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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타계 30주기…새로 읽는 나림 명작] <7> ‘허드슨 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

뉴욕 생활 체험을 소설화…절망 속에서 핀 구원과 사랑 담아

  • 김주성 소설가
  •  |   입력 : 2022-11-06 19:36:45
  •  |   본지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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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운한 주인공·‘검은 천사’·귀인
- 두 여자와 할렘가서 기묘한 동거

- 찰나에 불과한 인간들의 부대낌
- 강물과 문답 방식으로 해법 찾아
- 사람이 소망할 것은 ‘사랑’ 강조
- ‘인생을 예술로 만들어야 ’조언도

작가 이병주(1921~1992)가 뉴욕 생활 체험을 소설로 형상화한 장편 ‘허드슨 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는 1982년 ‘국문’에서 처음 간행되었다. 이 작품은 3년 후인 1985년 ‘심지’에서 내용은 그대로인 채 제목만 ‘강물이 내 가슴을 쳐도’라고 바뀌어 재간행되었다.

1982년 간행본과 1985년 간행본의 차이라면, 1982년 간행본에서 1, 2, 3… 하는 식으로 장 구별을 했다면 1985년 간행본에서는 당시 최고 주가를 올리던 이병주 대중소설의 분위기를 십분 살려 ‘파라다이스 호텔로’, ‘어떤 로맨스’, ‘심야의 향연’, ‘장밋빛 정념으로’라는 식으로 멋을 부린 소제목을 달았다는 정도다.
허드슨 강변에서 바라본 용광로 같은 도시 뉴욕의 야경. 이병주의 ‘허드슨 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는 뉴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삶과 사랑과 예술 이야기다. 사진= David Mark from Pixabay
■ 할렘, 헬렌, 낸시 성

소설의 무대는 1960년대 초·중반, 허드슨 강변의 뉴욕 할렘가. 주인공 신상일은 사기꾼 김계택이란 자를 찾기 위해 이곳으로 온다. 전직 신문사 사회부장, 주간지 편집국장인 그는 서울에서 살던 집을 팔고 지인과 친척들로부터 끌어모은 거금을 사기꾼에게 몽땅 날린다. 아내가 화병으로 죽고 이 와중에 외동딸마저 폐렴으로 죽는다. 몇 번의 자살을 기도한 끝에 살아남은 신상일은 사기꾼을 넘어 가족의 원수인 김계택을 찾기 전에는 자신도 그곳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뉴욕행을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수중엔 한 달 기한의 비자가 찍힌 여권과 돌아갈 비행기 표, 연명이나 하면서 일주일 정도 버틸 돈밖에 없다.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세계 최대의 도시 뉴욕에서 그것도 초행인 그가 연기처럼 사라진 사기꾼을 찾기란 거의 절망에 가깝다. 낯설고 추잡하고 도처에 위험이 도사린 할렘가 한구석. 그러나 여기서 신상일은 거리의 흑인 창부 헬렌을 만나면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나간다. 그들이 만난 호텔 ‘파라다이스’라는 이름은 궁핍하다 못해 처참한 지경에서 피워내는 빛나는 사랑의 낙원을 역설적으로 담고 있다.

이야기는 신상일과 헬렌이 어떻게 서로 동화되고 사랑을 가꾸는지, 결국 찾아내지는 못하지만 서울로부터 이곳에 연결된 인맥의 도움으로 어떻게 그 사기꾼의 흔적을 알아내는지, 그 과정에서 또 한 여인 낸시 성(성옥진)과 만나 불꽃 같은 사랑을 나누고 기적의 선물을 얻게 되는지에 대한 사연들과 함께 빠른 템포로 전개된다.

여기에 작가 특유의 활달하고도 지적인 문장이 서사에 맛과 긴장을 더한다.

■ 강의 이야기를 들어라

이 소설에서 작가 이병주가 말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소설 제목 그대로 ‘허드슨 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다. 조금 달리 말하면 ‘허드슨 강이 말하는……’이다. ‘강변 이야기’는 위에 간추린 줄거리이고 정작 작가가 이 이야기에 담고 싶었던 내용은 바로 ‘허드슨 강이 말하는’ 그 무엇이다. 1982년 간행본 표지의 제목을 보면 ‘허드슨 강이 말하는’이란 구절은 보일 듯 말 듯 작고 희미한 글씨로, ‘강변 이야기’는 큰 글씨로 두드러지게 디자인돼 있어 ‘강변 이야기’가 먼저 한눈에 들어온다.

희미하게 감춘 듯하지만 ‘이야기’ 앞에 엄연히 내세운 ‘허드슨 강’에 대해 얘기해 보자.

