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산’의 개봉으로 임진왜란의 역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임진왜란이 처음으로 발발하고,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바로 부산이다. 1592년 4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끈 선봉대가 부산을 침략했다. 일본군은 우암동 부근에 상륙한 뒤 곧바로 부산진성을 공격했다. 정발 첨사를 위시한 군민은 맞서 싸웠지만 성은 함락되었고 대부분 전사했다. 다음날 부산진성을 출발해 동래성에 도착한 일본군은 부대를 3개로 나누어 성을 포위하고 협상을 시도했다. 일본군은 ‘싸우려면 싸우되, 싸우지 않겠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라고 쓴 패목(牌木)을 세웠다. 결사항전을 준비하던 송상현 동래부사는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응수했다. 이후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지만 중과부적, 적을 당해내지 못했다. 동래성은 초토화되고 송상현 부사와 많은 군민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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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읍성에서 출토된 찰갑. 부산박물관 제공 |
이날의 처참한 동래성의 모습은 2005년경 동래읍성의 해자(垓字) 발굴을 통해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해자는 성 주위를 따라서 파놓은 물길이다. 아마도 생존자는 서둘러 동래성을 복구하면서 시신들과 각종 무기 등을 이 해자에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수백 년이 지나서 참혹했던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드러났다. 해자에서 발견된 상당수의 인골에서 칼에 머리를 베이거나 총과 화살 등에 맞아서 생긴 상흔이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유물로 조선군이 입었던 철제 찰갑(札甲)이 있다. 찰갑은 쇳조각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든 갑옷이다. 400여년이 지나도록 진흙 속에 묻혀있는 바람에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출토되었다. 갑옷 안에 인골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시신이 입은 상태로 버려진 것은 아니다. 겉과 속이 뒤집힌 채로 갑옷만 일부러 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찰갑은 작은 미늘을 가죽끈으로 엮어 몸통 부위를 만들었다. 양어깨와 위팔을 보호하기 위하여 상박갑(上膊甲)과 연결하였다. 이 찰갑을 복원해보니 1000여 점의 작은 철제 미늘이 소요되었고, 완성되었을 때 중량이 약 8㎏정도나 되었다.
‘세종실록’에는 쇠미늘에 수은을 칠하고 붉은 가죽끈으로 엮은 수은갑(水銀甲), 그을린 사슴가죽을 사용한 검은 유엽갑(柳葉甲) 등 조선 전기의 갑옷 6종류가 기록되어 있다. 동래읍성 해자 출토 찰갑은 재질과 형태, 그리고 미늘 표면에 주석 성분이 확인되었으므로 수은갑의 일종으로 보인다. 그런데 잘 만들어지고 훼손되지 않은 찰갑이 버려진 연유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전쟁 중 도망간 장수의 갑옷을 후일 살아남은 자들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전후 복구 과정에서 죽은 자의 진혼을 위해 해자에 갑옷을 던졌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