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57> 황무지-T.S.엘리엇(1888~1965)

현대시에 기여한 걸작 … 문학 죽어가는 이 시대가 진짜 황무지

  • 서부국 서평가
  •  |   입력 : 2023-01-12 19:25:33
  •  |   본지 13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 전편 433행 英현대문학 대표작
- 1차 세계대전 후 유럽 참상 그려
- ‘죽은 자의 매장’ 등 5부로 구성

- 첫 구절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 마지막 구절 ‘샨티 샨티 샨티’
- 읊는 순간 가슴 뜨겁게 데워져
산타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그리스 로마)의 라파엘로 작 프레스코 ‘시빌라’. 왼쪽에서 세 번째 여인이 ‘황무지’ 제사에서 인용된 무녀다. 천사가 든 석판에 신탁 내용을 옮겨 적고 있다.
영어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으로 시작해 산스크리트어 ‘Shantih shantih shantih’로 끝나는 433행 장시가 ‘황무지(THE WASTE LAND)’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시’라는 그 명예, 지금도 빛날까.

시집 ‘황무지’(1922년)가 발표된 지 딱 100년이 지났다. 던져볼 만한 질문이다. 게다가 연말·연초 쓱 나타나는 명품 뮤지컬 ‘캣츠’를 본 관객이라면 엘리엇을 생각했을 터이다. 키가 껑충했던 엘리엇은 애묘인이었다. 동시집을 한 권 냈다. 1939년 발간된 ‘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 초판본 표지에 고양이 그림도 직접 그려 넣었다. 그는 어린이 영세 때 대부를 서고 그 대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때 ‘고양이 시’를 한 편 곁들였다. 사회를 향해 낸 목소리를 겸했다고 한다. 성인도 애독자. 영국 뮤지컬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이 동시집을 손에 쥐고 중얼거렸다. ‘뮤지컬로 만들어야겠네’. 1981년 ‘캣츠’가 처음으로 등장해 무대를 휘저어 놓았다. ‘주머니쥐 할아버지’는 엘리엇 별명이다. 동료 시인 에즈라 파운드(1885~1972)가 붙여줬다.

‘캣츠’에 나오는 시는 팡팡 튄다. ‘황무지’는 어떨까. 첫 행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는 감성을 적시고, 마지막 행 ‘샨티 샨티 샨티(샨티는 평화라는 뜻)’는 가슴을 데워준다고 말하는 이가 많다. 처음과 끝, 두 행은 그렇다.

그 사이로 흐르는 시에 눈길을 둬 보라. 어지럽다. ‘모더니즘 시가 이런건가’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모더니즘은 20세기 서구에서 일어난 새로운 문학·예술 사조. 앞서 유행한 사상·형식 문체 따위를 갈아엎는 각축장이었다. 그런 낯설게 하기가 현대성으로 불렸다. ‘황무지’는 모더니즘 시로서 선두에 섰다. 고대 그리스어를 포함해 여러 유럽 언어로 쓰였다. 기독교 불교 힌두교에서 흘러나온 종교 언어를 불러냈다. 여기에 동서 신화·전설·문학작품을 끌어댔다. “지옥 같은 상상력”이랬다. 그 힘이 엘리엇에게 1948년 노벨문학상을 안겼다.

‘황무지’ 3장 ‘불의 설교’에 등장하는 티레지아스. 그리스신화에서 남성과 여성을 모두 경험하는 인물이다.
엘리엇을 모더니스트·반(反)낭만파·친(親)지성파·도시풍 시인이라 불러도 된다. ‘황무지’ 1~5부 제목만 봐도 수긍한다. 1부-‘죽은 자의 매장’ 2부-‘체스 놀이’ 3부-‘불의 설교’ 4부-‘수사(水死)’ 5부-‘천둥이 한 말’.