절망의 나락에 빠진 신상일, 그를 구원하는 ‘천사’ 헬렌, 그에게 불꽃 같은 사랑과 더불어 거부(巨富)의 기적을 선사한 낸시 성. 이 세 사람이 기묘한 동거를 하게 되는 곳이 바로 창밖으로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엔젤’이란 아파트다. 신상일에게 헬렌이 구원의 천사라면 낸시 성은 동족으로서 고향처럼 그를 품고 행운을 안겨주는 귀인이다.

신상일이 겪는 그 숱한 우여곡절, 겹치는 불운들이 모두 이 두 여인으로 하여 보상받고 해소된다. 허드슨 강은 무한의 시공간 속에서 찰나에 불과한 인간 삶의 사연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궁극적으로 무엇이 인간에게 중요한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극빈의 생활 속에서 모처럼의 호사로 ‘동물원 이야기’라는 연극을 함께 보고 난 후 신상일은 ‘철저하게 인간을 멸시하기 위해 쓰인 작품’이라고 불쾌해한다. 그리고 ‘인간이란 백번 좌절할망정 보다 착한 것을 지향해야 하고 백번 실패하더라도 보다 아름다운 것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라며 ‘이런 쓰레기 같은 연극이 4년이나 연속 공연되고 있는 뉴욕이 두려워졌다’고 탄식한다.

이때 헬렌이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길거리의 여자로 타락했다고 해서 여자 전부가 타락한 건 아니잖아요. 동물원 이야기를 400년 계속 공연한다 해도 우리완 무관해요. 자아, 허드슨을 보세요!’

할렘 트레인 트랙 철교가 지나가는 뉴욕 풍경. 사진=E. Muhammad from Pixabay
■ 뉴욕을 긍정하는가

이후 신상일은 1609년 헨리 허드슨이란 사람이 맨해튼을 발견하고 1626년 페터 미노이트가 인디언으로부터 24달러에 사들인 이 맨해튼이 오늘의 거대 도시 뉴욕이 되었다는 역사를 상기하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절이 바뀌거나 변함없이 제 흐름을 이어가는 허드슨 강과 대화한다.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펼친 도시, 프리섹스와 마약과 차별과 위선, 듣도 보도 못한 신흥 종교의 광기에 찬 의식과 예술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갖가지 기행들이 뒤섞인 이 극단적인 세상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답을 듣는다.

신상일은 허드슨 강에 묻는다. ‘허드슨이여! 그 모든 것을 긍정하는가. 뉴욕을 긍정하는가.’ 허드슨은 답한다. ‘긍정한다. 그 선도 그 악도 마천루도 시궁창도 모두 긍정한다. 나는 수천 년을 이렇게 흐르고 있다 보니 드디어 허망을 알게 되었다. 허망은 부정의 터전이 아니라 무릇 긍정의 터전이다.’ 뉴욕, 그곳은 찰나에 불과한 인간들의 삶이 부대끼는 현장이다. 그 속에서 100년도 못 사는 인간들의 애증과 영욕에 뭐 그리 거창한 의미를 실어 부정하고 실망할 게 있는가. 무한한 자연의 눈으로 보자면 다 품어 안을 미물들인 것을. 허드슨 강에게 들은 이 답은 결국 신상일의 깨달음이요 작가 이병주의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작가 이병주는 허드슨 강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상일이 ‘그럼 사람은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가’ 하고 묻고 허드슨 강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이 원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가지, 사랑이다’라고 답한다. 이 작품은 검은 천사 헬렌과 정열의 여인 낸시 정이 보여주었듯이 바로 이 사랑의 곡진함, 그 순수한 열정, 위대함에 대한 기록이다.

■ 사랑과 예술

덧붙여 작가 이병주는 미물인 인간으로서 허드슨 강에 비견할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답한다. 그건 바로 예술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신상일은 자살한 낸시 성의 전 남편 알렉스 페드콕이 남긴 83점의 그림을 낸시 성으로부터 물려받는다.

생전에 무명이었던 페드콕의 그림은 한 점당 최소 50만 달러의 대작으로 평가받는다. 신상일은 일단 20점만을 처분하고 나머지는 보험을 들어 은행에 보관한다. 세월이 흐르면 그 가치가 얼마나 될지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상일이 메모장에 남긴 허드슨 강의 외침은 이러하다. ‘신상일! 너는 한 편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하지만 알렉스 페드콕의 생애는 인류의 역사에 합류된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들 즉 신상일, 헬렌, 낸시 성 모두 폐결핵으로 죽는다. 이렇게 등장 인물들이 모두 죽고 난 후 그 처절한 삶과 사랑, 기적의 이야기는 ‘이나림’이라는 작가가 기록하게 된다는 구성으로 말미가 장식되는데, 작가 이병주의 아호 ‘나림’을 소환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공동기획:국제신문·부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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