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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타계 30주기…새로 읽는 나림 명작] <8> ‘예낭풍물지’

권력에 좌지우지되는 사회…‘죽음’으로 내면적 저항 그리다

  • 이혜진 세명대 교수
  •  |   입력 : 2022-11-13 19:33:05
  •  |   본지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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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에 대죄’로 감옥살이 주인공
- 가정 붕괴·폐병에 삶 의지 상실
- 부산 유사한 항만도시 ‘예낭’서
- 생선 장사하는 노모에 얹혀살아

- 좌익아들 잃고 술중독된 인물 등
- 현대사 질곡 간직한 풍물들 마주
- 권력 앞에 무기력한 소시민 조명

- 가정 지탱하던 노모 세상 떠나자
- 그를 통해 모든 인간 평등 깨달아
- ‘죽음’ 받아들이며 존엄성 증명

이병주 소설에 입문하기 직전 독자는 으레 그의 자전적 스토리를 떠올리게 된다. 그의 소설들이 대체로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주인공들을 등장시켜왔기 때문이다. 이병주의 중편소설 ‘예낭풍물지’의 주인공 역시 1961년 필화를 입고 2년 7개월을 복역한 작가의 체험을 상기시킨다. 주인공 ‘안 씨’가 ‘국가에 대죄’를 지어 10년 형을 언도받고 5년 여의 세월을 감옥에서 살다 폐결핵 악화로 출소했다는 사정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필화사건을 겪었던 작가의 체험과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부산 중구 자갈치시장 친수공간에 세워진 자갈치 아지매 상. ‘예낭풍물지’에 나오는 ‘어머니’는 자갈치 시장 좌판에서 생선 장사를 하며, 좌절에 빠진 아들을 보살핀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의식으로서의 ‘예낭’

‘예낭풍물지’는 1972년 5월 ‘세대’에 처음 발표된 후 같은 해에 영문판으로도 출판되었고, 이후 1974년 10월 세대문고에서 단행본으로 재간행되었다. 1984년에는 맹만재 감독의 연출로 ‘TV 문학관’으로도 방영되었는데, 여기에는 당시의 스타였던 정운용, 안옥희, 연운경 등이 출연했다. 작품의 제목만 보면 ‘예낭’이라는 고장의 ‘풍물’을 보여줄 것이리라 기대해봄직 하지만, 사실 ‘예낭’은 실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작가가 창조한 공간이다.

하지만 독자는 “태평양을 남쪽으로 하고 동서로 뻗은 해안선을 기다랗게 점거하곤 북쪽산맥을 등진” 인구 200만의 항구도시인 ‘예낭’이 곧 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또한 필화사건 직전 이병주는 부산 ‘국제신보’(‘국제신문’의 전신)의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냈고 또 부산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소설 속의 ‘예낭’은 주인공에게 ‘실재 이상의 실재’적인 장소다. 감옥에서 추방당한 폐결핵 3기의 주인공 ‘안 씨’에게 ‘예낭’은 삶을 이어가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그저 ‘식물처럼’ 살면서 꿈을 꾸기 위한 곳이자 “내일의 기적을 위해서 오늘의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의식으로서의’ 공간이다. 따라서 생의 의지를 상실한 ‘안 씨’는 이제 ‘예낭’ 풍물의 기록자, 즉 ‘예낭’의 해부학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예낭’ 풍물과 산책자의 기록

자갈치 시장 생선 판매대. 이 소설에서 이병주는 생선에 관해 인상 깊게 묘사한다. 김성효 기자
출소 직후에 ‘안 씨’가 돌아온 ‘예낭’은 생선 도매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 치료를 하지 않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안 씨’에 반해 어머니는 매일같이 억척스럽게 생선을 팔러 시장에 나간다. 출소한지 두 해가 지났지만 35세의 병든 아들은 칠순 노모의 등에 업혀 살아가는 일을 멈추지 못하고 그저 매일 거리를 배회한다.

