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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53> 정의론 - 존 롤스(1921~2002)

공정 바라는 청년, ‘라떼’ 기성세대… 한국사회 꼭 필요한 정의담론

  • 서부국 서평가
  •  |   입력 : 2022-11-17 19:20:29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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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키다리 학자 1971년 펴내
- 정의 주제로만 평생 연구 외길

- 전체 위한 복지라는 명분으로
- 소수 희생 강요하는 억압 안 돼
- 사회 약자 최우선 배려도 강조
- 모든 이에게 기회는 평등해야

정의(正義, justice),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사회 덕목 중 하나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숱한 서양 사상가가 “정의란~”하며 한 말씀 던졌다. 평범한 현대 남녀라 해서 무지한은 아니다. 이론을 몰라도 살다 보면 감이 생긴다. 하지만 ‘정답’이라고 주장하기엔 자신이 없다. 정의의 정의(定義)가 시대·정체(政體)·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정도는 아니까. 체계를 갖춘 이론인 ‘정의론’을 아직 읽진 않았다.
지난달 19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를 벌이는 모습. 롤스는 이 같은 사회 최소 수혜자를 위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정의론을 폈다. 연합뉴스
정의는 개인·단체·사회·국가·지구·우주 문제다. 필자는 이 덕목이 ‘배분’과 직결된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갑자기 ‘국민학생’ 때 목격한 장면이 떠올랐다. 1970년대 학식으로 덩이 식빵이 나왔다. 교사가 이 식빵을 삼등분해 나눠줬다. 손으로 쪼개다 보니 빵 크기가 일정치 않았다. 가운데 빵은 옆구리가 양쪽으로 뜯겨나가기 일쑤였다. 어느 날 소동이 벌어졌다. 그날따라 빵 옆구리가 심하게 뜯겨나간 게 틀림없었다. 그 빵을 받은 남자아이가 여교사에게 쌍욕을 하며 대들었다. 꼬맹이는 부정의를 못 참았다.

지금 한국 사회만 해도 ‘수저론’ ‘기울어진 운동장’ ‘걷어차인 사다리’ 같은 세태 은유가 낯설지 않다. 정의는 세대 간 갈등도 일으킨다. 청년 세대는 공정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데 기성세대는 ‘라떼’를 들먹인다. 이런 양상을 예견한 듯 50여 년 전 한 철학자가 정의의 칼을 빼 들었다. 키다리 학자, 존 롤스다. 그는 1971년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을 펴냈다. 평생 정의라는 단일 주제만 보고 외길을 달렸다. 정의를 학문으로 밝혀 봤자 부정의가 없어지진 않는다는 회의를 걷어내며, 그런 작업이 일생을 걸 만한 가치를 갖췄다는 신념을 다지지 않았다면 가능했을까. 반짝이는 보석이 나왔다. 그 영롱한 빛을 느껴보기 전에 우리 사회상이 비친, 지난해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가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자.

이 기관이 세계 17개국 국민에게 “무엇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나요?”라고 물었다. 14개국(미국 프랑스 영국 그리스 이탈리아 독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스웨덴 벨기에 네덜란드 싱가포르 일본)이 ‘가족’을 1위로 꼽았다. 스페인은 ‘건강’, 타이완은 ‘사회’였다. 한국도 역시 ‘가족’이렷다? 예상은 빗나갔다. 17개국 중에서 유일하게 ‘물질적 풍요’를 1위로 뽑았다. 한국은 자천타천 ‘정(情)’의 나라 아닌가. 그렇게 유별난 선택은 아니었다. 17개국 모두가 상위 5위 안에 ‘물질적 풍요’를 집어넣었으니. 하지만 ‘물질적 풍요’를 최고 순위로 꼽았다는 건 우리 사회가 여전히 ‘황금색’을 좇는다는 걸 보여준다.

■ 시대를 바꾼 담론

문제는 한국 사회가 ‘물질적 풍요’와 ‘공정(公正, 공평하고 올바름)’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게 가능할까. 롤스가 연구한 주제 중 하나였다. 장년 학자인 저자가 활동한 1950년대는 정치·사회 철학 같은 규범 윤리학이 힘을 못 썼다. 분석철학에 밀려 ‘구름 잡는 소리’로 격하된 시절, 롤스는 ‘정의론’이란 책 한 권을 내놓음으로써 이런 시대 분위기를 멀리 날려 버렸다. 롤스 정의론은 사회·정치철학에서 담론으로 뛰어올랐다. 그 뒤는 우리가 아는 바다. 롤스는 바쁘다. “사회·분배 정의 실현”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지는 곳에서 그를 불러낸다.

