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대 대학시절 신춘문예 등단
- “너무 이르다는 자각에 도망쳐”
- 남해신문·시와생명 창간하는 등
- 바쁘게 살며 차곡차곡 쌓은 시들
1980년대에 문청 시절을 보낸 몇몇 시인은 당시의 작품 합평회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렇게 감성적인 언어로 이 부조리한 세상을 담을 수는 없어!’라는 비판이다. 시를 쓰는 사람이 무엇을 쓰든 누가 비판할 수 있는가 싶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런 시각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 그를 보듬어 감싸는 감성을 마음 속에서 하나로 삭혀내는 것이 시인의 운명일 것이다. 이래저래 시인의 고뇌는 깊고, 또 끝이 없다. 김우태 시인의 시집 ‘비 갠 아침’을 읽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었다. 경남 창원시에서 시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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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단 30여 년 만에 첫 시집을 낸 김우태 시인을 경남 창원국가산업단지 제3아파트형 공장 내 ‘문화대장간 풀무’ 앞에서 만났다. |
■생애 최대의 풍경이었던 고향
김우태 시인은 현재 경남문화예술진흥원 콘텐츠진흥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일하는 곳의 또 다른 이름은 ‘문화대장간 풀무’다. 창원국가산업단지 제3아파트형 공장 내에 있다. 창원터미널에서 도로만 건너면 되는 곳이라 찾기가 쉬웠다. ‘문화대장간 풀무’는 가야문화권의 야철지였던 창원의 지역성과 역사를 반영하고, 여기에 문화의 바람을 일으킨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다. 김우태 시인이 지었다. 문화대장간 풀무 주변은 나무들이 둘러섰고, 벤치도 넉넉하고, 조각 작품도 있었다. 누구든 와서 쉴 수 있는 곳이다.
김우태 시인은 1964년 경남 남해 서면 남정리에서 태어났다. 1973년에 남해대교가 완공됐으니, 그가 어렸을 때 남해는 말 그대로 ‘섬’이었다. 전기도 초등학교 2학년 때 들어왔다. “배를 타고 부산에 오던 어릴 적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통통배, 기관 소리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배를 오후에 노량에서 타면 밤새 내해 바다를 달려 아침에 부산에 도착하는 배였습니다.” 그때는 멀고 험한 길이었다. “어린 저는 뱃멀미가 심했어요, 갑판에 올라가 멀미를 하다 지쳐 아예 누웠는데 밤하늘에 보름달이 환했답니다. 그때 물고기들이 뱃전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갔습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면서, 원무를 그리면서 날고 있는 날치였지요. 처음 보는 광경, 굉장한 원체험, 바다에 관한 신화적 체험이었지요.” 이야기가 실감나서 어두운 바다를 건너는 배를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날치는 늘 그렇게 날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훗날 시를 쓰는 소년을 위한 축제를 잠깐 보여주었던 것일까. 어쨌거나 부러운 경험이다. “저의 유년시절은 생애 최대의 풍경이었습니다. 고향의 집과 마을, 바다, 부모님, 지나가는 아이의 뒷모습만 봐도 누구 아들인지 알아보고 챙겨주던 마을어르신들…. 큰일은 다함께 치러내는 살아있는 공동체사회였지요. 지혜와 선의, 풍속과 인정이 넘쳐나면서 절제되어 있던 곳이고요.” 그는 유년기와 소년기를 돌아보며 ‘특별한 선물을 받은 시절’이라고 말했다. 그의 시에 바탕을 이루어준 자산이었을 것이다.
■세상과 사람을 담아내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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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갠 아침-
김우태 시집 / 시와반시 / 2017 |
김우태는 부산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이 되어 오월 광주의 비디오를 보았고, 사회과학 서적도 읽고, 문학동아리에서 시도 썼습니다. 모르고 살았던,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던 것을 알아가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그 세상을 향해 날선 목소리를 내는 문우들 사이에서 저의 시는 나약한 감성이라는 비판도 더러 받았지요.”
순박하고 우직한 시골 섬마을 청년 김우태는 그 시대를 자신의 속도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대학 4학년 때 ‘오월문학상’을 받았고, 졸업을 앞두고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문학청년으로서는 누구나 부러워할 결실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시인으로 김우태를 만나기는 힘들었다. 필자도 그게 가장 궁금했다. 첫 시집 ‘비 갠 아침’이 등단 30여년 만에 나온 까닭을 물었다. “시인으로서 준비가 덜 됐는데 너무 빨리 등단했다는 생각이 들어 도망친 거에요. 혼자서 괴로워한 시간이지요.”
시를 놓고 고심하기도 전에 그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많았다. ‘남해신문’ ‘시와생명’ ‘경남도보’를 창간하는 일부터 ‘남해사투리사전’ 발간, ‘경상남도사’ 전10권 발간, 인류의 보건과 위생을 향상시키는 목적으로 활동하는 세계화장실협회, 현재의 직무 등. 그는 늘 일을 하느라 바빴다. ‘경상남도사’는 전 10권의 목차만 봐도 입이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작업이었다. 누군가는 시인으로서 시집을 내는 일이 더 중요했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김우태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시와 한발자국 떨어져있었다 해도 세상의 일에 가까이 닿아있었으니, 그 모든 일은 시인의 몫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향한 예리한 시선, 그 세상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김우태의 시는 사람과 땅, 바다에서 태어났다. 등단 이후 써 온 시들을 묶은 시집에서 시 ‘차표를 끊어드리고’의 일부를 읽어보자.
‘밭 매는가 싶으면 마늘종 뽑고 / 나무 하는 가 싶으면 / 어느새 저녁 다 지어 놓으시더니// 손발이 너무 빨라 / 늙기도 저리 빠르셨나!// (중략) 어쩌다 아들 딸네 집 / 두루 사나흘 묵을 양으로 / 큰맘 잡수시고 나선 걸음이련만 // 빈 집에 쫄쫄 굶고 있을 / 강생이 얌생이가 자꾸 눈에 밟힌다고 / 이틀도 못 넘기고 휭 가버리시는 // 늙어서도 그 발길 도무지 따라 못 잡을 /날래디 날랜 / 저 깨꽃차림 뒷모습!”
정류장이나 차표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지만,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어머니를 배웅하는 아들이 보인다. 가난한 시절, 힘든 살림을 알뜰하게 거두어 온 어머니를 가진 모든 아들이 가슴 뭉클해질 것 같다. 지난 시절의 세상과 사람이 이 시에 담겨 있다.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이 시를 읽는 방법도 각별하다. 남해읍 사거리 버스정류장 앞 화장품 가게에 이 시가 붙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어머니들, 아들들이 이 시를 읽는다. 김우태 시인은 얼마 전 친구에게서 이런 소식도 전해 들었다. “밀양아리랑 전통시장에 김우태 시 ‘차표를 끊어드리고’가 붙어있더라!” 시집이 팔린다는 소식만큼 기분 좋은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