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림, 강제수사 수감 경험 바탕
- 가족이 해체되는 절망의 순간
- 아들과 어머니 삶 절묘하게 묘사
- 눈이 오나 바람 부나 생선 팔아
- 폐병 말기 아들 곁 지킨 어머니
- “죽거든 자연에 뿌려달라” 유언
“그날 오후 나는 회사에서 체포됐다. 하나의 가정은 수라장이 되었다. 십 년 걸려 이루어놓은 나의 가정은 작은 유리그릇에 불과했다. 나라고 하는 중심이 없어지자 시멘트 바닥에 굴러떨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집은 남의 손으로 건너갔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갔다.”
“영희란 여섯 살 난 딸은 급성 폐렴으로 죽었다. 직접 사인은 급성폐렴이지만 영희는 내가 체포된 그 찰나에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다. 하늘보다도 높게 생각하던 아버지가 죄인으로 묶였을 때 그 딸은 그때 죽어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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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을 앞둔 부산 중구 자갈치시장. 오른쪽 사진은 자갈치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자갈치아지매’들이 화톳불에 추위를 녹이고 있는 모습. 자갈치시장에 가면 자식과 남편을 위해 한평생 헌신하는 우리네 어머니의 삶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국제신문 DB |
■불법체포
우리나라 작가 중 강제수사 폐해를 이렇게 묘사한 사람은 아직 없다.
“다신 유치원에 안 가겠다고 하잖아. 그래,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더니 동무들이 느그 아버지 죄인이 되어 푸른 옷 입고 감옥살이한다더라고 놀려대더라는 건데, 그 후 며칠 안 가서 애가 자리에 눕더니 하룻밤 사이에 그만….”
세상이 뭣인지도 알기 전에 슬픔을 먼저 안 아이, 살기에 앞서 죽음부터 익혀 버린 그 가냘픈 영혼! 나는 다시 눈을 감는다. 강제수사를 얼마나 신중하게 해야 하는지 절감했다.
“형무소를 다녀나온 사람의 눈은 다르다. 역사라는 의미, 법률이라는 의미, 사회라는 의미, 인생이라는 의미를 적막하고 황량한 빛깔로 물들여 놓는 눈이 되어버린다.”
교도소를 경험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다. 국가권력의 불법 행사는 이처럼 참혹하다. 나림의 체험이 담겨 있어 애절했다.
■가족 해체
불법 체포로 가족은 해체된다.
“경숙은 내가 감옥살이를 삼 년째 하던 어느 날, 마지막 편지를 내게 보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추운 날, 나는 그 편지를 읽고 오한으로 몸을 떨었다. 그 편지를 마지막으로 하고 경숙은 딴 사나이 품으로 갔다.”
“부디 행복하게 살아가시오.”
“기왕 우린 아름답게 살지 않았소. 슬픈 대목은 잊어버리고 앞으론 아름다운 추억으로써 서로를 이해합시다.”
교도소에서 가족이 해체되는 절망의 순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영희의 죽음이 있은 후, 집안의 형편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경숙은 시어머니에게 직장을 구해 나가겠노라고 했다. 어머니는 자기가 생선장수라도 할 테니 경숙은 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경숙은 그의 친구가 경영하고 있다는 다방 일을 거들어 주게 되었다. 월급이 삼 만 원이나 된다는 게 커다란 유혹이었다.
“미인박명이란 말은 나면서부터 미녀가 기막힌 팔자를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이리떼 같은 사내들이 미녀를 가만두지 않는 데에 운명의 장난이 시작된다. 세상은 미녀의 정절을 거의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운명의 여신은 이 여인의 미모를 질투한다고 했다. 경숙에겐 그러니 잘못이 없다.”
이것이 나림의 문장이다. 우리나라 사법 정책을 생각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파멸된 지상의 작은 보금자리를 마지막까지 지킨다. 나는 폐결핵 말기로 가석방된다.
“천막을 머리 위에 친 구멍가게, 판자 위에 생선을 늘어놓곤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모질게 비가 내리는 날은 제외하고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영하 20도가 되거나 30도가 되거나….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모자의 끼니를 이어가고 나의 약값도 치른다. 서른다섯 살의 사나이가 칠순 가까운 노모의 등에 업혀 살아가는 꼴이다.”
“하여간 너 죽는 날 나는 죽는다. 어미를 오래 살릴 생각이 있거든 빨리 병을 고치고 그럴 생각이 없거든 알아서 해라.”
아들 감옥 생활 뒷바라지, 그 충격으로 손녀 사망, 며느리 가출, 폐병 말기 아들 수발, 바닷가 부근에서 생선 장사를 하며 어머니는 이 험한 인생을 버티고 있다. 나림 문학의 특징이다. 슬픈 사람의 깊은 통한을 생명력으로 어루만진다. 어머니 문학은 ‘운명의 덫’에서 더 구체화한다.
■종언
“어머니의 칠십 평생은 아버지의 오십 생애를 보태어 백이십 년을 살았고 나의 삼십오 세를 보태어 백오십오 년을 살아온 셈이다. 위대한 여성의 생애이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는 날. 지구도 그 맥박을 멎을 것을 확신한다. 그 순간 예낭도 멸망한다. 어머니는 힘없는 팔을 들어 헌 보자기를 가리켰다. 그걸 풀어보라고 한다. ‘그걸 가지고, 그걸 가지고!’ 그 돈을 가지고 병을 고쳐보라는 뜻이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내가 죽거든, 불에 태워라. 뼈를 가늘게 갈아라. 뒷산에 올라가서 그 재를 뿌려라. 바다에도 던져라. 아예 무덤을 남기지 마라.”
이것이 소설이구나. 어머니는 조용히 영원한 잠 길에 들었다.
“어머니는 고운 재가 돼 예낭의 흙이 되고 예낭의 바다가 되었다. 예낭의 풍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예낭 풍물지(風物誌)란 이 땅의 숱한 어머니 가운데 한 어머니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끝나야 하는 기록, 이른바 종언에의 서곡이다. 태양도 끝날 날이 있다.”
‘예낭 풍물지’는 국가권력이 한 가정을 완전히 파멸시킨 법률 소설이다. 전직 기자와 그 어머니의 삶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머니 문학이다. 1972년. 세대. 52세. 중편 80면. 영어로 번역되었다. 천재 작가의 대표작이다. “나는 안심하고 죽을 수가 있다.” 우리 어머니들은 이렇게 살았다. 진정한 승리는 사(死)의 승리다. 자갈치 시장·국제 시장·감천마을이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