천 번의 손길 … 궁중에 꽃 피워내다

  • 김민주 기자 min87@kookje.co.kr, 이우정 PD
  •  |   입력 : 2022-02-15 19:40:19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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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실 궁중연회 속 꽃장식
- 생화 아닌 장인이 만든 조화
- 일제가 불 태운 탓 명맥 끊겨

- 꽃꽂이 자기네 문화라 우긴 日
- 황씨 인정할 수 없어 채화 연구
- 유물 뜯어가며 제작방법 익혀

- 2013년 중요무형문화재 반열
- 양산 전수관 지어 제자 양성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시대 서화 ‘정해년의 궁중잔치’. 고종 24년(1887년)인 정해년에 신정왕후 조대비의 팔순을 기념하기 위해 경복궁 만경전에서 열린 궁중연회 모습을 10폭 병풍에 담은 작품이다. 잔치는 하루 두 번씩 사흘간 계속됐다.
비단과 밀랍, 인두를 이용해 홍도화를 만들고 있는 황수로 궁중채화장. 이우정 PD
꽃은 연회의 흥을 살렸다. 음식상에 오른 상화와 화준(꽃이 담긴 항아리)은 물론 무희와 궁인들의 머리마다 한 송이씩 꽃(잠화)이 꽂혔다. 연회가 열린 시기는 음력 1월. 궁중잔치라고는 하나 삭풍이 이는 한겨울에 그 많은 꽃은 어디서 구했을까.

조선왕실의궤에는 채화(綵華匠) 또는 화장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채화는 ‘비단꽃’이라는 뜻. 화장은 비단 삼베 종이를 이용해 꽃을 만드는 궁궐 장인이다. 일본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왕조 문화를 말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화장들이 끌려갔다. 그렇잖아도 얼마 남지 않은 꽃장식이 불에 타 없어지면서 조선 궁중채화의 명맥마저 끊긴다. 화장이라는 소수 궁인들의 전승이 소실되면서 역사적 기록에 등장하는 꽃장식의 상당수가 생화가 아닌 조화라는 사실 또한 잊혀지고 만다.

궁중채화를 국가중요무형문화재 반열에 올린 이가 황수로(88)궁중채화장이다. 동아대 대학원에서 늦깎이 석·박사 학위를 받은 황 궁중채화장은 본래 이화여대에서 가정학 분야를 전공했다. 그런데 일본 유학길에서 그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을 들었다. “일본 사람들은 어떤 자리에서건 기회만 생기면 ‘꽃꽂이는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일본의 전통 문화’라고 홍보했어요. 문화·교양 수업에서도 꽃꽂이를 유일무이한 자기네 전통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황 궁중채화장의 이런 ‘거부 반응’은 단순히 반일감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그의 외조부는 고종 황제 때 궁내부 주사의 관직을 지낸 인물. 간혹 황제가 하사한 잠화를 집으로 가져오곤 했다. 황 궁중채화장은 어린 시절 상당 기간 외가에 머물면서 할아버지가 가져온 잠화의 실물을 접했다. 집안 어르신들이 직접 꽃장식을 하는 모습도 자주 봤다. 어린 시절 기억을 토대로 “우리나라에도 꽃장식 전통이 있다 ”고 강변하는 한국 유학생에게 돌아온 것은 멸시에 가까운 냉소였다. “일본인들은 증명을 요구했어요. 역사적 기록이나 실제 전해 내려오는 작품을 보여달라고. 그때는 증거가 없었습니다.”
한국궁중꽃박물관에 전시된 홍도화.
황 궁중채화장은 귀국하자마자 동아대 사학과 대학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꽃 전통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를 지도한 건 학계의 거두로 손꼽히던 정중환 교수였다. “기어이 전통 꽃문화를 찾겠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마음 먹고 사료를 뒤지니 의궤 서화는 물론 문헌에 남은 화장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종래엔 지도교수님도 ‘이건 놀랍도록 새로운 분야다. 반드시 연구를 다듬어 논문으로 내 알려야 한다’고 용기를 주셨어요.” 결국 황 궁중채화장은 1990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처럼, 황 궁중채화장이 명맥이 끊긴 전통 꽃장식의 이름을 불러내자, 역사 속에서 잊혔던 비단꽃들이 ‘궁중채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피어난 것이다. 궁중채화는 2005년 부산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지도회의),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방한 등 행사장의 국빈만찬장을 장식했다.

