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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인간욕망 투영된 시대풍경, 영화 속 진짜 주인공

아마겟돈 타임(2022)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2-12-13 19:36:32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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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그레이의 ‘아마겟돈 타임’(2022)은 감독 본인이 어린 시절에 겪은 사건을 회고하며 만든 작품이다. 때때로 영화감독들은 창작 재량이 주어진다면 과거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곤 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그가 돌이키고자 하는 기억은 애정과 상상으로 변형됐음직한 달콤한 추억과는 거리가 멀다. 1980년. 냉전 중이고 시대는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과 신자유주의 도래를 목전에 두고 있다. 채도를 낮추고 차분히 가라앉힌 화면 톤부터 영화에는 시종일관 침울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감돈다.
영화 ‘아마겟돈 타임’ 스틸컷.
영화 중심에는 대가족의 손자인 폴 그래프가 있다. 그는 예술가로 성공하는 미래에 대한 망상에 빠진 대책 없는 몽상가이며, 자제심이나 사리분별 없이 감당 못할 일을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문제아다. 부모를 비롯한 주변 인물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그의 행동 탓에 곤란을 겪는다. 혼자 억울할 뿐인 폴은 이해심 많은 할아버지와 흑인 친구 조니에게서 위안을 얻지만 종국엔 뜻하지 않은 사건들로 소중한 두 사람을 떠나보낸다.

영화를 보면서 어딘가 씁쓸함을 느낀다면, 그건 현대를 사는 사람의 상식과 관점에서 과거의 사회상으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아마겟돈 타임’의 진정한 주인공은 시대 풍경이다. 신은 모든 사물을 통해 자신을 ‘표현’(expression)한다는 스피노자의 지적처럼, 인간 실존은 외부 환경의 영향과 무관할 수 없고, 따라서 우리 욕망과 행동은 시대의 무의식과 본질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시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캐릭터이며, 인물은 그에 의해 허공에 던져진 조약돌이다.

폴의 가족은 선대에 미국으로 온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이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를 피해 미국 사회 정착에 성공한 집안은 인종적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라비노위츠라는 성을 버렸다. 아버지의 배관공 일로 생계를 꾸리는 이 서민 가족의 목적은 앵글로 색슨계 백인 중심인 미국 사회의 정상성, 그리고 부유한 상류 계급 편입이다.

이런 욕망은 없는 살림을 짜내 자식들을 명문 사립학교에 진학시키는 한편으로, 인종차별주의를 내면화한 언행을 일삼는 걸로 드러난다.(자막에 번역되지 않은 ‘칭챙총’은 아시아계에 대한 멸시 표현) 상류/하류, 백인/유색인종, 아(我)/비아(非我). 아메리칸드림의 환상/실제. 사립학교 운동장의 철창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폴과 조니의 구도처럼 카메라는 시대의 바닥에 그어진 경계선의 냉엄한 현실을 응시한다.

물 한 방울에 투영된 시대의 균열과 냉기. 한 가족의 모습이란 한 시대 습속과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기 마련이며, 우리의 현재는 지나간 시간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임을 영화는 손쉬운 감상주의에 기대지 않고 건조한 시선으로 담담히 읊조린다. 이안의 ‘아이스 스톰’(1997), 샘 멘데스의 ‘아메리칸 뷰티’(1999) 이래 가장 처연하고 서늘하게 표현되는 미국적 삶의 풍경. 무언가 거대한 걸 얘기하고자 한다면, 가장 평범하고 작은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통찰의 영화. 연말에야 찾아온 2022년 미국 영화 득의의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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