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속소재 고급 가구장식재 두석
- 조선시대부터 신혼부부에 인기
- 놋쇠로 만들다 18세기 백동으로
- 日 패망 뒤엔 탄피 녹여 제작도
- 70년대 합금제작 공장 하청주며
- 대부분 공방 제련법 명맥 끊겨
- 막내아들 아버지 기술 잇기 나서
화초장. 작은 서랍간과 수납공간이 딸린 소목가구. 그네 타는 댕기머리 소녀나 꽃·노루를 새겨넣은 그림이 생기를 불어넣는다. 과거 어른들의 안방이나 마루에선 화초장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화초장 이음새와 서랍·여닫이문고리를 장식하는 금속재 장신구를 두석(豆錫) 또는 ‘장석’이라고 한다. 목재 가구 위에 덧대 못질로 마감한 두석은 나무의 트임을 방지하고 이음새를 연결하는 기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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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극천 두석장이 통영 명정골 장석집에서 장석을 실톱으로 자르고 있다. 이우정PD |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에 두석을 만드는 두석장(豆錫匠)이라는 호칭이 등장한다. 공조(工曹)에 속한 두석장은 주석·아연을 합금한 놋쇠(황동)를 이용해 두석을 만들어 가구를 마감했다. 여염집 부모들은 딸을 시집 보낼 때 나비나 박쥐 형태로 제련된 두석장(豆錫欌)을 찾았다. 이런 풍습은 현대까지 이어졌다. 재료도 귀한 데다 얇은 금속판을 다잡아 모양을 내는 고급기술을 요했기에 두석으로 마감된 가구는 값이 제법 나갔다. 1980년대엔 두석장을 맞추기 위해 여러 집이 계를 하는 풍경도 흔했다. 오늘날로 치면 장기간 ‘공구(공동구매)’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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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티나무 나비장석 이층장. 김극천 두석장이 제작한 장석이 부착됐다. 김채호PD |
계절 따라 가구를 바꾸는 시절이 되면서 두석을 쓴 가구를 보기는 어려워졌다. 그래도 전통 두석 제작기법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국가무형문화재 64호 보유자 김극천(71) 두석장을 최근 경남 통영의 작업장에서 만나 두석에 얽힌 일화를 들었다.
두석이라고 할 때 쓰이는 글자는 콩 두(豆) 자다. 이는 재료를 제련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소리와 연관이 있다. 김 두석장은 “과거엔 장석을 만들려면 기다란 가락 형태로 합금을 만들어 두드리고 달구기를 반복했다. 합금을 길고 얇게 늘이기 위해서다. 이 때 달군 합금을 망치질하면 ‘타당’ 하고 꼭 콩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만든 합금은 콩처럼 누런 색을 띤다고 해서 두석(豆錫)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고 설명했다.
19세기 들어 누런 빛이 도는 놋쇠 대신 선명한 은백색의 백동(백통)이 주된 재료로 자리 잡았다. 구리와 니켈을 합금한 것으로 김 두석장 또한 백동을 사용한다. “일제가 패망한 뒤 전쟁에 사용된 탄피나 일본 동전이 한반도 곳곳에 지천이었어요. 이들 금속이 함유한 것이 니켈입니다. 실제 탄피와 동전을 녹여 두석에 사용했습니다. 두석 재료가 바뀐 것은 재료 수급과 연관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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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극천 두석장. |
1970년대 후반에는 백동 사용에도 변화가 일었다. 장작 대신 연탄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두석공방들도 연탄을 도입한다. 문제는 연탄을 사용하자 백동에 전에 없던 녹이 슬기 시작했던 것. 서둘러 찾은 대체재는 스테인리스였다. 그런데 스테인리스로 만든 장석은 처음엔 빛도 모양도 곱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금세 변색되거나 변형됐다. 결국 다시 백동이 장석 재료로 사용됐는데 이 과정에서 중대한 기술 유실이 일어났다. 김 두석장은 “장작이 연탄으로 바뀌며 백동과 스테인리스 재료를 번갈아 사용하는 과정에서 두석공방이 직접 백동을 만드는 대신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사용하게 됐다”고 했다. 이는 전국 대부분 공방에서 백동 제련 기술이 실전(사라지는)되는 결과를 낳았다.
