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깔렸다.”(소설 ‘알렉산드리아’ 첫 문장) 나림(那林) 이병주(1921~1992)는 국제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낸 천재 작가다. 작품 수가 소설 88권, 산문 40권이다. 한국 근대사 100년을 관통하고 있다. 조선 말기부터 근현대사를 탐사하면서 무거운 주제를 소설 수필 산문으로 표현하고 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작가다. 1992년 4월 3일 오후 4시 타계했다. 올해로 별세한 지 30년이 된다. 법학자 하태영 교수가 이병주 선생에게 작품 속에 나타난 선거·부산·전쟁·언론·법 사상을 물었다. 나림의 깜짝 놀랄 만한 문장과 시대정신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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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 경남 마산 민주당사 앞에 모인 시민과 학생이 정부를 규탄하며 시내로 뛰어가고 있다. 창원시 제공 |
- 나림 낙선경험 고스란히 담긴 作
- 50년대 자유당 불법 고발하며
- 피해자 비극적 삶 애잔하게 그려
- 당시 관권선거 드러난 위법행위
①헌법 116조 기회균등의 위배
②헌법 70조 공무원 정치 가담
③공무원법 65조 특정정당 지지
④선거법 9조 부당한 영향력
⑤형법 128조 선거방해와 협박
“이 나라의 민주역량을 높이는 데 노력할 것과 이 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일하겠다는 다짐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질 생각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그 진지한 눈동자를 잊지 않겠습니다.”
노신호는 농업의 진흥을 주축으로 한 공업화에 관한 자기 비전을 설명했다. 사회사상, 정치사상에 도통해 있었다. 노신호 씨의 인기가 결정적임을 알자 자유당은 경찰을 시켜 노신호 씨의 운동자를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자동차는 정지 위반·주차 위반의 명목으로 압수했다. 노신호의 사무장이 체포되고 Y선배도 철장 신세가 되었다.
■선거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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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5 부정선거와 관련, 김주열 열사의 사망 소식을 보도한 국제신보(현 국제신문) 4월 12일 자 기사. 나림 이병주는 그 당시 국제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었다. 국제신문 자료 |
‘패자의 관’. 선거소설·정치소설·기록소설이다. 이 작품은 1950년대 자유당 선거 탄압과 부정선거, 민주당 흑색 선거를 고발하고 있다. 대학교수 출신 노신호와 K는 모두 선거에서 낙선한 인물이다. 나림은 이 작품에서 패자의 삶을 애잔하게 그리고 있다. 노신호가 자유당 시절 군인들에게 유세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나림의 선거 연설로 들었다. 나림은 고향에서 두 번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모두 낙선했다. 그 낙선 이유가 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국회의원 입후보 경험이 없으면 쓸 수 없는 작품이다.
‘패자의 관’은 지리산 골짜기 작은 시골 마을의 선거 실태를 소재로 1950년대 후반 선거 풍속도를 묘사하고 있다. 오늘의 공직선거법 관점에서 보면 모두 선거법 위반이다.
“노신호의 사무장이 체포되고 Y선배도 철장 신세가 되었다. 노신호의 선거운동은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입에서 노신호라는 이름이 사라져 갔다. 투표 사흘 전의 새벽 우리 고을의 동리마다 골목마다 하얗게 삐라가 뿌려졌다. ‘노신호 동무를 대한민국 국회로 보내자’로 된 이 삐라엔 재산(在山) 빨치산 일동 또는 김일성이란 서명이 있었다.”
■법률
‘패자의 관’에 묘사된 선거 방해와 선거 조작은 모두 헌법을 파괴하는 행위다. 헌법 116조 제1항은 선거운동의 기회균등을 보장하고 있다. 평등선거 원칙은 헌법상 선거제도의 기본 원칙이다. 선거 공정성은 민주적 선거제도의 초석이다.
헌법 제70조 제2항은 공무원 신분 보장과 정치적 중립성을 규정하고 있다. 집권당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고 정당에 대한 불간섭과 정당의 불가담을 의미한다. 공무원은 업무 수행에서 정치적 편향성을 띠어서는 안 된다.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기 때문이다. 공익을 추구하고 행정의 전문성과 민주성을 높여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정책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취지다.
국가공무원법 제65조도 직업공무원의 정당 또는 정치 단체의 결성·가입을 금지하고 선거에서 특정 정당이나 특정인을 지지·반대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직업공무원의 정치운동 금지다.
공직선거법 제9조 제1항도 공무원의 선거 중립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①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기관·단체를 포함한다)는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 ② 검사(군검사를 포함한다) 또는 경찰공무원(검찰수사관 및 군사법경찰관리를 포함한다)은 이 법의 규정에 위반한 행위가 있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신속·공정하게 단속·수사를 하여야 한다.
