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닮은꼴 두 나라 연인 설정 절묘
- 나라 구하고자 떠나가는 장면
- 우크라이나 전쟁 참상과 데자뷔
- 테러에 대한 철학적 사유 압권
- 독립투사·무정부주의자 주인공
- 파란만장한 인생사 다룬 작품
- 비극의 시대 인간 회복도 그려
“-얼마나 훌륭한 재질을 가진 인물들이 이 죽음의 집에서 햇빛을 보지 못한 채 매몰되고 말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
| 지난달 3일(현지시간) 폴란드 남동부 국경도시 메디카에서 한 우크라이나 여성이 추위에 떠는 여자 어린이를 안아주고 있다. AP 연합뉴스 |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는 첫 문장에 ‘가슴이 아프다’가 있다.
“헌데 정람은 부모를 몰라. 고아로 자란 거지. 정람을 키운 사람은 하얼빈의 러시아 정교교회의 신부였다고 하더만. 그러니까 그 사람은 어려서부터 러시아 말을 익히며 자란 사람이야.” “러시아인인 신부가 일러준 거지. 넌 한국인이라고.”
■그 테러리스트
“신은 이미 죽었다 이거야. 섭리의 집행자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이거야.”
“테러리스트는 신을 대리한 섭리의 집행자야.”
“테러리스트는 살생을 하지 않아. 살사(殺死)할 뿐이야.”
나림의 문장은 예술이다. 9·11 테러와 전혀 관련이 없다.
“테러리스트란 결국 원한에 사무친 인간들을 대표하는 엘리트란 말이다.”
“진정한 테러리스트가 되려면 얼음장처럼 미쳐야 해.”
“노예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고 당당한 인간으로서 정과 이성을 고루 충족하며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의 신비와 슬픔 섞인 원한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의 주인공은 정람과 에스토라야다. 에스토라야는 폴란드 여인이다. 슬픈 가족사를 안고 있다.
“다섯 살 에스토라야는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총살당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로써 그 여자의 운명은 결정된 거야.”
에스토라야는 테러리스트가 된다. 정람은 에스토라야를 사랑한다. 에스토라야는 정람에게 마가복음 제8장 35절을 읽으라고 한다. “-너희들이 너희들의 영혼을 구하려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니라. 만일 너희들이 너희들의 영혼을 나를 위해 버리면 그때 너희들의 영혼은 구함을 받을지어다…. 내가 다 읽었을 때 에스토라야는 속삭였다. 알겠죠? 내 마음을.” 에스토라야는 다시 러시아로 들어간다.
나는 이들의 슬픈 사랑을 운명으로 읽었다. 테러리스트의 철학이다. 1983년에 쓴 작품을 읽으면서 오늘의 우크라이나를 생각했다. 어머니와 아이들은 난민이 되고 아버지와 남자들은 총을 들고 있다. 제2·제3의 에스토라야가 눈에 선하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40년 전 작품에서 나림의 천재성을 발견했다.
■역사
나림은 왜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에서 정람과 에스토라야를 주인공으로 데려왔을까. 나는 이 점이 궁금했다. 폴란드는 아픔과 한이 많은 민족이다. 1795년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에 분할됐다. 1918년에 독립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으로 서부는 독일에, 동부는 소련에 분할 점령됐다. 1945년 해방됐다. 1939년 소련은 카틴 숲에서 폴란드 지도자 약 2만2000명을 학살했다. 독일 나치 군대는 1944년 63일 동안(8.1~10.2) 바르샤바 봉기자 20만 명을 학살했다. 독일은 폴란드를 ‘독일에 단도’라고 했다. 일본은 조선을 ‘일본에 단도’라고 했다. 강대국들은 조선과 폴란드를 위험한 국가로 인식했다. 오늘의 우크라이나·미얀마·아프카니스탄·베트남·핀란드를 생각하면 된다.
나림은 한국과 폴란드의 역사적 운명을 포착하고, 독립을 위해 투신한 정람과 에스토라야를 소설에서 만나게 한 듯하다. 비슷한 역사와 인물을 절묘하게 설정했다. 역시 나림이다. 역사성과 구조가 웅장하다. 정람과 에스토라야의 만남은 예술이다.
■테러 철학
“윤리란 건 일본 놈들이 만들어놓은 수신책(修身冊 ) 같은 것이 아닌가. 수신교과서적인 윤리로써 사회를 이해하고 처신할 수 있겠는가.”
나림 문장은 찬란하다.
“테러리스트는 시인이다. 우주의 원한을 스스로의 가슴속 용광로에 집어넣어 섭리의 영롱한 구슬을 주조해내는 언어 없는 시인, 영혼의 시인이다.”
“왜 꼭 죽여야 하는 겁니까.”
“언어도가 단하고 심행처가 멸하면 집검(執劍) 또는 집총(執銃)하여 바깥으로 뛰어나가 누구의 원수이건 원수를 골라 죽이는 게 테러리스트야.”
“심행처가 멸했다는데 벌을 어떻게 평량한단 말인가.”
나림의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표현은 소설에서 예술로 승화한다.
■만사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는 독립투사 하경산·무정부주의자 동정람의 슬픈 노년을 그린 작품이다. 경산은 무허가 판잣집에서 학처럼 살고 있다. 정람은 고아로 자라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고 돌아다닌 노(老)혁명가·피리의 명수·박람강기한 로맨티스트이다.
이 작품은 굵직한 주제와 흥미로운 소재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두 노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사, 과거와 말년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독립운동가 경산·무정부주의자 정람·운명의 진주댁이 연출한 그 날밤 목로술집의 슬픈 연극무대는 가슴 아픈 현대사를 옮겨 놓았다. 나림은 월광에 이름 없는 인물, 네 사람을 축원했다. 경산·진주댁·정람·임영숙이다.
슬픈 현대사의 계곡에서 인간 회복을 읽었다.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는 역사·기록·법률소설이다. 방대한 내용을 탁월하게 구성한 휴머니즘 소설이다.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는 ‘소설 알렉산드리아’이후 20년 만에 등장한 서사적 작품이다. 나림의 동남아연방론도 담겨 있다. 1983년. 한국문학. 62세. 중편 16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