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 탄광서 살아 돌아온 아버지
- 처절한 경험과 작가 상상력 결합
- 1930년~1950년 혼돈의 역사 속
- 조국과 가족 지켜낸 ‘청춘서사’
- “아픈 역사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 무거운 주제의 글도 계속 써야”
올해는 광복 77주년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은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일본은 제대로 사죄 하지 않고 있다. 그 후안무치에 치가 떨린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광복절 즈음에야 그런 생각을 할 뿐 어쩌면 우리도 점차 잊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려워진다. 그런 생각으로 한상식 작가의 어린이 역사소설 ‘조국에 핀 도라지꽃’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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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양산의 한 공원에서 ‘조국에 핀 도라지꽃’ 한상식 작가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조국을 지켜낸 소년 소녀의 이야기다. 작가는 어려서부터 일본으로 강제 징용당한 아버지로부터 세세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작가 특유의 상상력으로 집필한 작품이다. 책 속 내용도 궁금하지만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던 작가 아버지의 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지난 15일 광복절에 경남 양산시에서 한상식 작가를 만났다.
■징용 끌려간 아버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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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에 핀 도라지꽃- 한상식 지음/ 가문비어린이/ 2021 |
부산도시철도 2호선을 타고 양산역에 도착했다.양산역 주변 도로에는 태극기가 펄럭였다. 역 뒤편으로 이어진 공원 입구에 큰 모래 조각상이 있었는데 인어 물고기 해초 소라껍질을 표현해 시원한 바다를 떠올리게 했다. 한 작가는 이 모래 조각상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몸이 불편한 작가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한상식은 1975년 양산에서 태어났다. 200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구상솟대문학상 본상을 받았다. 단편 동화집 ‘엄마의 얼굴’ ‘등 굽은 나무’, 장편동화 ‘타이중의 메아리, 조명하’ ‘조국에 핀 도라지꽃’을 냈다. 시흥문학상,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순리원아동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조국에 핀 도라지꽃’에 담겨 있을 작가 아버지(한순이 씨) 이야기가 궁금해서 그것부터 질문했다.
“아버지는 19살에 일본 홋카이도로 끌려가 29살까지 있었습니다.” 작가가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시작됐다. “10명이 한 방에서 잤는데, 3교대로 노역을 했으니 사실은 그 방에 30명이 번갈아 가며 잠을 잤답니다. 일은 힘들고 관리하는 일본 야쿠자에게 갈고리를 단 채찍으로 수시로 맞고…. 얼굴 낯선 신입이 숙소에 들어오면 ‘또 누가 죽었구나’하고 여겼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겪은 끔찍한 일을 처음에는 썼는데, 책을 만들면서 빼거나 조금 순화시키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읽기에는 너무 잔인한 장면이라는 판단에서였죠. 그러다 보니 처음 썼던 분량보다 좀 줄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아이들에게 전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라니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식민지 조선의 사내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아버지는 29살 때 무사히 귀국을 했습니다. 배에서 내려 부산 초량의 땅을 밟았을 때 본 광경을 말씀해주셨죠. 함께 귀국한 사람들은 땅에 엎드려 통곡하고, 흙을 쓰다듬다가 입을 맞추고 땅에 얼굴을 부볐다고 해요. 지옥에서 고국으로 돌아왔으니까요. 거리를 걸으면서 보니까 나이 들고 지친 사람들만 있고, 젊은 여자는 보기 힘들었답니다. 아기를 막 낳은 여자들도 마구잡이로 위안부로 끌고 갔는지, 어린아이들과 나이 든 여자들만 간혹 보였고요. 대부분 맨발로, 신발을 제대로 신은 사람도 없었고요. 아버지는 ‘젊은 사람이 없더라’고 말씀하셨죠. 사람은 물론 숟가락, 방문 문고리까지 이 땅의 모든 것을 일본이 쥐어짜다시피 싹 다 쓸어 가버린 겁니다.” 사람이 없더라는 말에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는 거리를 걷다가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이 조선인들에게 맞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제가 ‘아버지도 가서 한 대 때리지 그랬어요’ 하니까, 마음은 분노로 들끓는데 홋카이도에 있을 때 짐승 취급 당하면서 마구 맞던 게 떠올라 일본인을 때리는 게 두려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겨우 자리를 잡고 살아보려 하는 데 다시 6·25전쟁이 터졌지요. 강제징용에서 겨우 살아온 남자들은 이번에는 군인으로, 학도병으로 전쟁에 나갔다고 합니다.”
그 일들을 어떻게 다 견뎌낸 것일까.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고 다시 일어선 세대에 우리는 큰 빚을 지고 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
‘조국에 핀 도라지꽃’은 1930년대 후반부터 1950년 중반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진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노비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라를 위해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떠난다. 그의 형 석이도 광복군이 될 계획으로 집을 떠난다. 하지만 진이는 친구 희도와 함께 일본에 속아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죽을 고생을 한다. 광복이 되면서 가족이 집으로 겨우 돌아왔지만, 위안부로 끌려갔던 누나 혜이는 자결을 하고 만다.
나라는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진이는 희도와 함께 학도의용군에 입대하고 전쟁터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친다. 진이 어머니는 한 명씩 집을 떠날 때마다 백도라지 씨앗을 손에 쥐여 준다. 심심산천에 핀 백도라지는 우리 민족의 꽃이다. 어머니는 뿔뿔이 흩어지는 식구들이 부디 조국과 가족을 기억하고 도라지꽃을 보며 힘을 얻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책은 아이들의 삶조차 평범할 수 없었던 그 시절을 온몸으로 살아낸 소년 소녀들을 생각하게 한다.
“아리랑 다음으로 우리 민족이 많이 불렀던 노래가 ‘도라지 타령’이잖아요.”
한상식 작가의 말에서 도라지꽃을 작품에 담은 마음이 짐작됐다. 그는 또 말했다. “아이들이 재미를 내세운 책만 읽고, 그런 것만 찾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무거운 주제를 담은 글을 계속 쓸 겁니다. 또다시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지요.”
그는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이 작품의 배경인 역사 현장을 직접 가서 보았다. 그곳에서 한참 앉아 옛사람들이 건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들이 들려주었던 말은 과거가 아니다. 아직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한 우리의 현재이고, 아직도 갈라진 조국의 현실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한상식 작가가 앞으로 쓸 작품은 그의 말처럼 무거울 것이다. 그래서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