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단이나 종이에 그리는 불화
- 사찰 법당에 걸때 점안식 거행
- 예부터 성물이자 경배의 대상
- 권 씨 3대 이어 전통 탱화 조성
- 부산시 무형문화재 15호 지정
- 범어사 등 50여 곳에 작품 봉안
- 경건히 무릎 꿇고 인내의 붓질
- 한 작품 완성 몇 년씩 걸리기도
- “탱화 제작 장인 문화재 지정은
- 깃든 정신 유산으로 인정 의미”
불교 용어 법륜(法輪)의 ‘륜’은 동그라미다.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설법이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항해 퍼져나간다는 의미가 담겼다. 불교에서 동그라미는 곳곳에 있다. 원만구족(圓滿具足)은 부족함 없는 불교적 깨달음의 경지를 뜻한다. 대한불교 조계종단의 문장인 삼보륜(三寶輪)은 하나의 커다란 동그라미가 작은 동그라미 3개를 품어 화합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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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불교미술원에서 탱화에 채색하고 있는 권영관 불화장. 이우정 PD |
■부처가 된 그림, 탱화
교리뿐 만이 아니다. 부처님을 모신 그림인 탱화(불화)에도 동그라미가 있다. 탱화에서도 가장 오래도록 보존되는 채색은 붉은색이다. 현미경을 통해 탱화의 붉은 채색을 들여다보면 아주 작은 알갱이가 보인다. 그 알갱이의 모양은 동그라미.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촘촘하게 맞붙은 둥근 알갱이는 수백 년의 역사를 머금고도 비단배접 위에 모셔진 부처의 색과 형태를 오롯하게 지켜낸다. 반면 녹색을 확대해보면 그 입자는 뾰족하고 거칠다. 쉽게 떨어져 나간다. 오래 묵은 탱화일수록 녹색으로 채색된 부분이 빛바랜 것을 쉽게 볼 수 있는 이유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 시기 탱화는 왕실 또는 권문세족의 의뢰를 받아 제작됐다. 탱화의 크기나 양식에 따라 8~25겹까지 귀한 한지를 덧댄다(배접). 마지막엔 생노방주(누에의 명주실)를 입혀 비단 위에 그림을 그렸다. 금(金)을 갈아 낸 금분을 붓에 묻혀 칠하는 채색법도 있었을 만큼 화려함의 정점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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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면 사십이수 천수천안 관자재보살탱. (사)부산시무형문화재연합회 제공 |
숭유억불의 조선조에도 궁중의 왕비나 궁녀들은 사찰 건립 등 불사(佛事)를 일으킬 때면 시주를 통해 탱화를 조성하고 기도했다. 다만 불교가 귀족에서 대중으로 확산하면서 탱화에도 변화가 인다. 고려 시기 탱화가 주존(主尊)을 돋보이게 하는 구도를 띠는 데 비해 조선 탱화는 보살이나 부처의 제자들이 주존을 둘러싼 모습이 관찰된다. 조선 중기 이후로는 비단 대신 삼베 배접이 사용된 것도 변화 가운데 하나다.
탱화를 제작할 때는 ‘그린다’는 표현 대신 ‘조성한다’고 쓴다. 탱화를 조성하는 사람은 불모(佛母)라고 부른다. 금어(金魚)라는 지칭도 있다. 불모 중엔 스님이 많았다. 탱화가 법당에 모셔지면 명망 높은 스님이 증명법사(불교 의식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승려)로 나서 점안식을 거행한다. 이때부터 탱화는 성물이자 경배의 대상이 된다.
탱화는 조성을 마치기 전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조성하는 중엔 스님들이 불모의 곁을 지켜 목탁을 두드리며 기도를 올렸다. 조선 3대 불모 가운데 하나인 유성선사 화맥의 말예이자 3대를 이어 전통 탱화를 조성하고 있는 부산시 무형문화재 15호 권영관(70) 불화장 또한 자신의 작업실을 내보이기까지 숙고를 거듭했다. 그의 가계는 조선 중기 대불모 유성선사의 화맥에 닿아 있다. 유성선사에서 주룡화상·완호스님을 거쳐 권 불화장의 조부인 용성스님과 부친 권정두 불모로 이어졌다.
부산 수월선원 삼신후불탱화를 비롯해 범어사·삼광사 등 50여 곳에 권 불화장의 탱화가 봉안돼 있다. 부산 북구 경암불교미술원에서 그를 만나 탱화 조성의 속살을 들여다봤다.
■눈동자를 찍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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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무형문화재 15호 권영관 불화장 |
“참선좌구(법당에 놓이는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탱화를 조성합니다. 조성에 드는 기간은 탱화에 따라 다르지만 짧아도 6개월에서 길면 5, 6년입니다. 그냥 그림이라고 여기면 도저히 긴 작업을 할 수 없겠죠. 탱화를 조성할 때마다 부처님을 모신다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탱화를 조성하는 일은 하나의 구도입니다.” 어렵사리 작업실을 공개한 권 불화장은 탱화를 조성하는 불모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을 보완해 작업을 이어가기 위해 운동에도 힘쓴다고 한다. 그의 어깨와 팔뚝은 연배가 무색하게 실팍했다.
