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 기간 전해내려온 민가 음악
- 2014년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 6·25 계기 전국농악 부산서 융합
- 악귀 쫓고 안녕 비는 ‘걸립’ 형식
- 명맥 잘 지켜와 다른 지역과 대비
- 북 발달하고 춤사위 삽입 특징도
- 中 자국문화처럼 소개 논란 놓고
- “조선족, 해학·항거의 성격 없어”
농악(農樂)이라는 이름엔 아픈 역사가 깃들었다. 농악은 오랜 세월 민가에서 전해 내려온 전통음악. 모내기나 추수가 한창인 들판이나 잔치·연회는 물론 군사훈련이나 초상집까지 연희된 대중음악이었다. ‘조선판 버스킹’인 셈. 노동연희의 의미가 강조된 ‘농악’이라는 표현 외에도 민중이 즐긴다는 의미에서 ‘민악’으로도 불렸다. 그저 ‘악을 친다’고만 해도 사물(꽹과리 징 장구 북)을 둘러멘 놀이패가 선드러지게 한판 놀아내는 우리 민속 음악을 뜻하는 말로 통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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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15일 국립부산국악원에서 열린 부산농악 공연 모습. 이우정 PD |
여러 용어 가운데 ‘농악’이 굳어진 것은 일제에 의해서다. 민중의 기상을 고무·선동할 수 있는 민악이나 군사훈련 음악이라는 의미는 거세해버리고 노동의 성격만 강조한 ‘농악’을 대표 용어로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우리 정부가 전통의 유지·보존을 위해 무형문화재 제도를 도입할 때도 ‘검증’ 없이 그대로 차용하면서 농악이라는 이름이 보편화된다. 1970년대 들어 대학가에선 농악 대신 ‘풍물’이라 부르는 풍조도 생겨났다. 전통음악 분야의 록스타로 손꼽히는 김덕수가 놀이패 이름을 ‘사물놀이패’로 지으면서 사물놀이라는 지칭도 대중적으로 사용됐다. 오늘날까지 농악 풍물 사물놀이 등 용어가 혼용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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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농악 공연에 나선 박종환 장구 보유자. 이우정 PD |
유네스코가 2014년 11월 농악을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한 이유는 농악이 지닌 창의성·활력과 공동체성 부여 역할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부산농악은 전문적인 걸립(乞粒·지신밟기 등을 통해 곡식 돈 생필품을 받는 것)의 성격과 기능을 지킨 사례로 전국에서 손꼽힌다.
6·25전쟁 당시 피란수도 부산엔 전쟁의 화마를 피해 전국의 민초가 몰렸다. 팔도의 농악도 융합됐다. 전후 대부분 지역에서 걸립농악의 명맥이 끊겼지만, 근대 한국의 경제를 잉태한 부산에서 걸립농악은 오히려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걸립에 나선 농악패가 지신을 밟아 악귀를 몰아내고 안녕을 기원하면 낟알(粒)을 추렴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게 걸립농악의 기본적 형태다.
성주·장독·변소풀이 등 전통적인 지신밟기 이외에도 ‘점포풀이’ ‘공장풀이’ 등 현대적 성격이 가미된 지신밟기는 부산에서 생겨났다. ‘물편을 간다’는 말 또한 부산농악에서 사용되는 특징적 표현이다. 물편이란 ‘물가’를 의미한다. 농악패가 동해안을 따라 바닷가 마을에 들러 걸립에 나선다는 의미다. 부산에선 국제시장 상인들이 부산농악패와 관계를 오래 유지했다. 정월 대보름이면 이들을 불러들여 놀이판을 벌였다. 부산농악 장구 예능 보유자인 박종환(56) 풍류전통예술원 대표를 구덕민속예술관(부산농악 전수관)에서 만나 부산농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부산농악의 전신은 아미농악이다. 고분도리(서구 서대신동의 옛 명칭) 걸립농악단을 이끌던 유삼룡 선생과 황해도에서 부산으로 피란 온 이명철 선생이 아미농악단을 결성했다. 이명철 선생이 상쇠(농악단의 우두머리 꽹과리)를 맡았는데 아미동과 감천·토성동 일대 피란민이 농악단의 주축을 이뤘다.