형법 제128조는 선거방해를 규정하고 있다. 검찰, 경찰 또는 군의 직에 있는 공무원이 법령에 의한 선거에 관하여 선거인, 입후보자 또는 입후보자가 되려는 자에게 협박을 가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선거의 자유를 방해한 때에는 10년 이하의 징역과 5년 이상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이상이 헌법 제70조 제2항·국가공무원법 제65조·공직선거법 제9조 제1항·형법 제128조 공무원의 정치 중립 규정이다. 2012년 대선에서 국가정보원이 개입했다는 보도와 판결을 보면, 나림의 경고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하다. 나림은 “역사의 그물망이 놓치고 지나간 실체적 진실을 소설을 통해 걷어 올렸다.”(김종회 ‘문학의 매혹, 소설적 인간학-이병주를 위한 변명’, 바이북스, 146쪽)
■부정선거
‘패자의 관’에서 노신호와 K의 선거 패배는 조직적인 공권력의 선거 개입 때문이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헌법·국가공무원법·공직선거법·형법 위반이다. 이 소설은 불법 선거와 낙선자의 비극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유당은 상당한 무더기 표를 집어넣었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제국주의가 민주주의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노인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우리는 지금 민도가 낮아 민주주의를 하지만 빨리 노력해서 우리도 제국주의 해야 합니다. 제국주의를 해야 공산당을 때려잡을 것 아닙니꺼.”
‘패자의 관’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현대사를 한 단락 인용한다.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이승만 당선을 위해 105호, 108호라는 비밀경찰을 편성했다. 105호는 ‘선거독찰반’이었고, 자유당 후보가 85%를 득표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64명의 경찰 간부로 조직되어 있었고, 서울시와 지방별로 운영했다. 각도 경찰국의 경감·경위급 30명으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관내 경찰서를 각각 담당 구역으로 맡았다. 이승만 독재와 영구 집권의 도구였던 정당의 이름이 바로 자유당이다.”(김동춘 ‘대한민국은 왜?’, 사계절, 151·152쪽)
부정선거로 패배한 사람은 선거 후 비참하게 살았다. 재산을 탕진하고 빚더미에 깔렸다. 선거 때 찍은 ‘빨갱이’ 낙인으로 한 인간은 완전히 부서진다. 더 이상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다. “앞으론 정치를 단념하겠다.”
나림은 작품 ‘패자의 관’과 ‘겨울밤-어느 황제의 회상’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공정선거 버스’를 혼자 밀고 있었다. 누가 이렇게 적나라하게 기록을 소설로 남겨 놓았는가.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나오기 전이다.
“서울 어떤 공사장에서 날품팔이 한다고 했는데 육 년 전 돌연 나는 그의 부보(訃報)를 받았다.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통찰력을 담은 머리가 이미 하나의 물체가 되어 매장을 기다리고 있는 광경이 비수로서 찌르듯 나의 가슴을 찔렀다. Y선배는 노신호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이런 인물을 매몰시켜버리는 이 한국이란 토양이 한없이 원망스럽다. 노신호 무덤은 경기도 고양군에 있다. 몇몇 친구들이 뜻을 모아 그곳으로 정한 것이다.” 노신호는 고향을 싫어했다.
■기록소설의 힘
우리는 그의 비문을 위해 다음의 글을 새겼다. ‘아마, 성공할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죽는다. 그럼 마찬가지 아니냐’. ‘아돌프’의 작가 콩스탕의 말이다.
“패자의 관은 하늘이다. 바람이다. 흙이다. 풀이다. 이 세상에 패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 어떻게 장식해도 죽음은 패배다. 대영웅도 대천재도 대정치가도 한번은 패자가 된다. 그리고 영원히 패자로서 남는다.”
헌법 정신을 짓밟았던 당시 권력자는 지금 지구상에 더 이상 생존하지 않는다. 노신호의 비극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해방 후 10년이 지난 그 슬픈 토양에서 몸부림을 친 한 지식인의 비극이다. 어디 이런 인물이 한두 명이겠는가.
나림이 50년 전 1971년 남긴 19쪽짜리 이 작은 작품에서 나는 헌법·국가공무원법·공직선거법·형법의 법문을 깊이 생각했다. 그가 남긴 목소리는 선거철만 되면 생생하게 울린다. 소설 ‘패자의 관’과 헌법 제70조 제2항·국가공무원법 제65조·공직선거법 제9조 제1항·형법 제128조 공무원의 정치 중립 규정을 함께 읽고 배우면 좋겠다. 이것이 나림이 원했던 독서법이다. 이게 기록소설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