누가 탱화 조성을 의뢰할까. 권 불화장은 “이제 일반 수요는 없다. 사찰에서 법당 건립 등 불사 때 탱화를 부탁한다”고 했다. 조성하고 있는 탱화도 범어사로부터 요청받은 것이다. 권 불화장은 “과거엔 스님이 찾아와 건립되는 법당의 성격과 위치를 근거로 어떤 경전을 참조해 탱화를 어떻게 조성할지 논의했다. 요즈음 들어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전문가인 불모께서 알아서 잘 조성해달라’는 경우가 많다”며 “본래 초(탱화의 밑그림)는 3장을 떠 불모가 한 장, 절에서 한 장을 가지고 한 장을 그림 속에 넣는데 이런 전통도 거의 사라졌다”며 아쉬워했다.
탱화도 경기를 탄다는데 양상이 예상과는 달랐다. 경기가 어려울 때 오히려 사찰에 시주가 몰려들고, 그래서 불사가 더 활발히 일어나는 게 일종의 공식처럼 반복된다는 것. IMF 때도 그랬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이 같은 공식에도 금이 갔다. “종교인이 줄어든 것일 수도 있지만, 세태가 그만큼 더 각박해진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 권 불화장의 짐작이다. 수요가 줄었다고 해서 부처님이 깃드는 탱화를 대충 조성할 수는 없는 법이다. 탱화가 오래도록 보존되려면 불모의 기예는 물론 조성에 사용되는 한지와 비단, 붓, 먹, 채색 안료 등은 최상품이어야 한다. 이들 용품을 전통기법 대로 제작하는 곳이 줄어 갈수록 구하기가 녹록잖다.
“30년 전 우연히 기회가 닿아 국내 최고 명인으로 꼽히는 장인의 한지를 수천 장 사뒀습니다. 고민 끝에 빚까지 내서 벌인 일인데 지금 와서 보면 신의 한수였습니다. 요즈음엔 그런 품질의 한지는 돈을 줘도 구하기 어렵습니다. 초를 내는 데 쓰이는 면상필은 족제비의 꼬리털을 골라 기름기를 빼고 만듭니다. 국내에선 이제 자연보호 등 문제로 만들어지기 어려워 중국에서 수입한 걸 씁니다.”
권 불화장은 석채를 다루는 불모로 유명하다. 고유의 색을 지닌 광물을 쇠절구에 빻고 고운 체에 쳐 낸 돌가루, 혹은 그 가루를 이용한 채색을 석채라 한다. 젊은 시절 한 고려탱화 전시회에서 수 백년 된 석채 탱화의 색이 선명하게 보존된 것을 일견한 그는 직접 석채에 쓰일 광물을 찾아 나섰다. “경북 감포 뇌성산에서 뇌록(녹색 돌)이 나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무작정 찾아갔어요. 지역 어른들께 물어 결국 뇌록을 찾아 캐왔습니다.”
필요한 색을 띠면서 보존력도 강한 석채를 내는 데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다고 한다. 그의 채색은 성을 쌓듯 붓으로 석채를 일고여덟 번까지 층층이 쌓아올리는 과정이다. 권 불화장은 “마음을 다해 조성하더라도 탱화의 보존력이 약하다면 오래 갈 수 없다. 비록 조성에는 오래 걸리지만 석채를 고집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전남 무위사 극락보전의 탱화 속 백의관음은 눈동자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49일간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않겠다는 약속이 깨지는 바람에, 탱화를 조성하던 파랑새가 미처 눈동자를 찍지 못한 채 날아가버렸다는 전설이 깃든 탱화다. 화룡점정. 눈동자는 정말 마지막에 찍히는 것일까? 권 불화장은 “탱화에서 얼굴을 상호라 한다. 상호에 눈동자를 그려넣는 것을 ‘점안’이라 하는데 실제로 마지막 작업”이라며 “눈을 그려 그림 속 부처가 개안하면 상호의 인상과 탱화의 전체 분위기가 결정된다. 마지막 눈화장이 인상 전체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며 웃었다.
그 자신 무형문화재이지만, 권 불화장은 이 제도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불모는 작품에 혼신을 쏟습니다. 불화장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데는 탱화 자체는 물론 거기 깃든 정신을 유산으로 인정하고, 그 계승을 지원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수장학생이 되더라도 한 달에 20만 원 남짓한 지원만 있으니 정말 뜻이 있어도 몸을 던지기 어렵죠. 이런 현실을 개선해야 문화재가 후세에 전승·계승될 수 있습니다.”
※ 제작지원 B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