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조선 지역가사 공모 맞서
- 한민족이 직접 만든 향토찬가
- 대중 뜨거운 반응 못 얻었지만
- 민족사적·대중문화적 의미 커
어떤 방면이든 ‘최초’라는 말에는 일정한 범위와 권위가 따라붙는다. 최초성의 가치는 한층 광채를 뽐낼 수밖에 없다. 누구도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없고, 또 그것을 훼손하려는 어떤 시도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최초의 ‘부산 노래’에 대한 탐색을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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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을 다룬 최초의 대중가요 ‘부산노래’ 음반. |
1935년 서울의 오케레코드사 대표 이철 사장은 조선 10대 도시 향토찬가모집 공고를 조선일보에 냈다. 지역의 향토성과 고유의 정서를 듬뿍 담아낸 작품을 기대하는 사업이었다. 공고에 나타난 식민지 조선의 10대 도시는 경성 부산 대구 군산 목포 평양 개성 원산 함흥 청진 등이다. 남북한 분포가 다섯 개씩이다.
전국에서 많은 응모작품이 쇄도했다. 일본과 중국 심지어 연해주에서도 응모한 경우도 있었다. 공모에서 뽑힌 작품이 우선적으로 작곡되고 가수를 지정해 음반제작에 들어갔던 것이다. ‘부산 노래’가 가장 먼저 음반으로 만들어졌고, 이어서 ‘목포의 눈물’ ‘평양행진곡’ 등이 차례로 발매됐다. 대중의 가장 열띤 반응은 단연 ‘목포의 눈물’이었다. 이 노래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부산과 평양의 노래는 그만한 히트를 하지 못했다. ‘부산 노래’는 염일화 작사, 손목인 작곡으로 고복수 이은파가 혼성듀엣으로 불렀다. 염일화는 당시 작품을 응모했던 부산시민으로 보인다. 1935년 오케레코드 1974번 음반으로 발매됐다. 이 음반은 그동안 발굴되지 못한 채 제목만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음반의 마모가 워낙 심해서 3절 가사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우선 2절까지의 가사를 먼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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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노래’를 혼성듀엣으로 부른 고복수 이은파가 신보 소개에 게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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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탄 안개 속에 연락선 뜨고 / 오륙도 물결 따라 갈매기 난다 / 에헤요 에헤요 데헤야 / 조선의 문호 부산이로구나 // 용두산 봉우리에 백학이 쌍쌍 / 꽃피는 시절이면 원앙은 쌍쌍 / 에헤야 에헤요 데헤야 / 청춘의 도시 부산이로구나-‘부산 노래’ 1, 2절
창법상의 특징에서 신민요 풍이 강하게 느껴진다. 부산의 지명 오륙도와 용두산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부산을 ‘조선의 문호(門戶)’ ‘청춘의 도시’로 규정하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도입부의 배경은 안개 낀 현해탄이다. 여기서 ‘안개’란 단어의 상징성이 심상치 않다. 당시 식민지 체제로 전락돼 몰락상태로 기울어진 한국의 현황을 암시하고 있다. 연락선은 당연히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왕래하던 관부연락선이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안정적 환경으로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비극적 현실을 은연 중에 드러낸다. 용두산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부산시민이 즐겨 찾는 명소다. ‘백학’은 흰옷을 입은 겨레의 모습을 그린 것이며, ‘원앙’은 사랑을 속삭이는 청춘남녀의 실루엣이다. ‘에헤야 에헤요 데헤야’란 후렴구는 이 노래가 신민요 스타일을 지향하는 전통적 양식임을 말해준다.
향토가사 모집의 심사를 거쳐 선정된 작품을 중심으로 맨 먼저 제작 발매된 음반이 ‘부산 노래’다. 이 작품은 기록에 의거한 부산의 제1호 노래로서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1935년 8월에 음반이 시중에 출시가 되었으니 흥미로운 것은 신보 소개 광고 삽화에 해수욕장 풍경 등 한여름 이미지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엔 수영복 차림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이 노래를 혼성듀엣으로 부른 가수 고복수는 울산 출생이지만 부산에서 성장했다. 특히 1933년에는 가요콩쿨대회 부산 경남대표로 출전해서 입상했다. ‘타향살이’ ‘이원애곡’ ‘짝사랑’ 등의 대표곡이 있다. 이은파는 평북 진남포에서 활동하던 기생 출신으로 가수가 되었다. ‘앞강물 흘러 흘러’ ‘관서천리’ ‘쌍도라지 고개’ 등이 대표곡이다. 향토가사모집에서 뽑힌 또 다른 곡 ‘목포의 눈물’(손목인 작곡)은 9월, ‘평양행진곡’(문호월 작곡)은 10월에 발매됐다. 10대 도시 중 이 세 곳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다른 노래는 진행되지 못하였다.
사실 ‘부산 노래’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곡절이 있다.
한반도를 그들의 식민지로 완전 장악한 일제는 1934년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인을 대상으로 지역가사를 공모했다. 응모 요강은 가사의 내용이 반드시 일본의 전통음악인 온도(音頭)나 고우타(小唄)에 적합한 형식으로 제한시켰다. 온도(音頭)는 여럿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부르는 곡이고, 고우타(小唄)는 샤미센 반주에 맞춰서 부르는 짧은 노래를 말한다. 둘 다 일본의 에도시대에 유행했던 속곡(俗曲)을 가리킨다. 1934년 5월 20일에 시행한 이 공모에 무려 1060편이 투고했다고 한다. 여기에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요시무라 하루로의 작품이 1등으로 뽑혔다. 이 가사를 당시 시인으로 활동하던 사토 소노스케가 다시 다듬고 보작(補作)한 노랫말이 ‘부산 소패(釜山小唄)’다. 이런 현상은 식민지조선의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은 이런 흐름에 대해 비분강개한 마음을 가졌다. 비록 나라를 빼앗겼지만 노래까지 일본에게 모두 빼앗겨서야 되겠는가. ‘부산 소패’의 노랫말에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애착, 확장된 일본 영토에 대한 자긍심, 대동아공영권 기세의 점진적 확대 따위의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반영되어 있다.
반도문화의 희망을 담고 / 만나러 왔어요 부산항에 / 오래전부터 그리워하던 현해탄도 / 오늘만큼은 하룻밤 파도의 베개 // 멋쟁이들 거니는 동래 주변 / 거리엔 온천도 많구나 사꾸라 향기 / (중략) 여름에는 송도에서 즐거운 캠프 / 해변에서 멋진 파라솔 쓰고 걷는 이 누구인가 // 연락선은 동쪽에 ‘히까리(光)’는 북쪽 / (중략) 길게 부산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뜻 -‘부산소패(釜山小唄)’ 전문
이 같은 제국주의문화의 공격적 기세, 식민지조선에 대한 거침없는 일본화의 반발과 저항 속에서 ‘부산 노래’가 출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부산 테마 창작곡 ‘부산 노래’가 지니는 민족사적 대중문화사적 의미는 자못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