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필요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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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형(왼쪽) 유원산업 회장과 그의 일대기 ‘학초평전’. 김순규 경남대 명예교수 제공 |
300만 환의 현찰을 지프에 실어 주었다.
‘세상에 어찌 저런 사람이 있을까. 그만큼 나를 믿는다는 말인가…’싶으니 눈물이 났다.
“인정을 쓰기 위해 돈 버는 것 아니오.”
이 글은 ‘학초평전-마산의 작은 거인’(김호영, 경남, 1990)에 실린 내용이다. 경남대 김순규 명예교수가 30년간 보관해온 귀한 책을 보내줬다. 나림의 서문이 눈에 띈다. 4쪽 분량의 짧은 글이지만 나림 연구에 소중한 자료다.
자유당 말기 언론 탄압·국제신보사 자금난·마산 기업인 최재형·마산 불종거리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나림과 학초 최재형의 만남은 운명 같다. 언론인과 기업인의 미담이다.
“학초(鶴初) 최재형(崔載衡) 선생은 사업가(당시 유원산업 회장)로서 출중한 자질(資質)과 능력이 있다는 것은 물론이지만 인간적으로 학초는 우러러볼 만한 인격자이다. 학초는 나보다 2살 위인데도 언제나 겸손한 태도로서 나를 대했다. 물론 나에게만이 아니다.
자유당 말기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 나는 부산 국제신보사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있었는데 정부로부터 미움을 산 것이 원인이 되어 국제신보사가 심각한 자금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심지어는 종이를 살 돈이 없어서 3일 동안 신문을 발행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자유당 정부의 미움을 사고 있는 신문사에 융자해 줄 은행이 있을 까닭도 없고 그럴 특지가(特志家)가 있지도 않았다. 주필이며 편집국장인 내가 나설 일은 아니었지만 신문사에 딱한 사정을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궁리하던 끝에 생각한 사람이 바로 학초 최재형 선생이었다.
학초와 나는 내가 마산대학에서 일시 근무하고 있었을 때 알게 되었다. 다행히 수월하게 만날 수가 있어, 단도직입적으로 국제신보의 사정을 말하고 도와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당시의 300만 환이 지금의 돈으로 얼마나 될까. 대강으로 쳐서도 10억 원은 가까운 액수는 되지 않을까 한다. 그 돈으로 국제신보는 기사회생(起死回生)을 했다. 내가 국제신보사를 그만두고 난 후 신문사의 운영권에 변동이 생겼다. 학초가 소유하고 있던 주식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다.”
나림과 학초는 슬픈 현대사에서 ‘인간(人間)’으로 만났다. 나림의 인간성과 필력에 감탄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 -노발리스” 나림 저수지(那林 湖畔)의 문학 표지판이다. 두 분이 함께 지킨 국제신문은 오늘도 발행돼 예민한 독자를 만나고 있다.
학초가 좋아한 나림의 문장이다. “신문의 사명이 있지 않겠나. 그 사명을 잃으면 삐라지, 어디 신문인가. 아무리 메카나이즈된 사회이고 신문이 상품이라지만 신문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만은 지사적인 기질과 실천이 다소는 있어야 하는 거야.”(‘예낭 풍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