표제작 ‘황무지’ 외에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 ‘전주곡들’ ‘우는 처녀’가 실렸다. 이 중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1915년)가 신예.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간 엘리엇이 그곳에서 등단하도록 도운 시인인 파운드가 “영어로 쓴 첫 현대 시”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황무지’ 초고는 900행에 가까웠다. 난삽해 보였다. 이번에도 파운드가 나서 분량을 절반으로 쳐냈다. 1부 앞에 관계 글 제사(題詞)를 뒀다. 5행을 쓰는 데 사용한 언어는 4종류(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4행에 파운드 이름이 보인다. ‘For Ezra Pound/il miglior fabbro(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후행은 단테 ‘신곡(연옥 편 26장)’에 나오는 구절. 12세기 시인 아르노 다니엘에 대한 칭송이다. 빈사 상태인 시를 살려준 파운드가 얼마나 고마웠으면! ‘보다 나은 예술가’란 표현은 최상급 헌정사다.

제사 전문은 이렇다.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네는 대답했지요/죽고 싶어.’ 쿠마에 무녀는 고대 로마 오비디우스 시인이 지은 ‘변신 이야기’에 등장한다. 쿠마에는 고대 그리스 식민 도시 이름,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다. 무녀는 아폴론이 내리는 신탁을 전하는 여사제였는데 아름다웠다. 올림포스 12신 중 한 명인 아폴론이 홀딱 반해 그녀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 천 년을 살게 해 달랬다. 문제는, 젊음을 유지해 달라는 단서가 없었다. 무녀는 끝없이 늙고, 몸은 손가락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벌레처럼 조롱 안에 들어가 살게 된다. 로마 네로 황제 때 궁정시인이었던 페트로니우스가 소설 ‘사티리콘’을 쓰며 이 신화를 곁들였다. 제사 중 ‘나’는 소설 속 등장인물 트리말키오. 그는 술자리 여흥을 돋우려고 자신도 구경거리가 된 무녀를 봤다고 너스레를 떤다.

제사는 ‘황무지’가 펼쳐나가는 내용을 암시한다. 1부는 생명이 떠나, 죽음보다 못한 상태를 그려낸다. 대상은 현대 문명, 그곳 주민, 시인 자신을 포함한 현대인이다. 그런데도 사월은 생명이 용솟음치기를 요구한다. ‘가장 잔인한 달’이다.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으로 3000만 명이 넘는 인명이 죽거나 다치는 참상을 지켜봤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인류 문명이었다. ‘라일락’이 살 수 없는 불모지엔 정신이 황폐해져 새로운 삶을 바라지 않는 주민들이 산다. 1부 ‘죽은 자의 매장’에서 만나게 되는 등장인물들. ‘황무지’는 동서양 고전을 자주 인용해 배경지식이 없이 이해하기가 힘들다. 저자 주해가 빼곡하다. 1부 제목 ‘죽은 자의 매장’은 영국 정교의 매장 성사에서 따왔다.

1부 본문을 살펴보자. 성서(에스겔 전도서 이사야),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올더스 헉슬리 소설 ‘크롬 옐로’, 셰익스피어 희곡 ‘템페스트’, 보들레르의 시 ‘일곱 늙은이’, 단테 ‘지옥 편’, 존 웹스터 비극 ‘흰 악마’에서 따왔다. 마지막 행은 보들레르의 시 ‘악의 꽃’을 인용했다. 독자도 황무지에 발을 들이게 만든다.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나와 같은 자 나의 형제여!’

2부 ‘체스 놀이’에선 타락한 문화와 무의미한 삶이 질펀하다. 성(性)과 생(生)을 왁자지껄 떠들지만, 생명을 못 낳으니 허무하다. 2부 인용도 거창하다. 토머스 미들턴 작 연극 ‘체스 놀이’와 ‘여자는 여자를 경계하라’, 셰익스피어 희곡 ‘앤터니와 클레오파트라’ ‘햄릿’,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 밀턴 ‘실낙원’, 오비디우스 작 ‘변신 이야기’ 중 필로멜라 얘기, 웹스터 극 ‘악마의 소송사건’을 끌어왔다. 모더니즘 기법이 춤춘다.

3부 ‘불의 설교’. 현대인 성(性)은 저속하고 무의미하다. 생명을 낳지 않고 쾌락 도구니까. 금욕주의자 부처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불러냈다. 불경 ‘마하박가’에서 부처는 “탐욕의 불을 끄라”고 가르쳤다. 엘리엇은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로 바꿨다. 아우구스티누스 ‘참회록’에서 따온 행은 ‘오 주여 당신이 저를 건지시나이다.’ 원주(原註)에서 엘리엇은 “그리스신화에서 남녀 양성이었던 티레지아스가 관찰하는 게 사실상 이 시의 내용”이라고 말한다.