‘정의론’은 3부(원리·제도·목적론) 9장 87절로 국역본은 750쪽 분량이다. 논증 위주로 서술해 보통 독자가 읽기에 쉬운 편은 아니다. 초판 서문에 독서 지침이 왜 나오겠는가. 롤스는 이렇게 말한다. “정의론의 기본 사상이 제시된 1장 1~4절을 읽고 정의 원칙을 제도상으로 논의한 2장 11~17절로 넘어가도 됩니다.” 시키는 대로 해보면 이런 저자 배려(?)는 효과가 미심쩍다. 절마다 붙은 명료한 소제목을 버팀목 삼아 취사선택해 읽고 이해력을 높이는 게 더 낫다.

전체 흐름은 이렇다. 1부 원리론에서 롤스는 자신이 세운 정의론(‘공정으로서의 정의론’)을 주창하며 그때까지 유력한 사회·정치 이론인 공리주의를 보완했다고 강조한다. 말이 그렇지 사실상 공리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 2부는 정의론이 사회 제도에서 응용되는 사례를 보여준다. 정의는 헌법상 제자리를 잡았다. 그 지위를 떠받치는 철학 배경, 분배적 정의 문제, 정치적 의무·책임에 관련된 근거와 한계를 다룬 규정, 시민 불복종, 양심적 거부(반대) 등을 다뤘다. 3부에서 저자는 자신이 제시한 정의 원칙이 사회 제도와 도덕관에 접목돼 공동체가 한층 나은 삶을 누리길 간구하는 소망을 내비쳤다.

3부 마지막 대목이 그렇다. 약자를 항상 배려하는 정의 원칙을 제창한 사회 철학자가 가진 따뜻한 체온이 행간을 데운다. “정의관이 주어지면 인간의 존엄과 존중이란 관념은 한층 명확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 우리는 그런 관점으로 동시대인만 아니라 여러 세대에 속하는 사람까지도 공평해진다.” 칸트 체취가 물씬 나는, 마지막 문장. “만일 우리가 마음의 순수성을 지닐 수만 있다며 분명한 이해를 갖고서 그와 같은 관점에서 오는 도덕감과 자제력으로 행동할 것이다.”

■ 강렬한 첫 문장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린 건 ‘공정’을 의미한다.
1장 1절 첫 문장은 강렬하다. “사상 체계의 제1 덕목을 진리라고 한다면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1 덕목이다.” 이른바 ‘정의의 우선성’. 그 정의는 전체 사회를 위한 복지라는 명분으로도 훼손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누리는 정의는 침해당하지 않는다(‘정의의 불가침성’). 이 같은 정의관이 세워지면 “다수가 누릴 큰 선을 위한다면 소수의 자유 정도는 억압해도 괜찮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아니요”라고 답하게 된다. 롤스는 이 같은 정의관을 좇아 평등한 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야 ‘질서정연한 사회’가 된다고 봤다. 그런 사회의 자유와 권리는 정치적 거래나 사회적 이해타산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고 못 박았다. 부정의는 더 큰 부정의를 피할 수 있을 때 참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롤스가 내세운 ‘정의의 두 원칙’을 번역한 문장은 이렇다. 첫째 원칙, 각자는 타인이 누리는 유사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하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둘째 원칙,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과 같은 두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①정의로운 저축 원칙과 양립하면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득이 되고, ②공정한 기회균등의 조건 아래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직위·직책과 결부되게끔 편성돼야 한다.

정의의 제1 원칙은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다. 자유주의가 내세우는 기본적 자유(사상·양심·언론·집회·보통선거·공직 및 개인 재산을 보유할 자유)를 보장하는 데 ‘우선성’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 이 자유 목록에서 자본주의적 시장의 자유(생산재의 사유 및 생산물의 점유, 소유물의 상속 및 증여의 자유)가 제외됐다. 그 이유는 정의의 두 원칙이 저자가 설정한 ‘무지의 베일’에서 추출돼 자본가·노동자 구분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정의의 원칙은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차등의 원칙’. 최소 수혜 시민에게 최대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정당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게 정당화되지 않으면 완전한 평등 분배를 해야 한다. 두 번째 부분은 모든 이가 공정한 기회균등을 누려야 한다는 논지다. 직업 직책뿐만 아니라 삶의 기회까지 평등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한 이 정의론을 저자는 사회·국가에서 전 세계로 넓혀 적용하려 했다. ‘정의론’(1971년, 초판)→‘정치적 자유주의’(1993년)→‘만민법’(1999년)을 펴내 정의론과 세상으로 내보냈다.

이 책은 숱한 논란을 겪고도 살아남았다. 가장 낮은 곳에 내몰린 이들을 최우선으로 배려해 공정한 세상을 만들고자 실천해야 한다는 그의 정의론이 시공을 떠나 강력한 호소력을 가졌기 때문일 터이다. 윤리학의 2대 개념인 옮음(정당성)과 좋음(善), 옮음은 그 좋음을 극대화하는 규범이라고 외친 롤스 목소리는 지금도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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