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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하지 않음으로써 속죄한다…도시 전체가 ‘기억 전시관’

박선정 소장의 달리 인문여행 <6> 베를린

  • 박선정 인문학당 달리 소장
  •  |   입력 : 2023-02-12 19:44:00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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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리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 獨 두 동강 낸 베를린 장벽 흔적
- 새롭게 태어난 연방의회의사당
- 역사 미화하지도 지우지도 않고
- 더 크고 웅장하게 비상하는 도시

- 유대인 추모비·박물관 등 곳곳
- 잔혹한 만행 자발적 반성 계속

열차가 베를린 중앙역에 다다랐다. 1995년에 착공하여 2006년 독일 월드컵에 맞춰 완공된 이 역은 전면에 유리 벽을 사용한 거대한 건축물이다. 플랫폼은 모두 세 개의 층으로 돼 있는데, 동서 방향의 철로와 남북 방향의 철로가 각기 다른 층에서 교차하도록 설계돼 있다. 외관만큼이나 지정학적 의미도 큰데, 이곳은 정확히 동서 베를린의 경계였던 지점이다. 동서의 만남과 화합으로 시작해 유럽 및 세계와 연결되고 소통하고자 하는 독일의 희망과 의지가 이곳 중앙역에서부터 느껴진다.
프로이센의 번영과 국력을 과시하고자 건립된 브란데부르크 문. 치욕을 이겨낸 독일 승리의 상징이 됐다.
■형제애로 새 역사

베를린은 15세기 브란덴부르크 제국의 수도였고 18세기 초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였으며 19세기 후반에는 비스마르크의 제2 독일 제국의 수도로서 명성과 번영을 누렸다. 특히 17세기경 프레드리히 빌헬름의 통치 하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는데, 베를린에서의 산업과 건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면서다. 더욱이, 개신교도들인 위그노족에 대해 프랑스가 재산 몰수령을 내렸을 때, 오히려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아 그들에게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다른 종교와 민족이 베를린으로 이주하는 길을 열었다. 새로운 시민을 받아들임으로써 도시는 더욱 풍부해지고 활기가 넘쳤다. 상공업 역시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문화적으로도 다양성이 공존하는 도시로 거듭났다. 이러한 수용과 공존의 정신은 18세기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에도 이어지는데, 그 역시 프랑스에서 시작된 계몽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베를린을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1차 세계 대전과 패전을 겪으면서 위기를 겪는다. 게다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던 강한 의지마저 1929년의 세계 대공황과 나치 정권의 탄생으로 완전히 무너져내린다.

2차 대전은 베를린을 완전히 폐허로 만든다. 건물 몇 채만이 부분적으로 남았을 뿐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독일은 두 동강 나고 수도였던 베를린 역시 동서로 쪼개진다. 특히 서베를린은 동독에 둘러싸인 자유 진영의 섬이 된다. 그러다 보니 자유를 갈망하던 동베를린 시민의 목숨을 건 탈출이 줄을 잇고 결국 동독은 1961년 베를린 장벽을 쌓기에 이른다. 동서를 가로막은 채 서 있던 이 장벽은 정치적 이견과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마저도 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거대한 상징이 된다.

하지만 동독과 서독은 가족에게 총칼을 들이대는 어리석음의 역사를 바로잡는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1990년 드디어 다시 하나의 국가로 손을 잡은 것이다. 다름에서 오는 수많은 위기와 갈등을 형제애로 극복하면서 이제 독일은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대형 벽화 갤러리로 변신한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새 역사 상징하는 연방의사당

베를린 중앙역 옆으로 도도히 흐르는 슈프레강을 따라 걷다 보면 특이하게 눈에 띄는 돔 건물 하나가 있다. 독일 연방의회의사당이다. 냉전 시대 동안에는 서독에 속해있으면서도 바로 옆에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면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던 건물이다. 전쟁으로 붕괴된 채 방치된 건물을 통일한 후 돔 부분을 재건하는 등의 대대적인 공사를 거쳐 1999년부터 연방의회의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쟁으로 잃은 부분을 이전처럼 재건하지 않고 완전히 다른 재료를 이용한 유리돔으로 올림으로써 과거의 역사적 토대 위에 완전히 새로운 역사를 쓰겠다는 독일인들의 의지로 읽힌다.

■치욕 이겨낸 브란덴부르크 문

의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꼭대기에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와 그리스 여신 조각상이 놓여 있는 커다란 석조 문이 있다. 독일인들이 사랑하는 브란덴부르크 문이다. 앞서 언급한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건립한 것으로 당시에는 평화를 상징하였다. 그러나 베를린을 함락하면서 나폴레옹에 의해 문 위의 사두마차와 여신은 전리품이 돼 파리로 옮겨지는 치욕을 겪는다. 이후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베를린으로 되돌아오는데, 이때부터 이 문은 패배와 치욕을 이겨 낸 승리의 상징이 된다. 이후에도 2차 대전과 냉전, 통일의 여정을 겪으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은 늘 역사의 현장에서 독일의 통일과 재건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순간에도 수많은 독일 국민은 이곳에 모여 축배를 들었다.