4부 ‘수사(DEATH OF WATER)’는 10행으로 짧다. 생명의 근원인 물을 제대로 사용 못 한다는 의미, 재생하기 위해 희생된 죽음을 뜻한다는 두 해석이 제시된다.

5부 ‘천둥이 한 말’. 황무지에 번개가 치고 풍요를 약속하는 비가 내린다. 천둥은 구원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황무지가 살아나려나? 마지막 두 행으로 판단해보자. 산스크리트어 주문이다. 다타(주라). 다야드밤(공감하라). 담야타(절제하라). 샨티 샨티 샨티. 아직 멀었다. 평화를 더 간구해야 한다.

‘황무지’가 영미 문단만 떠받드는 시란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매년 4월이면 떠올려 보는 시다. 433행을 다 읽지 않은들 어떠하랴. 처음과 마지막 행을 읊으면 시가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는데. ‘황무지’는 우리 마음에선 황무지가 아닌 이상한 시다. 고양이를 좋아했던 ‘주머니쥐 할아버지’ 시인을 쉽게 잊기도 힘들다. 문학이 죽고, 시가 사라져 버리는 시대가 진짜 황무지다. 0과 1이 세계를 지배하는 디지털이 언어를 영원히 추방해 버리려나? 그럴 수 없다는 걸 시가 보여주니 고맙고 행복하지 않은가.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영상] “개별적이고 정밀하게 엑스포 유치 전략 짜야"
  2. 2김해공항~베이징(서우두) 하늘길 4월 18일부터 다시 열린다
  3. 3소주 1병에 6000원…정부 규제 개선해 가격 경쟁 유도
  4. 4인구 13만 소도시 통영에 전·현직 두 대통령 내외 한날 방문 눈길
  5. 5여객선 안 다니는 통영 오곡도·고성 자란도 뱃길 열린다
  6. 62일 부산·울산·경남···낮과 밤의 기온차 매우 커
  7. 7한전·가스公 "요금 인상 미루면 사채 한도 초과·미수금 13조"
  8. 8건설사에 조합원 채용 강요하는 노동조합…2년여간 과태료만 1억 8천만 원
  9. 9"원전안전정책 수립시 광역자치단체장 권한 보장해야"
  10. 10좋은강안병원 안과센터 개소…세부 전문의 체제로 운영
  1. 1[영상] “개별적이고 정밀하게 엑스포 유치 전략 짜야"
  2. 2[르포]부산 온 ‘떠다니는 군사기지’ 美 니미츠함 직접 타보니
  3. 3민주당 ‘원전 오염수 해양방출 저지대응단’ 후쿠시마 방문 추진
  4. 4후쿠시마수산물 수입 논란까지…尹 대일외교 부정여론 60%
  5. 5윤 대통령 통영 '수산인의 날' 첫 참석 "수산물 세계화 영업사원 되겠다"
  6. 6전봉민 563억 급감…‘국회의원 재산 1위’ 안철수에 내줘
  7. 7與 하영제 체포동의안 가결…민주 내로남불 비판 거셀 듯
  8. 8尹 대통령 지지율 4%p 떨어진 30%…작년 11월 이후 최저치
  9. 9日 후쿠시마 원전 내부 손상 심각, 대통령실 "후쿠시마 수입 없다" 또 강조
  10. 10“패스트트랙은 꼼수” “김 여사도 특검해야” 법사위 신경전
  1. 1김해공항~베이징(서우두) 하늘길 4월 18일부터 다시 열린다
  2. 2소주 1병에 6000원…정부 규제 개선해 가격 경쟁 유도
  3. 3한전·가스公 "요금 인상 미루면 사채 한도 초과·미수금 13조"
  4. 43일부터 부산항 북항 항만재개발구역 내 공공시설 전면 개방
  5. 5부산에도 ‘전세 피해 지원센터’ 문 연다
  6. 6정부 재정운용 비상등…올해 4년 만에 '세수 결손' 우려
  7. 7부산창업포털 오는 3일부터 전면 개편
  8. 8‘부산 참 좋다’…KB국민은행 세계박람회 유치 응원 영상 공개
  9. 9故 오완수 회장 자서전 ‘철에서 삶을 본다’ 출간
  10. 10부산시민의 엑스포 초대, 세계인이 응했다
