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 트로트’에 빠진 중장년층
- 유례없이 열정적인 팬덤 형성
- 음원 아닌 앨범 사고 공연 관람
- 사는데 바빠 닫았던 지갑 열어
- 소문에 쉽게 등돌리지 않고
- ‘조공’ 대신 사회적 선행 중시
- 스타 챙기고 배려하는 모습 등
- 아이돌 팬덤과는 사뭇 달라
코로나 시국이 파생시킨 음악 콘텐츠의 부상은 중장년층을 사로잡은 방구석 트로트 팬덤층을 탄생시켰다. 음원을 소비하는 MZ세대와 달리 음악을 소장하는 아날로그 실버 팬덤은 그동안 먹고 사느라 바빠 잊고 지낸 그 시절 추억을 소환하며 기꺼이 중장년층의 지갑을 열게 했다. 무엇보다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고 힐링하는 데 음악을 대체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국내 트로트 팬덤의 최상위에 등극한 임영웅 영탁 김호중의 팬덤은 연일 새로운 기록을 깨며 중장년층 팬덤 문화를 만들고 네오 패밀리즘(신가족주의) 팬덤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새 영역으로 확장하는 김호중
지난달 26일. 지난 몇 년 동안 한산했던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야외극장 4000석은 발 디딜 틈 없는 인파로 꽉 들어찼다. 백발의 81세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가 가수 김호중과 함께 ‘그리운 금강산’ ‘마이웨이’를 열창하자 엄청난 박수가 쏟아져나왔다. 트로트와 성악의 콜라보레이션. 김호중은 올해 6월 군 복무 소집 해제와 더불어 세계적 클래식 거장과 성공적인 복귀 무대를 보여준 뒤 이루마, 안드레아 보첼리와 협연을 지속하며 바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김호중 소속사는 기존 트로트 가수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아이디어로 팬덤 서비스를 강화하는 전략을 쓰고 있는데, ‘스타웨이 김호중’이라는 모바일 게임도 곧 출시한다. 게임 콘텐츠의 주인공이 됐다는 것만으로도 대중적 팬덤 파워를 체감할 수 있다. 팬클럽 회원이 13만 명에 이르는 김호중의 팬덤은 ▷중년 남성팬이 많다는 점 ▷부부팬과 클래식 팬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김호중은 오는 27일 두 번째 클래식 정규앨범 ‘Panorama’ 발매를 앞두고 있으며 방송 활동도 이어갈 예정으로,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58세대 팬층의 탄탄한 지지를 받고 있다.
 |
| TV 조선 ‘미스터 트롯’을 통해 트로트 열풍을 일으킨 주역 가수들의 활동이 최근 다시 열기를 몰고오면서 ‘팬덤 진화’ ‘공연 문화 발전’ ‘선한 영향력 확산’ 등 다채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영탁 팬클럽 ‘산탁클로스’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연탄 배달 봉사 활동을 하는 모습. 장은진 제공 |
■복귀하며 팬덤 파워 입증한 영탁
영탁은 지난 4일 17년 만의 첫 정규앨범 타이틀곡 ‘신사답게’로 컴백했다. 앨범 발매 일주일 뒤 집계되는 한터차트 초동판매 기록은 52만4000장. 대한민국 솔로 가수 5위이자 단일 앨범으로는 41위, 트로트 가수 중엔 지난 5월 컴백한 임영웅과 53만 장의 기록을 가진 김호중에 이어 역대 3위다. 웬만한 아이돌 그룹도 넘기 힘들다는 더블 플래티넘(50만 장)을 기록했다.
그런가 하면 영탁의 전국투어 ‘탁쇼(Tak Show)’는 서울-인천-대구 공연 티켓 오픈 즉시 매진 행렬이다. 5만7000여 명 팬클럽 회원 수와 47만 명이라는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 아이돌 그룹 컴백에 밀리지 않는 놀라운 음반 판매량과 티켓 파워를 보여준 영탁은 지난해 여러 힘든 일을 겪었다. 그런 그의 복귀를 기다리고 지지해준 30~50대 여성 팬덤의 변함없는 충성도를 짐작할 수 있다.
■공모전 열고 숲과 공간 만든 팬들
영탁의 팬클럽 중 기부 문화 확산에 힘써 온 ‘산탁클로스’는 영탁 컴백과 정규 앨범 발매 축하 이벤트를 기획했다. 전국 청년예술인을 대상으로 그들의 꿈을 지원하는 커버송 & 댄스 챌린지 프로젝트다. 2005년 데뷔한 뒤 17년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싱글 앨범과 음원을 발표하며 가수의 길을 걸어온 영탁처럼, 뮤지션을 꿈꾸는 예술인의 음악 활동을 지원하기로 결심한 팬들은 전국의 뮤지션, 댄서, 공연예술인에게 6000장의 영탁 앨범을 증정한 뒤 총상금 1500만 원을 내걸고 커버 댄스, 커버 송 창작 대회를 열었다.
