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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의 부산 가요 이야기] <55> 문주란 드라마 같은 데뷔

중학생 필연(문주란의 본명)이 최희준·이미자와 첫 무대…차가운 저음, 객석 달궜다

  • 이동순 가요평론가
  •  |   입력 : 2022-08-28 19:03:33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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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때 부산MBC 노래경연
- 6주 연속 1등으로 전국적 화제
- 하숙집 불쑥 방문한 작사가 전우
- 주변 반대 불구 서울무대 올려

- 남진 등과 ‘박춘석 사단’서 활동
- 15살 데뷔 1700곡 이상 발표

‘뿌우우웅 뿌우우웅’.

가수 데뷔 시절의 문주란.
비 오는 날 듣는 항구의 뱃고동 소리는 처연하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압도할 듯 기운차게 날아가다가 소리의 후반부에선 무언가를 간절하게 하소연하는 듯 쓸쓸하게 떨리는 여운으로 갑자기 풀 죽은 꼴이 되어 터벅터벅 뒤따른다. 뱃전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고동 소리는 항구의 구석구석을 가득 채우고 가까운 동네로, 거리로 파도처럼 철썩이며 나아간다. 항구 맞은편 천마산 장군산 진정산 기슭까지 날아가 그 산을 기어이 넘지 못한 채 기력이 현저히 약해지고 드디어 물거품처럼 덧없이 소멸된다. 뱃고동 소리를 들으면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강박이 마음에서 똬리를 튼다. 일생을 떠돌이 배가본드로 살아온 고독한 마도로스의 운명도 연상된다. 그의 파노라마 같은 삶이 스크린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뱃고동 소리의 정신적 고향은 센티멘탈리즘이다. 원래 제 자리에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던 것들을 부추겨 유랑의 기류로 엉덩이를 들썩이게 한다. 어느 낯선 항구의 질척이는 거리, 뒷골목, 취객의 노래가 밤 깊도록 들리는 곳, 소금기를 머금은 끈끈한 해풍이 불어오는 그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한숨짓는 여인… .

항구를 떠나는 배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는 대개 세 차례 울린다. 첫 소리는 잘 있으라는 작별의 뜻이다. 두 번째는 잘 다녀오라는 안녕의 기원이다. 세 번째는 재회를 약속하는 다짐이다.

뱃고동 소리의 애상은 대중가요로도 흘러 들어 절묘한 배합으로 빚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최정자 박노식 문희옥 금소연 하윤주 등이 이 테마로 줄기차게 노래를 발표했다.

하지만 목소리 자체로만 온통 항구의 뱃고동 소리와 그 실루엣으로 넘실대는 가수가 있다. 문주란(文珠蘭). 그는 1951년 6·25 전쟁 중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는 항구도시 부산 서면에서 태어난 부산 토박이다. 본명은 문필연(文畢連). 부친은 운수업에 종사했고, 딸만 넷 낳았는데 그 막내다. 부친은 아들을 몹시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필연’이란 이름에도 딸을 그만 낳겠다는 뜻이 들어있다. 어머니는 새로 아기를 가졌으나 남편의 폭력으로 탈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 문필연은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이후 두 계모를 어머니라 부르며 자랐다. 어린 가슴에 한이 맺혀 마음에 맞지 않는 집안을 언제나 바람처럼 떠나고 싶었다. 그 때마다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어느 날 유랑극단 공연을 본 뒤로 필연의 가슴 속은 분홍색 환상으로 젖어 들었다. 자신도 단원이 되어 멀리멀리 바람처럼 떠돌아다니는 꿈이었다. 실제로 유랑극단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곧 완고한 부친에게 붙들려 되돌아왔다.