궁중채화는 비단 이외에도 종이 모시 삼베 가죽 같은 소재로 만들어진다. 황 궁중채화장이 가장 공 들이는 과정이 바로 소재를 자연 염색하는 것이다. 채화를 물들이는 데 사용되는 재료는 생화에서 뽑아낸 염료다. 홍화와 쑥 쪽 치자 등 잎을 따 일정 기간 보관한 뒤 물에 담그고 발로 밟는 과정을 2, 3개월 반복해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색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뽑아낸 염료를 비단 등에 풀을 먹인 뒤 다듬이질한다. 황 궁중채화장은 “다듬이질을 해야 비로소 색이 제대로 영글고 광채가 난다. 그저 풀을 먹여둔 것과는 빛깔이 전혀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채화는 계절에 맞춰 피어난 생화를 곁에 두고 그 모양을 섬세하게 본따 만든다. 꽃잎 모양에 맞춰 재단한 비단에 달군 인두를 이용해 밀랍을 붙여 모양을 잡는다. 한 송이를 피워내려면 많으면 수백 겹의 비단, 모시가닥과 수천 번의 손길이 뒤따른다. 꽃술은 실제 꽃가루를 꿀에 개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탄생한 채화엔 실제로 벌과 나비가 몰려든다.

고종전해진찬의궤 속 묘사를 근거로 재현한 홍도화 화준과 백도화 화준. 이우정 PD
궁중채화는 장식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임금이 있는 곳 좌우로는 언제나 홍도화와 백도화 화준이 놓였다. 황 궁중채화장은 “홍도·백도화 화준은 국가를 상징한다. 화준이 곧 조선왕조의 국기로 사용된 셈”이라고 말했다. 생화가 아닌 채화가 궁중에서 사용된 데 대해선 “계절적인 요인도 있었겠지만, 유교를 숭상한 조선왕실에서 꽃을 꺾기보다는 그와 같은 모양의 채화를 만드는 방식을 선호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실전됐던 궁중채화 제작 과정을 복원하는 과정은 어둠 속을 더듬어 길을 찾는 것 같은 인내가 필요했다. “저는 기법을 직접 화장들에게서 전수받지 못했습니다.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채화 유물, 그리고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된 어사화를 연구했습니다. 수소문한 학예사들을 찾아가 부탁해 봐도 마땅히 제작법을 알아내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결국 이 채화들을 하나하나 조심히 뜯어보면서 비단에 배접을 해 꽃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의궤 이외에도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인 이덕무의 ‘윤회매십전’에 나타난 기법도 참조했다. 윤회매는 종이와 노루털, 밀랍 등을 이용해 만든 인조 매화다. 매화가 피지 않는 계절에도 이를 감상하기 위해 이덕무가 제작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라고 한다.

황 궁중채화장은 저서 집필 등 궁중채화 중요문화재 지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덕수궁 궁중채화 전시 때 유홍준 문화재청장으로부터 ‘문화재 지정을 신청하라’는 요청을 받은 게 큰 계기가 돼 2013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반열에 오른다. 10년 세월이 걸렸다. 황 궁중채화장은 후학 양성을 위해 200억 원 가까운 사재를 털어 경남 양산 매곡동에 한국궁중꽃박물관도 지었다. 전통기예 전수관이자 궁중채화 1호 보유자로서 그동안 만든 채화를 보존하기 위함이다. 현재 6명의 제자를 뒀다.

채화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받은 실학자 이덕무의 영향일까. 황 궁중채화장은 전통기법만 고수하는 대신 궁중채화의 맥을 잇기 위해 실용적인 대안 찾기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채화장’의 명칭을 ‘화장’으로 바꿔달라고 문화재청에 건의한 것도 이런 생각에서다. “만들어진 꽃이 일상생활에서 쓰임새를 띠게 할 방법을 늘 고민합니다. 실제 비단뿐만 아니라 여러 소재로 꽃을 만드는데 ‘채화장’은 보유자의 기능을 비단꽃에만 묶어두는 것 같아요. 채화장이 화장으로 바뀌면 종이·비단꽃은 물론 생화도 소재로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궁중채화의 전통 잇기에 관심을 두는 계승자들의 여건도 훨씬 나아지지 않을까요?”

※ 제작지원 B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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