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1호 정통 법률소설가
- 확고한 법사상으로 깊은 성찰
- 사형제도·불법수사·고문 비판
- 정당한 형벌과 책임주의 역설
“아아, 저것이 내 발톱 밑으로 들어갈 대바늘이로구나. 형사는 내 엄지발톱 위에 대바늘을 갖다 대더니 망치로 꽝, 쳤다. 바위덩어리 같은 격심한 동통(疼痛)이 뇌천(腦天)을 부수는 듯했다. 뇌 속이 폭발 직전으로 팽창했다. 나는 죽기로 결심하고 굴복하지 않기로 했다.”(‘운명의 덫’)
“죄와 벌을 다룰 땐 일벌백계주의니 전체를 위한 경각이니 하는 생각을 버리고 공정한 판단을 하도록 해야만 된다.”(‘법률과 알레르기’)
“사형에 관한 문제는 이미 이론의 문제를 넘어 신념의 문제인 것이다.”(‘소설·알렉산드리아’)
확고한 법사상을 갖고 법을 악력(握力)으로 장악한 작가다. 우리나라 제1의 정통 법률소설가다. 한국 작가 가운데 나림 만큼 법률에 통찰한 작가는 없다.
■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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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림 이병주 선생이 1981년 만연필로 원고를 쓰고 있다. ⓒ임응식 사진아카이브 |
“법률은 자체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 역사 속에서 얻은 지혜와 정신이 있다. 일사부재리, 불소급의 원칙 같은 것은 인류의 노력이 수천 년 누적된 위에 쟁취할 수 있었던 성과를 우리나라의 법률가들은 예사로 무시한다.”
“헌법의 본문에 행위시의 법률이 아니고서는 이를 벌할 수 없다는 규정을 삽입한 줄 안다. 그래 놓곤 부칙에 가서는 이것을 뒤집어 버리는 조문을 단다.”
나림의 수필 ‘법률과 알레르기’는 아주 귀한 자료이다. 1967년 ‘신동아’에 발표됐다. 나림의 법사상을 정확히 알 수 있다. 근대 형법의 자유주의 사상·법의 정신·헌법 정신·치안유지법·고문에서 얻은 증거·법률 신뢰·법관 신뢰·일벌백계주의 병폐·전문 재판 비평가 등 사법 정책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검사, 변호사, 법학도들이 그들의 생명으로 알고 있는 법의 존엄성을 위해서 그 힘을 결집하면 위정자의 실수를 사전에 방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악법도 그것이 악법이라고 진단되었을 땐 마땅히 폐기의 절차가 늦어지면 법을 운용하는 사람의 작량(酌量)으로 폐기와 똑같은 동력을 나타낼 수도 있다.”
이 수필집에 법치국가·법의 목적·법의 정신·법률 신뢰·법관 신뢰·신형사소송법·증거주의·경찰권·전문 재판 비평가 등이 소개돼 있다. 나림은 경찰·검찰·법원을 불신했다.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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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주의 부산교도소 출옥 소식을 다룬 국제신보 1963년 12월 16일 자 7면 기사. 기사는 ‘“어머니 늙으셨군요. 인제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하고 70노모의 등을 얼싸안고 울먹이는 이병주 씨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고 적혀 있다. 국제신문 자료 |
“그날 오후 나는 회사에서 체포됐다. 영희는 아빠가 체포된 그 찰나에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죄인으로 묶였을 때 그 딸은 그때 죽어야 하는 법이다.” 나림은 불법체포·가족 해체·가정 해체를 절묘하게 묘사한다.
“내가 고문을 받은 취조실은? 피투성이의 광경. 다리뼈가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과 영혼이 분쇄되는 절망이 엄습했다. 형사의 고문은 혹독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검사는 형사처럼 혹독한 고문은 하지 않았지만, 논리적, 귀납적으로 몰아세우는 지 검사의 추궁도 육체적 고문 못지않은 고통이었다.”(‘운명의 덫’)
‘운명의 덫’은 살인죄 누명을 쓴 주인공 남상두가 억울한 옥살이를 20년간 하고 나서 출옥 후 진범을 찾아가는 치열한 과정을 그리고 있다. 수사·고문·묵비권·자백·증거 조작·증거능력·증명력·재판·재심·위증·사형폐지·혁명·대구 10월 폭동 사건이 나온다. 형사소송법 전반을 다루고 있다. 나는 고문 장면을 읽으면서 헌법과 형사소송법을 생각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수사의 역사였구나.
■재판
“만일 1·2심 판결대로 사형당했다면 오늘처럼 여기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 아닙니까?”(‘운명의 덫’)
“꽃피는 아침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 엄마를 부르던 아이가 커서 옥중에 앉아 사형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저 문 속으로 사라졌다.”(‘겨울밤 -어느 황제의 회상’)
나림은 1965년부터 사형 폐지를 주장한다. 어떤 형법학자보다도 열정적이다. ‘소설·알렉산드리아’ ‘겨울밤-어느 황제의 회상’ ‘칸나·X·타나토스’에서 계속해서 사형 폐지를 다룬다. 사형 집행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의심스러운 것은 벌하지 않는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이런 법의 정신을 알았고 법관들의 양식을 믿었다.”(‘운명의 덫’)
“법률의 위신을 더럽히고 있는 사례는 법관들의 확대 해석이다. 정치범과 사상범이 피고인인 경우 지나칠 정도로 확대 해석이 횡행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법률과 알레르기’)
“똑같이 재판에 참여하면서 판사와 검사의 형량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도 법률 불신의 원인이 된다.”(‘법률과 알레르기’)
나림은 정당한 형벌과 책임주의를 역설한다. 이것이 헌법 정신이다. 일벌백계주의는 전 근대 국가사상이다. 나림은 형사정책학에 통달한 법률소설가다.
■법사상
나림은 헌법주의자이다. 인간 존엄·생명 존중·자유주의·인도주의·평등주의 헌법관을 갖고 있다. 사형제도·불법 수사·고문·자백 강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사형 폐지·불구속수사·고문 금지·증거재판주의·인도적 형벌과 감옥을 주장한다. 한국 사법제도의 근대화를 정확히 성찰하고 있다.
헌법 정신이 무너진 시대에 헌법 정신을 일으켜 세우려고 각성한 작가이다. 이념과 실제의 균열을 직시한 작가다. 법률 이념과 법률 집행 현실을 냉철하게 기록한 작가이다. 나림은 법사상을 가지고 소설을 썼다. ‘법’과‘인간’을 꿰뚫은 정통 법률소설가다. 이것이 다른 소설가와 다르다.
문학평론가 김경수 교수는 ‘이병주 소설의 문학법리학적 연구’에서 법과 문학의 관계를 분석했다. “법은 허구의 일환이고, 그에 대한 회의가 문학의 허구이다.” 그러나 나림은 법을 허구라고 말하지 않았다. 법률과 현실의 불일치를 고발했다.
“밤이 깔렸다.” “사람을 죽여서 굶주린 개의 창자를 채워라.”
‘소설·알렉산드리아’의 첫 문장과 후반부 문장이다. 나는 오늘의 메시지로 읽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