■진행형 속죄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내 메나슈 카디쉬만의 작품 ‘낙엽’.
독일의 분단은 2차 대전을 일으킨 데 대한 일종의 처벌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비해 2차 대전 동안 유대인들을 비롯한 약자들에게 자행한 잔혹한 만행에 대한 속죄는 여전히 진행형으로 보인다. 이것은 베를린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유대인 학살에 대한 자발적 반성에서 드러난다. 그 가운데 ‘유대인 추모비’와 ‘유대인 박물관’이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과 연방정부의회의사당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유대인 추모비는 2711개의 크고 작은 콘크리트 덩어리들로 구성된 작품으로 공동묘지를 연상케 한다. 2005년에 완성된 이 작품의 정확한 이름은 ‘유럽에서 살해당한 유대인들을 위한 추모비’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통한의 마음을 담고자 2차 대전 후 60여 년 만에 진행한 공모 당선작이기도 하다. 학살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고 희생자의 이름도 없이 그저 크고 작은 콘크리트 덩어리들만이 비석처럼 줄지어 있다. 그래서일까. 침묵 속에서 네모난 기둥 사이를 오가는 여느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마치 공원에라도 온 듯 즐겁게 노는 청소년의 모습이 여러 가지 의미로 가슴에 와 닿는다.

2001년에는 독특한 외관과 설계로 유명한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 건축물로 더욱 세계적 명성을 얻은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설계했다. 아연과 티타늄으로 마감된 차갑고 무표정한 외관은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을 지그재그 모양으로 길게 늘어놓은 형태로 이들의 찢어진 역사와 삶을 형상화했다. 칼자국처럼 길고 날카로운 창틀로 햇살이 가느다랗게 들어올 때를 제외하면 건물 내부는 대체로 어둡다. 박물관은 지하 통로를 통해 옆 건물의 전시공간으로 이동하도록 설계돼 있는데 지하와 지상, 그리고 어둡고 긴 전시공간 모두가 유대인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하는 듯하다.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아홉 개의 콘크리트 기둥 사이로 올리브 나무를 심어 놓은 ‘추방의 정원’을 거쳐 ‘홀로코스트의 탑’으로 향하게 된다. 메나슈 카디쉬만의 유명 작품인 ‘낙엽’은 관람 마지막쯤 이곳 지하에서 만날 수 있다. 높고 어두운 콘크리트 벽 사이의 좁은 공간 바닥에 수많은 얼굴들이 깔려 있다. 둥근 철판에 새겨진 일 만여 개의 얼굴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얼굴들 위를 밟고 걷도록 되어 있지만 선뜻 마음을 내지 못한다. 감히 발을 움직이지 못한 채 망설이는 사이에 관람객 중 누군가가 용기를 낸다. 크고 작은 쇠얼굴들이 낮은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운다.

■잘못된 역사도 기억

베를린은 역사를 미화하지도, 애써 지우려 하지도 않는다. 베를린 장벽이 있던 곳에는 기념관이나 표지판을 세워 분단을 기억한다. 통일 이후 베를린의 심장부로 급부상하고 있는 ‘포츠담 광장’의 기념비를 비롯,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그리고 ‘베를린 장벽 추모공원’ 등도 이러한 역사의 기록물들이다.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들과 소수자들에 대한 만행의 흔적들 역시 사실대로 고백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기억 전시관처럼 다가온다. 물론 분단과 나치의 역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박물관 섬’을 들 수 있는데, 이곳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들이 섬처럼 한데 모여 있다. 프로이센 왕국 시절의 수집품들로부터 제우스의 대제단이나 바빌론 및 트로이에서 옮겨온 유적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이고 기념비적인 건축물들과 유물을 문화유산으로 보여줌으로써 과거 화려했던 독일의 힘과 역사를 재확인시키는 듯하다.

독일은 부족한 반쪽을 위해 더 가진 반쪽이 불편한 희생을 감내한 채 다시 하나가 된 용기 있고 의리 있는 국가다. 그리고 그 하나 된 국가의 중심에 베를린이 있다. 과거의 명성과 영광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념비적인 유물들과 함께 역사의 수치이기도 한 ‘상흔’들과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책임감’과 그로부터 얻은 ‘교훈’까지를 모두 껴안은 채 더 크고 웅장하게 비상을 꿈꾸는 거인 도시, 그곳이 바로 베를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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