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구 연작’ ‘4·3 감모여재도’ 등
- 14일까지 자개 작품 20점 소개
- 버려진 소재의 가치 재창출 눈길

원형의 평면 자개에 삼라만상이 담겼다. 첩첩 쌓인 산 위엔 달과 구름이 흐르고 아래엔 새들이 무리 지어 난다. 여러 깃으로 갈라진 꼬리를 흔들며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봉황과 시원하게 내리꽂는 폭포가 신비로움을 더한다.

부산 수영구 미광화랑에서 초대전 ‘빛나는’을 열고 있는 김경화 작가가 버려진 자개농으로 만든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최승희 기자

밤하늘을 수놓는 은하수처럼 화면 가득 영롱한 빛을 발산하는 이 작품(무제)은 버려진 자개농으로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중앙에 핀 모란을 손잡이 삼아 자개농 열듯 양 문을 열면 화면 속 생명이 숨 쉬는 ‘빛나는’ 낙원으로 이어질 듯 묘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버려진 자개농에서 새로운 빛을 길어내는 작가 김경화의 초대전 ‘빛나는’이 부산 수영구 미광화랑에서 열린다. 부산 작가인 김경화는 도시에 버려지거나 방치된 소재로 노동의 가치, 제도적 불평등에 대한 질문을 담아왔다. 미싱을 이용한 재봉 작업과 시멘트를 많이 했으며, 최근엔 자개를 주로 쓴다. 지난해 기장 일광해수욕장에서 열린 바다미술제에서 주목받은 3ｍ 높이 거대 자개 알(卵) ‘바다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그의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주거와 유행 변화로 외면받고 버려지는 자개농을 씻고 고치는 등의 과정을 통해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는 가치를 내보이고자 한다. 버려진 자개농을 뜯고 자르고 닦고 칠하고 이어 붙인 작품 2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자개농은 엄청난 노동의 결과물이잖아요. 손톱보다 작은 조개껍데기 조각을 하나하나 자르고 붙여야 하는 노동 집약 산물이죠. 그 노동 위에 저의 노동(작업)을 더했을 때 새롭게 발견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가위 낫 망치 등에 자개의 빛을 얹은 ‘공구 연작’은 일상 속 공구를 예술적 도구로 변화시킨 작품이다. “미술작가로서 노동과 생활 속 노동이 구별되고, 다른 가치판단에 놓이는 순간을 종종 만납니다. 스스로를 ‘예술노동자’로 두고 작품의 쓰임이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공구 연작은 본래의 도구적 쓰임은 사라지고, 예술적 노동의 도구로 변화되길 바라며 만든 작품입니다.”

액자는 자개장의 서랍으로 만들었다. 소중한 물건을 서랍에 넣어두듯 공구를 담았다.

책거리 민화를 재해석해 여성학자와 여성문인의 책으로 새롭게 구성한 ‘세상을 펼쳐온 여성들의 책거리’는 10여 개의 각기 다른 서랍의 궤를 맞췄다. 선조의 책 사랑과 일상의 소망이 담긴 책거리 민화는 당시 책을 짓거나 소유한 남성 유학자의 취미가 드러난 그림이라는 데 주목해, 그는 여성학자와 문인을 위한 책거리민화를 구성했다. “자개농과 서랍 등을 이용해 입체적이고 새롭게 해석된 책거리민화를 세상을 펼쳐온 모든 여성들에게 바칩니다.”

‘4·3 감모여재도’는 제주 4·3 사건 희생 영령에게 정성스럽게 차린 제사상이다. 롤케이크 달떡 한라봉 등 ‘제주다운’ 상을 차리고 추모의 마음과 빛을 담아냈다. “사당에서 제사를 지낸 사대부와 달리 서민들은 ‘감모여재도’라는 사당 그림을 걸어두고 제사를 올렸다고 해요. 제주 본향신의 원조라 전해지는 송당리 본향당 모습을 담아 제주 4·3사건에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감모여재도라는 민화 형식을 차용했습니다.”

자개농은 부산 동구 매축지마을에 있는 통영칠기라는 업체에서 공수한다. 작업의 시작점이자 그의 보물창고다. 평생 자개농을 만들고 고친 통영칠기공방 박영진 사장에게서 수리 기술도 배우고 있다. “집을 리모델링 할 때 뼈대만 남기고 싹 공사하잖아요. 골동 자개도 새로 만들듯이 모든 과정을 다시 해야 해요. 이탈된 조각을 다시 붙이고 다듬고 옻칠하고…엄청나게 많은 과정이 필요하죠.”

자개농에 장식된 십장생도 화조도 모란도 풍속화 등에는 자연물 숭배사상과 신선·도교사상, 유학 등 동양 사상이 결합됐다. 그림 속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라는 메시지는 지금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사라지는 것과 여전히 빛나는 것을 작업한 김경화의 작품은 오는 14일까지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