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년 경북 칠곡 시골마을 출생
- 주경야독하며 64세 늦깎이 등단
- 어릴 적 농사 경험 훌륭한 글감
- 진해웅천 농장 오가며 수필 완성
- 시든 꽃과 나무 곧잘 가꾸는 제주
- 아파트 이웃엔 ‘화분 아저씨’ 통해
- 수필로 부모님·친구 등 추억 소환
책을 읽으면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게 되고, 상상하게 되고, 비록 간접적이지만 새로운 경험을 맛보게 된다. 어떤 책은 추억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박노욱 작가의 수필집 ‘어머니의 배신’은 어릴 적에 살았던 시골마을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재미있게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수필집은 박노욱 작가가 시골에 텃밭을 만들고 농사를 지으며 쓴 글을 묶은 책이다. 흙을 만지면서, 씨앗을 심고 키우고 거두면서, 농막에 홀로 잠들면서, 그는 시시때때로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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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욱 작가가 경남 진해 웅천골에 텃밭을 만들고 농사를 지으며 쓴 글을 묶은 책 ‘어머니의 배신’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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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가는 길에 논두렁을 지나며 벼꽃 냄새 맡은 장면을 쓴 글 한 대목을 보자. “벼꽃을 볼 때만은 배가 불렀다. 가을 황금들판을 보고도 부르지 않던 배였다.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 먹고 가을에 햅쌀로 갚는 장리(長利)는 꾼 곡식에 절반이나 되는 이자를 얹어 주어야 했다. 색갈이를 하는 부잣집들이 고리대금업자였다. 여름 내내 뙤약볕 아래 힘들게 농사일을 했던 부모님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민다.”
‘색갈이’가 무슨 뜻인지 사전을 찾아보았다. ‘봄에 묵은 곡식을 꾸어주었다가 가을에 비싼 길미를 붙여서 햇곡식으로 받는 일’이란다. ‘길미’는 이자라는 뜻이겠지 짐작한다. 시골집 옆에 논이 있었지만, 필자는 벼꽃을 보지 못했다. 부지런한 농부의 눈에만 보인다는 귀한 꽃이다. 벼꽃 냄새를 맡으며, 기억 속 고향으로 달려가 부모님을 만나는 저자가 보인다. 문장 속에 박힌 우리말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박노욱 작가를 경남 진해 웅천골에서 만났다.
■화분 돌보는 아저씨
박노욱 작가는 1956년 경북 칠곡 이언마을에서 태어났다. 2019년에 ‘문학도시’ 수필로 등단했다. 등단은 늦었지만, 그는 그 이전에 국내 일간지에 600여 편의 글을 실었다. 한국전력에서 근무하는 25년 동안 그는 전기 관련 글을 300여 편, 나머지 절반은 세상사는 이야기를 썼다. 홍보실에서 정식으로 홍보업무를 맡으라는 요청이 있을 정도였다.
부산 동래 지하철역에서 작가의 차를 타고 진해로 이동했다. 만나자마자 “아파트에서 ‘화분 돌보는 아저씨’로 통하시는데, 너무 힘들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책에서 수필 ‘숨’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었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그는 아파트 화단을 자청해서 돌보았고, 시들어가는 화분을 들고 온 입주민들의 고민을 들어주었다. 죽어가는 화분을 살리는 사람이 있는데, 박노욱이 그런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입주민 한 둘이 오더니 슬슬 화분이 모여들었다. 화원에 보내야 할 큰 화분들까지 오는 지경이었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발령이 나면, 화분이 걱정됐어요. 이전 지점에서 화분이 말라 간다는 연락이 오기도 하고, 업무 때문에 갈 일이 생기면 함께 일했던 직원들보다 화분을 먼저 챙겨 봤지요. 군에 입대해서 논산훈련소에 있을 때 훈련 중 쉬는 시간 10분 동안 화단에 물을 줬지요.” 이쯤 되면 아무도 못 말리는 거다.
이야기 하는 사이에 웅천골 텃밭에 도착했다. 농막 앞에 있는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친구들이 ‘눌언농장’이라고 이름을 붙여줬어요, 공자의 말씀 중에 ‘눌언만행’이 있습니다. 말은 조심하고 행동은 바르게 하는 것인데, 말솜씨가 없는 저를 친구들이 잘 봐 준거지요. 20년 전부터 텃밭 준비를 했고, 2016년에 퇴직한 이후부터는 한 주일의 절반은 이곳에서 보냅니다. 낮에는 농사일 하고, 밤에는 글 쓰고요. 주경야독이지요. 수필집도 이 곳에서 썼습니다.”
■흙에서 캐낸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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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배신-
박노욱 수필집 / 해암 / 2022 |
박노욱 작가는 아버지가 농사짓는 걸 보고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아버지, 삼촌과 함께 못자리 볍씨를 뿌렸는데, 제가 한 것이 더 가지런했어요. 이웃집 볍씨 뿌리는 날에 일꾼으로 뽑혀가기도 했죠. 학교도 빼먹고요. 어른들께 농사꾼 재능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요.” 그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마음껏 흙을 만지고 싶을 것이다. “식탁에 오르는 채소는 이 텃밭에서 길러 먹어요. 고추 배추 수확해서 김장도 담그죠. 힘들어도 재미있습니다.” 조경기능사 원예기능사 산림기능사 자연생태복원기사 자격증 등 농사일에 필요한 자격증 농사도 지었다.
수필 ‘여백’에서는 부지런한 농사꾼의 모습이 보인다. “농사일은 철따라 순서가 있다. 봄에는 여러 가지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는다. 고추를 비롯하여 가지 오이 토마토는 기본이다. 약효를 경험한 작두콩과 쥐눈이콩을 빠트리는 일은 없다. 유월에 마늘과 양파를 수확한 자리에는 참깨씨앗을 넣고 가을을 기다린다. 참깨를 털고 나면 김장 무와 배추씨앗을 뿌리는데 처서를 넘기면 수확량을 보장할 수 없어 서둘러야 한다.” 이렇게 일을 하다가 고향마을, 부모님, 친구와 동료들, 옛 추억과 만나는 것이다.
‘어머니의 배신’이라는 글에서는 돌아가신 작가 어머니의 곧은 성품이 느껴진다. 말년에 거동이 불편하고 정신이 맑지 않은 어머니를 좀 더 편안하게 모시려고 장애등급을 받으려 했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장애판정기관에서 직원이 나왔을 때 누워있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사마 개안타. 나보다 더 아픈 늘그이들이 만타카이”라며 손사래를 친 것이다. 어머니의 성품을 알고는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어머니의 배신이었다.
흙은 식물을 키우면서, 작가의 마음도 키웠다. 흙에서 캐낸 마음은 글로 기록됐다. 박노욱의 텃밭에서 난 수확물만큼 그의 수필은 더없이 싱싱하고 푸르다. 그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혼자 노는 데는 글쓰기만 한 게 없다. 먼 길 떠난 부모님을 만날 수 있고, 소꿉친구들도 불러 모을 수 있다. 텃밭에서는 들짐승 산짐승들과 대화도 한다. 지천에 저절로 자라는 잡초가 신기하고, 봄에 씨앗을 뿌리면 가을까지 친구가 되어주는 남새들도 고맙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건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