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바랜 사진이 한 장 있다. 백인 소년들 한가운데 축구공을 들고 앉아있는 동양인 청년이 눈에 띈다. 이 사진이 1920년대 프랑스 소도시에서 찍은 것이라면 더욱 특이하다. 이 청년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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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해(앞줄 가운데)의 프랑스 교육기관 리쎄 시절 사진. 부산박물관 제공 |
그의 이름은 서희수(徐羲洙), 1902년 부산 초량 중국인 거주지 청관(淸館)이라 불리던 곳에서 태어나 자랐다.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수배자가 됐고, 18세 나이에 임시정부로 망명을 단행했다. 기차를 타고 압록강 철교를 건너고 만주 봉천을 지나 상하이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160㎝ 정도로 키가 작았고 일찍이 고향에서 익힌 중국말이 유창했기에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집을 떠나면서 이모부가 지어준 호인 영해(嶺海)를 본명으로 삼았다.
임시정부의 막내로 지내며 국제외교 중심지인 파리로 유학을 결심했다. 1920년 11월 상하이를 떠나 12월에 프랑스 남부 마르세이유에 도착한 뒤 기차를 타고 파리로 향했다.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주선으로 파리 북쪽 보배라는 도시에서 초·중등 교육기관 리쎄에 입학하였는데, 어려서 천재로 불렸던 그는 11년 걸리는 교육과정을 6년에 마쳤다. 어린 급우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던 그는 특히 축구를 좋아했다.
사진은 27년 프랑스 체류 기간 중 가장 행복했던 보배에서의 추억이다. 그러나 즐거운 학교생활 이면에는 서영해가 독립운동에 더욱 헌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역사수업 중 한국인을 모독하는 강의에 참지 못하고 교사에게 거세게 반박했고, 이에 교장은 그를 퇴학시키려 했다. 보습 교사의 도움으로 다행히 퇴학을 면했지만, 자기주장이 사실임을 증명해보라는 교장의 조건이 있었다. 4개월간 백방으로 자료를 찾아 공부한 끝에 한국 역사에 관해 발표했고, 이 일로 한국의 역사문화와 독립운동을 유럽에 알리겠다는 목표를 갖게 됐다. 소르본대학과 파리고등언론학교를 거쳐 학업을 마치고, 1929년 파리에서 고려통신사라는 언론사를 설립해 독립운동 발판을 마련했다.
서영해는 1920년대~1940년대 파리에서 기자, 작가, 국제정세전문가, 인권평화운동가,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미국에 이승만이 있다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파리 제네바 브뤼셀과 스페인 등 유럽 전역에서 활약했다. 부산박물관은 이와 관련된 서영해의 사진 등 소중한 자료 695점을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아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서영해 특별전’을 개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