장석을 만드는 일은 우선 합금 가닥을 두드려 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두께는 0.5㎜로 매우 얇다. 김 두석장은 “펴진 판 위에 정을 이용해 본(도안)을 그린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나비와 박쥐 문양이다. 나비는 부부간의 금슬을, 박쥐는 다산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본이 완성되면 작두와 실톱을 이용해 모양대로 잘라낸다. 이 단계까지 장석의 표면은 거칠다. 줄로 깨끗하게 다듬은 뒤 표면에 문양을 새겨 입체감을 더한다. 기왓장이나 깨진 장독 등을 곱게 간 뒤 헝겊으로 말아 닦아내면 장석에선 은은한 광택이 감돈다. 두석장들은 이 같은 금속 성형 작업에 앞서 장석이 부착될 가구의 규격을 측정해 딱 맞는 크기의 장석을 만들었다.
“가구를 짜서 아직 칠하지 않은 상태를 ‘백골’이라고 해요. 보통 가구를 짜는 측에서 백골 단계까지 완성한 뒤 우리를 불러요. 두석장은 규격을 잰 뒤 작업장으로 돌아와 장석을 만듭니다. 장석 작업에 드는 시간은 가구의 크기에 따라 다르기는 한데 짧으면 열흘, 길면 한 달 보름이 필요해요. 그 사이 백골은 칠을 입고 가구가 됩니다.”
못질로 장석 붙이기를 마쳐야 비로소 가구가 완성되는데, 이 단계에서 가구를 짜는 소목장과 두석장의 호흡이 중요하다. 소목장 측에서 못을 박아도 될 만한 곳에 미리 못질을 해두면 두석공방의 하급 장인이 그 자리에 장석을 붙였다. 마무리 단계인 장석 부착에서 간혹 가구가 상하는 경우가 있어 이를 막고자 생겨난 일종의 불문율이다.
이처럼 두 공방의 일꾼들은 늘 서로의 작업장을 오가야 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나전칠기 갓 부채 연 등 공물을 생산하는 공방이 모여들면서 통영 문화동 일대엔 ‘통영 12공방’이 생겨났다. 12는 ‘많다’는 의미로, 솜씨 좋은 장인들이 몰리며 꽃핀 공예문화 속에 1980년대까지도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김 두석장이 공방 일에 발을 들인 것은 고교생 때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공방 경기가 좋았던 시절 이 공방 저 공방을 오가며 심부름만 거들어도 용돈을 두둑히 챙길 수 있었다고 한다. 3년6개월간 군복무를 마치고선 본격적으로 두석 일에 뛰어들었다. 선대 두석장이자 부친인 김덕용 선생과 김 두석장은 밀려드는 주문 속에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요즘은 두석공방의 호시절도 저물었다.
김 두석장은 “관에서든 민간에서든 새로 두석을 만들어 달라는 수요는 이제 없다. 다만 내 세대에 속하는 이들 가운데 장석이 달린 가구를 여전히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장석도 세월이 흐르면 떨어지거나 고장나는데, 이걸 수리해달라며 찾는 이들은 제법 된다. 이 또한 오래 가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연유로 김 두석장은 8년 전 막내 아들 진환(41) 씨가 두석 일에 매진하겠다는 뜻을 보였을 때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그는 “국가에서 월 150만 원가량 지원비가 나오지만 이는 제자 육성·작품 제작 등에 써야 하는 돈이다. 결혼한 아들로서는 생활이 어려울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면서도 “아들이 ‘내가 잇지 않으면 아버지의 기술이자 나라의 문화 자산인 두석의 명맥이 끊길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더라. 고마웠다”고 했다.
이수자인 아들의 성취를 묻자 김 두석장은 “지금껏 해온 만큼은 더 매진해야 진정한 기술자라 불릴 수 있을 것”이라며 엄한 스승의 면모를 보였다. 이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종목 중에도 현실적 여건의 편차가 크다. 지금처럼 천편일률적인 지원에는 문제가 있다”며 “정부가 국가무형문화재 이수·전승교육사들의 어려운 형편을 살피고 개선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덧붙였다.
※ 제작지원 B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