부친의 사업은 기울었고, 가세는 점점 힘들어졌다. 중학교 다닐 때 소풍 가서 펼쳐지는 장기자랑에서 진행은 언제나 필연이 도맡았다. 그만큼 신명이 많았고, 특히 노래를 잘 불렀다. 어느 날 부산 MBC에서 진행하는 가요경연대회에 친구들이 필연 몰래 출전신청을 했다. 떼밀려서 무대에 올라간 그녀는 이탈리아 깐조네 ‘라노비아’를 불렀다. 그로부터 6주 연속 1등을 하면서 여중생 필연의 존재는 사람들의 화제에 오르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가을, 서울의 성만여상으로 전학을 가서 학교 부근에 하숙을 정했다. 어느 날 필연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작사가 전우(田友)가 불쑥 찾아왔다. 당시 그는 서울에서 ‘아리랑’이라는 대중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다.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리는 잡지 ‘아리랑’이 주최하는 큰 행사에 출연해야 한다며 다짜고짜 필연을 끌고 갔다. 전우는 최희준 이미자 박재란 등 일류가수가 출연하는 무대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인 문필연을 억지로 세웠다. 당시 진행자 송해는 전우의 요청을 거부했으나 막무가내로 출연진에 집어넣었다.

독집 앨범 ‘공항의 이별’.
필연은 차분히 마이크 앞에 나아가 성재희의 노래 ‘보슬비 오는 거리’를 불렀다. 그것도 원곡보다 한 키 낮춰서 가창했다. 처음엔 두근거리던 가슴이 노래를 부르면서 차분히 가라앉았다. 노래를 마치자 객석은 마치 난리가 난 듯 열광했다. 대기실로 갔는데 거기엔 문필연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지구레코드사 임종수 사장, 작곡가 백영호, 다른 작곡가들, 방송국 PD 등이 몰려서 집중적인 질문 공세를 속사포로 퍼부었다. ‘언제부터 노래했냐’ ‘누구한테 노래를 배웠냐’ ‘사는 곳은 어디냐’ ‘나이는 몇 살이냐’ 등등 완전히 청문회 분위기였다. 이런 과정으로 결국 지구레코드 전속 가수가 됐고 이후 백영호가 필연의 활동을 전담했다. 작사가 전우는 필연의 이름을 제주도에 자생하는 천연기념물 문주란으로 하자고 했다. 가수 문주란의 탄생 과정은 이렇다.

문주란은 아예 숙소를 작곡가 백영호의 집 부근으로 옮기고, 늘 그의 작업실에서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 연습을 했다. ‘저음 가수’ ‘어른의 목소리를 내는 아이’ ‘남자 노인의 목소리를 내는 소녀’ 등등 여러 별명을 지닌 소녀 문주란은 이렇게 당당한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어떤 연고로 작곡가 박춘석의 문하생으로 옮겨가게 됐고, 여기서 박춘석 사단(패티김 이미자 남진 문주란)의 한 사람으로 거듭 태어난다. 발표곡은 1966년 데뷔곡 ‘동숙의 노래’(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이후 1700여 곡 정도로 추정한다.

문주란은 옛 가수의 노래를 리메이크하거나 리바이벌하는 방식으로 다수의 앨범을 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모든 노래를 온전히 자기 특유의 감각과 리듬으로 완벽하게 소화를 시켰다는 사실이다. 그 저력과 바탕에는 부산항 뱃고동 소리가 주는 여운과 울림이 있다. 특히 ‘백치 아다다’ ‘술아 술아’ ‘보슬비 오는 거리’ 등을 들어보면 얼마나 완벽한 가창력인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뱃고동 소리의 여운과 효과를 실감시켜주는 노래로는 대개 이별 고향 고독 눈물 추억 테마의 작품들이다. 공간적 배경으로는 항구 공항 섬 타국 여행 등이 떠오른다.

‘공항의 이별’ ‘공항에 부는 바람’ ‘공항 대합실’ ‘잘 있거라 공항이여’ ‘눈물의 북송선’ ‘나그네 여인’ ‘술아 술아’ ‘돌지 않는 풍차’ ‘외로운 그림자’ ‘떠나렵니다’ ‘동숙의 노래’ ‘썰물’ ‘낙조’ ‘꿈길 나그네’ ‘잃어버린 세월’ ‘고향 언니’ ‘내 손 잡아주’ ‘밤안개 거리’ ‘타국에서’ ‘추억 속에 혼자 걸었네’ ‘추억 그리고 눈물’ ‘먼 여로’ ‘다시 한번 안녕’ ‘떠나는 마음’ 등이다.

비 오는 날, 혼자 있는 시간, 커피 한잔을 즐기는 호젓한 시간에 가수 문주란의 노래를 들어보시라. 우리가 잃어버린 아득한 옛날의 기억을 들려주며 가슴 속 상처를 따뜻한 손바닥으로 다정하게 쓰다듬는 가수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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