오는 25일까지 참가자 접수를 하는데 응모 영상들을 보면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틱톡과 유튜브를 통해 숏폼 콘텐츠를 활용하고 즐기는 트로트 밈(Meme) 세대의 확산, 이를 향유하는 ‘크리에이티브 유저 팬덤 4.0세대’의 트렌드를 체감할 수 있다.
이러한 중장년층 팬덤의 폭발적 성장을 배경으로 기획된 KBS 예능프로그램 ‘주접이 풍년’에서는 영탁의 팬들이 기금을 기부해 시민 휴식공간으로 가꾼 서울 광나루 한강공원 ‘영탁 숲’을 소개했다. 팬들도 자기만족으로 끝나는 고가의 선물과 ‘조공’ 문화를 지양하고 스타의 의지를 이어받는 선행의 선순환이고 선한 영향력이다. 영탁의 고향인 경북 안동의 폐교 공간에 들어선 ‘영탁 하우스 캠프’는 팬들이 직접 임대하고 공간을 꾸며서 방문하는 이들에게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를 홍보하는 창의적 문화콘텐츠 활용 사례다.
■불꽃, 트로트 실버 팬덤
 |
| TV 조선 ‘미스터 트롯’을 통해 트로트 열풍을 일으킨 주역 가수들. 국제신문 DB |
이렇듯 팬들은 사랑하는 가수의 음악적 영향력이 확산되기를 바라며 아무 대가 없이 자신의 시간과 애정, 경제적 자산을 아낌없이 투자한다. 이들이 과거 아이돌 팬덤에서 보여준 맹목적인 애정 공세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문화인류학적 시각에서 분석해보면 중장년층 팬덤 문화는 다음과 같은 차별점을 갖는다.
바로 가족 문화를 중요시하는 한국적 정서가 반영된 팬덤 문화다. 한국인은 밥은 먹었냐, 언제 밥 한 번 먹자며 상대의 안위를 걱정하는 정 문화를 가지고 있다. 애정의 대상을 챙기고 배려하는 문화는 중장년층의 팬덤 문화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고가의 선물 대신 직접 담근 팔도의 김치나 음식을 택배로 보내주고 직접 만든 굿즈를 선물하거나, 스타의 건강을 내 자식처럼 걱정하며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스타와 나를 동일시한다.
중장년의 트로트 팬덤은 일시적이거나 충동적인 애정 표현이 아닌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한국의 묵은지 사랑이고 한국의 장맛이다. 이들은 실망했다고 ‘탈덕’하는 대신 어미새처럼 지켜보며 둥지를 날아갈 때까지 스타의 성장을 응원한다. 이러한 중년 여성 팬덤의 대다수가 혈연 대신 관계에 중심을 두는 신가족주의 개념에서 팬덤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트로트 팬덤의 폭발적 성장 배경에는 서양 문화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정의 문화라는 기반이 있다.
■집단지성과 지혜 발휘
우려의 시선 또한 있다. 아이돌, K-POP 가수 발굴 프로그램과 트로트 인재 발굴 프로그램 경연과정에서 시청자 투표 참여율이 높아지며 세대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아이돌 팬덤 응원방식이 트로트 팬덤으로 그대로 유입되는 현상이 빚어진다. 인기 트로트 팬덤의 경우도 과도한 투표 경쟁이 뒤따르고, 아이돌 팬덤의 응원 스케줄인 생일·데뷔일·음반 발매 이벤트 루트를 그대로 표방한다. 사생팬도 생겨나고 응원 방식을 놓고 팬들 간 반목과 갈등도 발생한다.
그러나 높은 연령층과 다양한 사회 경험을 가진 전문직종 팬이 많다 보니 갈등과 문제가 생겨도 집단지성을 발휘해 현명하게 잘 해결해나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런 점이 어쩌면 중장년층 팬덤의 가장 큰 무기가 아닐까. 내 스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며 현명한 선택을 하고 기부와 선행을 실천하는 데서 더 유연하다는 것이다.
연대하고 소통하며, 양육의 팬덤을 넘어, 창작의 단계를 넘어, 팬과 스타는 하나의 역사를 같이 써 내려간다. ‘팬덤 4.0시대’로 접어든 중장년층 팬덤은 마치 초로의 신사 머리 위에 내려앉은 하얀 눈처럼 현명하고 지혜로운 삶의 경륜을 보여주며 따스하게 서로를 품는다. 지금 여기 트로트 팬덤은 정이라는 한국 정서로 단단하게 봉합되어 엄청난 응집력을 보이며 진화해간다. 장성한 아들, 막내 동생 같은 그들을 보며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아버지 엄마 누나 같은 따뜻한 한국적 팬덤 정서는 앞으로 또 어떤 놀라운 역사를 쓸까.
지금 대한민국 트로트 팬덤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불타 오르고 있다. 인생 종착역에 다다르면서 마주친 마지막 선물 같은 즐거움을 공유하며 팬과 스타가 동반 성장하는 그 불타는 연대기를 함께 써 내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