  1. 1인구 13만 소도시 통영에 전·현직 두 대통령 내외 한날 방문 눈길
  2. 2여객선 안 다니는 통영 오곡도·고성 자란도 뱃길 열린다
  3. 32일 부산·울산·경남···낮과 밤의 기온차 매우 커
  4. 4건설사에 조합원 채용 강요하는 노동조합…2년여간 과태료만 1억 8천만 원
  5. 5"원전안전정책 수립시 광역자치단체장 권한 보장해야"
  6. 6서울 인왕산 화재 발생…대응 2단계 발령
  7. 7삼성중과 사내 협력사, 동주공제(同舟共濟) 상생 결의
  8. 8거제에 ‘중소형조선소 생산기술혁신센터’ 구축… 조선산업 초격차 유지
  9. 9전국 원전 인근지역 동맹 지방교부세 개정안 입법 국민동의 청원
  10. 10대단지 아파트 입주 앞두고.. 사하구, 장림유수지 '악취 전쟁'
  1. 1프로야구 ‘플레이볼’…롯데·두산 4월 1일 개막전
  2. 24강 6중…롯데 다크호스 될까
  3. 3서튼 “디테일 야구로 거인 팬들에게 우승 안기겠다”
  4. 4유럽파 ‘클린스만의 그들’ 리그서 골 사냥
  5. 5“비거리 고민하는 골퍼, 힘빼고 원심력으로 공 쳐야”
  6. 612초내 투구…경기시간 줄여 박진감 높인다
  7. 7LIV골프투어는 모래지옥?
  8. 8대한축협 '기습 사면' 사흘만 결국 철회, 비난 들끓자 백기든 모양새
  9. 9롯데, 이승엽의 두산과 첫 맞대결…팬들은 가슴 뛴다
  10. 10류현진 ‘PS 분수령’ 7월 복귀
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데카메론-조반니 보카치오(1313~1375)
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통영 음식 유곽과 너물비빔밥
박현주의 신간돋보기 [전체보기]
이국의 삶에 버팀목 된 나무 外
털머위꽃 할아버지의 깨달음 外
이 한편의 시조 [전체보기]
인공지능(AI) /이성호
덕혜옹주 /강지원
이원 기자의 드라마 人 a view [전체보기]
‘카지노’의 강윤성 감독
뮤지컬 영화 ‘영웅’ 윤제균 감독
이원 기자의 영화 人 a view [전체보기]
‘소울메이트’의 두 여배우
‘대외비’ 주연 조진웅
이원 기자의 Ent 프리즘 [전체보기]
학창시절·설화…일본 애니 ‘닮은꼴 정서’로 인기몰이
SM 세계관 지워질까 살아남을까…경영권 다툼 격화
일인칭 문화시점 [전체보기]
50년 전 태어난 그 무대서, 부산시립무용단 다시 쓴 ‘전국 최초’ 역사
불가능이 없는 상상력의 세상, 양자역학 개념이 눈에 보인다
조재휘의 시네필 [전체보기]
272㎏ 육신은 영혼의 감옥이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삶…문 너머 상실을 치유하다
BIFF 리뷰 [전체보기]
‘지석’
뭐 볼까…오늘의 TV- [전체보기]
뭐 볼까…오늘의 TV- 2023년 3월 30일
뭐 볼까…오늘의 TV- 2023년 3월 29일
방호정의 컬쳐 쇼크 & 조크 [전체보기]
영화 ‘영웅’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 the glory’
오늘의 운세- [전체보기]
오늘의 운세- 2023년 3월 30일(음력 2월 9일)
오늘의 운세- 2023년 3월 29일(음력 2월 8일)
오늘의 BIFF [전체보기]
오늘의 BIFF - 2022년 10월 13일
오늘의 BIFF - 2022년 10월 12일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전체보기]
내공이 깊은 사람의 말과 글은 쉽다고 말한 임상덕
가요를 시로 옮긴 고려 시대 문신 이제현
  • 유콘서트
  • 다이아몬드브릿지 걷기대회
  • 제11회바다식목일
  • 코마린청소년토론대회
  • 제3회코마린 어린이그림공모전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