‘안 씨’가 살고 있는 곳은 ‘예낭’에서도 빈민굴에 해당하는 ‘도원동(桃源洞)’이다. 무릉도원을 뜻하는 이름의 마을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인과관계를 알 수 없는 슬픈 사정들을 감내하면서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 이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진 인생을 헤쳐가며 살아가는 도원동의 풍경은 ‘안 씨’에게 장엄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전쟁 때 흑인 병사들에게 아내가 성폭행당한 뒤 색정 도착증에 걸려버린 국제이발관 주인, 간첩 용의자의 라디오를 고쳐주었다가 혼쭐이 난 후 낯선 사람이 라디오 수리를 맡기러 오면 112에 신고부터 하는 버릇이 생긴 우주전파사 주인, 좌익운동을 하다 죽은 큰 아들과 국군으로 죽은 작은 아들에 대한 원한으로 하루 종일 술에 취해있는 세일백화점 주인, 서울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사형 당한 아들에 대한 원망으로 하루 종일 제세당약국 앞에 앉아있는 조 노인, 미군 병사와 결혼해 자식까지 낳았지만 여권이 나오지 않아 미국 간 남편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서양댁, 고등고시에 합격해서 검사가 되길 바랐던 아들이 중병에 걸려 화병이 난 전직 고등계 형사 최 노인, 직장 상사와 바람난 색시가 떠나버리자 정신분열증과 실어증에 걸린 장 청년 등 예낭 도원동의 풍물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전유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겨 한 되를 사기 위해 손바닥 위에 품삯을 헤아리는 지게꾼들과 아침마다 구두약 통을 메고 골목을 뛰어다니는 소년들, 그리고 한 개에 10원 하는 껌을 20원에 팔아 중풍에 걸린 할아버지를 먹여 살리는 소녀들도 이곳 예낭에서 목도되는 풍물이다. 예낭 해부학자의 눈에 도원동은 이렇게 극복할 수 없는 가난과 한량없는 슬픔이 범람한다. ‘안 씨’에게 이런 예낭의 풍물은 “역사라는 의미, 법률이라는 의미, 사회라는 의미, 인생이란 의미”가 그저 무의미하고 적막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권력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예낭 도원동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진실한 인과관계들에 밀착되어 있다.

■방갈로와 성(城)

1984년 KBS TV문학관에 방영된 드라마 ‘예낭풍물지’ 속 어머니 모습.
평화롭고 화목했던 ‘안 씨’의 가정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린 것은 어느 해 5월 회사에서 일하던 ‘안 씨’가 경찰에 체포된 날부터였다. 10년 형을 언도 받은 가장을 살리기 위해 집을 잃어버리고, 설상가상으로 여섯 살 난 딸 영희마저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살림이 어려워지자 ‘안 씨’의 아내 경숙은 친구가 경영하는 다방 일을 거들어주다 마침 아내를 여의고 혼자가 된 부유한 중년 신사를 만나 집을 떠나버렸다.

10년 간 일궈놓은 튼튼한 성인 줄로만 알았던 가정이 일거에 무너지고 폐병까지 얻어 출소한 ‘안 씨’의 체념은 경숙을 용서하기 위한 자책과 자기합리화를 경유해 갈 수는 있었지만, 자신이 국가의 죄인이라는 사실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법이 금지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논리를 찾아야만 했는데, 결국 ‘안 씨’는 권력자가 ‘너는 죄인이다’ 하면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세상의 이치를 터득한다. 그렇게 자기 관념 속에 지어놓은 논리는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와 함께.

이제 ‘안 씨’는 상실해버린 옛집을 그리워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념의 집을 지을 결심을 세운다.

처음에는 방갈로를 지을 결심이었지만, 어느 날 또 다시 갑자기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튼튼한 성을 짓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한다. 하지만 권력자의 위력이 침투할 수 없는 성을 짓는 일이란 역시 환상일 뿐이다. 역사는 권력을 갖지 못한 자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터득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라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바로 그것이 ‘안 씨’가 결핵균을 받아들이면서 죽음의 의식을 치르려는 이유다.

이렇게 ‘안 씨’가 스스로 자기비소(自己卑小)를 강요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심성에는 국가권력에 대한 ‘르상티망’이 자리하고 있다. 니체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원한이나 분노를 르상티망이라고 명명했는데, 원한 맺힌 자기혐오로서 르상티망은 자신의 무력을 재확인하고 증오의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노예의 도덕을 주인의 도덕으로 가치 전도해준다. 요컨대 권력에 패배한 비력자(非力者)인 ‘안 씨’가 의식적으로 결핵균에 함몰하여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공평한 대접을 받게 된다는 관념은 권력에 패배한 노예의 도덕을 주인의 도덕으로 전환하는 전략적 자각이다.

즉 그것은 자신의 곤혹을 고귀하게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일에 해당한다. 칠순의 어머니가 과로와 쇠약으로 병석에 누운 지 사흘 만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을 때 어머니의 고운 재가 예낭의 풍물을 더해준 것을 확인한 ‘안 씨’가 마침내 예낭 풍물에 대한 기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권력에 대한 르상티망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안 씨’는 죽음과 구분되지 않는 자신의 삶을 주인의 도덕으로 계속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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