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산을 찾는 관광객은 잘 알려진 해운대에 가기보다 기장 해안도로를 따라 숨겨진 카페와 맛집을 찾아다닌다. 지금의 기장은 바다의 풍요로움을 지닌 관광명소지만, 조선 시대에는 침략의 두려움이 공존하는 동남해안 최전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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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4~1877년 기장현의 군기 확보실태를 기록한 ‘경상도 기장현 군기집물성책’. |
조선왕조실록 세조 5년(1459년) 7월 기록에 따르면 “연변의 고을은 국가의 울타리와 같아서 적의 침입을 받는 지역은 협소가 쇠잔한 고을이라 할지라도 진(鎭)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다”며 “경상도의 영덕 기장 진해 등 여러 고을은 연해 방어에 있어 군사상 중요한 지역이므로 독립된 진을 설치해야 한다”고 하였다. 동남해안 요충지로서 중요성이 논의되었던 것이다.
기장은 중종 14년(1519) 동래와 함께 경상좌도에 소속되었고, 경상좌수영의 관할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해상 방어 기능이 동래부로 이전되었음에도 기장에는 군사 무기와 장비인 군기를 저장하고 병선이 주둔하는 주사(舟師)가 설치돼 일부 군사 기능을 했다.
부산박물관이 소장한 ‘경상도 기장현 군기집물성책(慶尙道 機張縣 軍器什物成冊)’은 1874년 8월~1877년 1월 기장현감을 지낸 이증우(李曾宇)가 당시 기장현의 군기 확보실태를 기록한 8면의 책이다. 표지는 훼손돼 후대에 제작되었다. 책에는 군기 명칭과 수량 그리고 현감의 수결이 있다. 군기는 전선(戰船)과 육군(陸軍)에 구비된 것으로 나누어 기술됐다. 주로 궁시류·화기류이며, 창검류와 기타 장창·능철은 소략하다. 전선(戰船)에는 흑각궁 100장, 교자궁 54장 등이 있었고, 육군에는 조총 208병, 화약 1800근, 연환 8만 9000여 개 등을 구비했다. 당시 조총 한 자루에 대략 4:200 비율의 화약과 연환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기장현은 화약과 연환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 이는 연해 방어를 위한 실제적인 대비가 일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8면의 간결한 기록으로 지방군 군비 상황을 짐작해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임진왜란 뒤 군기 개량과 증량을 통한 지방군의 대비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었는지, 그랬다면 다가올 일제 침략과 외세의 압박에 더욱 적극적인 대응이 가능했었을지 한 번쯤 생각하게 하는 기록이다. 기장 바닷가 근처에는 연해 방어를 위해 쌓은 두모포진성과 남산봉수의 흔적이 아직 있다. 기장 해안도로를 달리며 왜구의 침략에 맞서 전력을 다했던 선조의 마음을 기억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