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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그곳에서 만난 책] <127> 하주희 소설집 ‘시간의 마디 그 흔적’

안개로 가득한 인생 뒤안길… 그 끝엔 명주바람 불겠지

  • 박현주 책 칼럼니스트
  •  |   입력 : 2022-03-27 19:08:58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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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시절 반공글짓기 대회
- 지어낸 얘기로 입상해 전전긍긍
- 그 일로 거짓 글 안 쓰겠다 다짐”

- 자신과 지인의 경험 소설에 담아
- 삶에 절망 않고 다가올 희망 그려

생로병사(生老病死). 사람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을 이르는 말이다. 어찌 할 수 없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하주희 소설집 ‘시간의 마디 그 흔적’은 그런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려준다. 소설을 읽는 동안 주인공들에 대해 애잔한 심정이 느껴졌다. 필자에게도 천천히 다가올 시간이겠구나 싶어 삶과 죽음에 대해 경건해지기도 했다. 하주희 소설가를 낙동강 갈맷길에서 만났다.
소설집 ‘시간의 마디 그 흔적’을 낸 하주희 작가가 부산 낙동강변 엄궁항 인근 갈맷길에서 작품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낙동강 갈맷길을 걷는다

하주희는 대구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살고 있다. 도시철도 하단역에서 기다리던 소설가를 따라 낙동강 갈맷길 코스 중 엄궁항 주변을 함께 걸었다.

“하단에서 산 지 10년째입니다. 낙동강 석양이 좋아 이 길을 찾아옵니다. 오늘 다 걸을 수는 없겠죠? 조금만 함께 걷지요. 둑길 위 저 편에는 도로 위로 차가 다니지만, 강변 쪽으로 내려오면 딴 세상에 온 것처럼 자연을 만날 수 있답니다.”

억새는 바람에 몸을 맡겨 춤추고, 청둥오리와 물닭도 보였다. 카메라를 들고 길을 걷다가 낙동강 풍경과 새를 사진을 찍는 시민이 보였다. 하주희는 이 곳을 ‘세렝게티’라고 불렀다. “사시사철 다른 느낌을 주지만 늘 좋아요. 해가 지는 장면은 기막히게 아름답지요. 석양을 보며 슬픈 느낌을 받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내일 또 와서 보면 되지’라고 생각합니다.”

고요하고 가득한 낙동강 물결 위에 하주희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흘러갔다. 그는 언니 둘, 남동생 둘 사이의 셋째 딸이었다. 아버지는 대청마루에서 전축을 틀어놓고 딸들에게 왈츠를 가르쳐주시던 멋진 분이었다. 문학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틈틈이 들려주셨다. 언니들에게는 무용과 그림을, 하주희에게는 피아노를 가르쳤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 그는 어느새 소녀로 돌아간 듯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다. “아버지 기대와 달리 피아노 실력이 별로였어요. 책을 더 좋아했지요. 초등학교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교내에서 6·25와 관련한 반공 글짓기대회가 열렸어요. 할아버지가 참전용사였고 용감하게 싸웠다고 글을 썼는데, 지어낸 글이었죠. 어렸고, 별 생각 없이 시간 내에 맞추어 글을 냈던 겁니다. 그런데 그만 큰 상을 받았어요. 겁이 덜컥 났어요.”

듣고 있는 동안 점점 흥미진진해졌다. “학교에서 글이 사실인지 조사를 하러 집으로 오는 게 아닐까 겁나서 떨었지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바로 그 때 도내 백일장이 열리게 됐는데, 학교에서 저를 대표로 그 백일장에 내보낸다는 결정이 났지 뭡니까. 더 무서워졌어요. 그래서 저는 배가 아프다고 뒹굴면서 못 나간다고…. 배를 잡고 뒹구는 동안 어쩐지 정말 배가 아프지 뭐에요. 다행히 대회는 안 나갔답니다. 그런데, 아마 어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한참 웃으면서 그 일을 이야기했는데, 필자에게 이야기 한 것이 첫 고백이라고 했다. 수십 년간 마음에 걸렸던 일을 처음 털어놓은 것이다. “그 일 이후로 다시는 거짓으로 글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지요.” 어린 소녀의 그 다짐은 변함없이 지켜졌다.

하주희는 1998년 등단, 부산문단에 발을 디뎠고 저필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0년 2월부터 2020년 2월까지 1년 반을 제외하고 ‘예술부산’ 편집장과 편집주간을 역임했다. 소설집 ‘길을 떠나다’ ‘시간의 마디 그 흔적’을 냈다.

■삶에서 만난 이야기

시간의 마디 그 흔적- 하주희 /세종출판사 / 2022
‘시간의 마디 그 흔적’에는 8편의 작품이 수록됐다. 이 작품들에는 퇴직한 후 편안한 노후생활을 꿈꾸어왔지만 어느새 찾아온 병을 뒤늦게 발견하는 사람, 건망증이 심한가보다 싶었는데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는 사람, 세월이 가면서 사는 게 편해지는 게 아니라 여전히 힘들고 고달픈 사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하주희는 자신의 경험에서, 또 지인들의 삶에서 만난 이야기를 소설에 담았다. 누군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소설이 좀 무겁다”고. 그러나 어쩌랴. 삶이 무거운 것을. 소설 속 인물들은 그 무거운 삶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을 돌아보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찬찬히 풀어낸다.

8편의 소설 중에서 ‘나비와 꿈 그리고 나비’에 특히 눈길이 갔다. 고대 가야 사람과 현재를 사는 사람이 이어지는 이야기다.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다.

하주희는 경북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에서 영감을 얻었다. “경주에서도 고분군을 보았지만, 지산동 고분군에서 특별한 감흥을 느꼈지요. 옛사람들의 무덤이 아니라, 마치 이 땅에 만들어질 때부터 생겨나 지금까지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문인들과 역사기행을 간 길이었는데 저 혼자 뭔가에 홀린 듯이 고분군 정상까지 올라가버려 동행들이 저를 찾느라 애를 먹었지요.”

그의 마음을 낚아챈 것은 무엇이었을까. 소설 말미에서 그날의 하주희를 짐작해본다. “여자는 느릿느릿 걷고 있지만 발길이 허공에서 헤매듯이 멈칫멈칫거린다. 한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의 조붓한 오솔길의 소실점은 비안개에 숨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솔길 양옆 가풀막진 경사는 초록에 물든 풀들이 우거져 융단을 펼쳐 놓았고, 피어나는 비안개는 하얀 나비의 군무가 되어 시야에 가득 올라온다.” 하주희는 소설 속 이 장면처럼 지산동 고분을 걸었다고 말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오솔길을 멈칫멈칫 걸어가는 것. 비안개가 가리고 있어 주변이 애매모호한 길. 어쩌면 그것이 인생일지도 모른다. 그 길이 끝날 즈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병과 죽음이라 해도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생명이 유한한 것은 안타깝지만, 그렇기에 귀하다.

하주희 소설가는 ‘책을 묶으면서’에서 이렇게 썼다. “인지된 삶은 아는 만큼 고통이며, 미지의 생은 또 그만큼 두려움으로, 때로는 뒤바람으로 힘든 날도 있겠지만, 내일은 언제나 명주바람이라 그리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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