전문 걸립농악단으로서 아미농악단은 경남까지 활동 반경을 넓혔다. 이 과정에서 진주 솟대쟁이패 ‘수벅구’였던 조판조(본명 조성현) 선생이 아미농악단에 합류한다. 수벅구란 농악단 맨 앞에 서는 장구 연주자를 가리킨다. 박 대표는 “조 선생님은 연주 뿐만 아니라 상모를 돌리는 기능이 특출났다. 훗날 부산농악의 장구 예능 1호 보유자”라며 “조 선생님이 전수한 가락을 지금도 부산농악단이 연주하고 있다”고 했다.
농사 짓는 모습을 흉내내는 농경모작과 군사들의 훈련·승전연을 모두 지녔다는 점에서도 부산농악의 융합적인 특성이 잘 드러난다. 먼저 당산에 인사를 올리는 당산굿을 마친 뒤 길을 가며 음악을 연주하는 길굿을 연행하고 본격적인 판굿에 들어간다. 훈련 받는 군사들이 대오를 맞추는 맞춤굿에서 마당굿·승전굿 순서로 진행된다. 마지막에는 상모를 쓴 채 논을 가는 농부의 행동거지를 따라하는 농사풀이가 연희된다. 박 대표는 “농악에서 ‘굿’이란 ‘시끌벅적한 놀이판’을 의미해 무속적인 의미에서의 굿과는 구분된다”고 설명했다.
북이 발달돼 남성적인 특성이 강조된다는 점 또한 부산농악의 특징이다. 박 대표는 “부산은 예로부터 춤의 고장으로 손꼽힌 만큼 부산농악에도 춤사위가 많이 삽입된다. 상모놀이 또한 다른 지역과 달리 하체를 쓰는 연희 동작이 많아 춤을 통한 여흥은 물론 춤의 완결성을 함께 추구한다”고 말했다.
농악이라고 하면 신명나는 가락 외에도 소품이 눈에 띈다. 백색 상모의 벙거지나 검은 바탕의 겉옷 위에 얽어맨 삼색띠가 대표적이다. 검은 더거리는 군사들이 훈련 때 입던 옷이다. TV 사극에서 포졸이나 군졸이 걸치는 검은 겉옷이다. 삼색띠는 색마다 의미를 띤다. 박 대표는 “부산농악에서 빨강은 태양, 노랑은 땅을 상징한다. 파랑·초록색은 태양과 땅으로부터 소생하는 천지만물이다. 농악패가 삼색띠를 메면 일상에서 벗어나 신의 권능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잡귀를 쫓고 풍요와 안녕을 기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대표가 부산농악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건 부산대 건축학과에 진학한 뒤 풍물 동아리에 가입하면서였다. 소년 시절에도 그는 농악을 동경했다고 한다. “제 고향은 경남 창원 마금산 온천 마을입니다. 그땐 동네에서 농악판이 벌어지는 걸 흔히 볼 수 있었죠. 온천에 오는 관광버스마다 노래방 시설 대신 북 장구 등 사물이 당연하다는 듯 구비됐죠. 온천욕하러 온 어른들이 사물을 꺼내 판을 벌이면 그 자체로 농악놀음이었습니다. 멀리서 사물이 울리는 소리를 들을 때면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뜀박질 쳤습니다.”
대학 시절 부산농악 공연을 접한 그는 당시 부산 서구의 한 목욕탕 지하 연습실로 김한순 상쇠를 찾아가 무작정 배움을 청했다. “타악이라는 게 얼핏 쉬워 보여도, 정진할수록 깊이의 끝을 알 수 없어요. 연습을 거듭해 실력이 늘었다는 걸 느낄 때마다, 다른 사물과 소리를 맞춰가며 신명에 오를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낍니다.”
전승자는 많을까. 박 대표는 “안타깝게도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부산농악을 아끼는 제자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며 “나 자신을 더 갈고 닦아 부산농악이 많은 사람에게 감흥을 줄 수 있는 전통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영산대 김태희(문화콘텐츠학부) 교수의 ‘AI(인공지능) 농악 프로젝트’에 자문 역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농악이 중국의 전통문화인 것마냥 소개된 데 대해 그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농악은 이미 유네스코가 공인한 우리 문화입니다. 중국 내 조선족도 농악 문화를 가졌겠지만, 이는 해학·항거 등 농악 본연의 성격이 거세된 일종의 마스게임입니다. 제게 이 논란은 오히려 반갑기도 합니다. 2014년 농악이 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됐을 때 국민적 관심이 이는 듯했지만 곧장 식더군요. 올림픽에서 농악이 주목받은 김에, 이것이 그저 분노로 소비되는 대신 농악과 우리 전통에 대한 건강한 관심으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 제작지원 B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