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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8> 고려인 동포 음식과 광주 고려인 마을

고려인 당근 김치, 새콤달콤 국시…음식으로 지켜온 한민족 정체성

  • 최원준 시인 · 음식문화칼럼니스트
  •  |   입력 : 2023-02-14 19:16:46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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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년 전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 현지 음식문화 영향 받으면서도
- 한반도 조리법 원형 간직한 채
- 슬기롭게 자체 문화로 정형화

- 볶음밥 ‘쁠로프’ 쌀농사 산물
- ‘모르코브채’로 절임문화 전파
- 다른 듯 닮아 있어 ‘감동의 맛’

러시아의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 인형 안에 인형이 들어가 있고, 그 인형 안에 또 다른 인형이 계속 들어가 있는 인형이다. 마치 까도 까도 속을 알 수가 없는 양파와 같은 인형이랄까?

광주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의 ‘월곡고려인문화관 결’김병학 관장의 말을 듣고 보니,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우리 민족인 고려인은 어떤 면에서 마트료시카에 비유할 수도 있을 듯하다. 겉은 ‘중앙아시아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그 속에는 소련연방 해체 이전 ‘소련의 국민’으로서 러시아어를 모국어 삼아 맨몸으로 제2의 고향을 일군 시절의 삶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한 겹 더 들어가면 일제의 억압을 피해 조선에서 러시아의 동쪽 끝 연해주로 이주해오면서도, 한민족 정체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들이 고려인이다.

디아스포라는 ‘흩뿌리거나 퍼트리다’는 뜻의 그리스 말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자의든 타의든 조국을 떠나 세계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민족이나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광주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 가족카페’에서 받은 고려인 음식 한 상 차림. 가운데 투명한 병과 술잔에 담긴 보드카가 약 100g이다. 오른쪽 김치 옆에 고려인 동포들이 만들어 널리 퍼뜨린 음식인 모르코브채(당근채)가 보인다. 왼쪽은 주식 빵인 리뾰시카, 가운데는 시저샐러드이다. 사진에는 없지만, 꼬치구이인 샤슬릭도 맛난 음식이다.
■ 한민족 음식문화 원형 간직

유대민족 못지않게 기구한 디아스포라 운명을 이겨낸 이들이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이다. 현재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고려인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연해주 등지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었던 사람들이다. 제정 러시아가 붕괴된 뒤 소련이 탄생하고 스탈린이 권력을 잡으면서 이들은 머나먼 중앙아시아 황무지 허허벌판에 내던져진다. 그해가 1937년, 17만2000여 명의 고려인이 시베리아 화물 열차로 강제 이주 되었다. 지금부터 86년 전 일이다.

강제 이주 후 스탈린은 그들의 모국어인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급속하게 그 지역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지역 음식을 받아들인다. 육고기 위주의 식단과 빵의 주식화, 식사와 곁들여 차를 마시는 문화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고려인은 악착같이 모국어 신문(고려일보)을 발간하고 우리말 공연을 우리 극장(고려극장)에 올렸다. 그렇게 소련 국민으로 살아가면서도 한민족 생활문화 또한 면면히 지키고 이어갔다.

특히 음식문화는 지금까지도 한민족의 조리법을 원형으로 두고 있다. 소련이 해체된 뒤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로 편입된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강제 이주 된 지역의 음식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슬기롭게 자체의 음식문화를 정형화하고, 이를 확산해 그 지역의 독립된 음식문화로 자리 잡게 했다.

■ 모르코브채(당근채)의 ‘대히트’

월곡고려인문화관 결의 김병학 관장이 지은 책 ‘고려인 인문학 산책’(비매품)에 실린 1946년 중앙아시아 고려인 동포 최군서 노인의 환갑잔치 모습. 한민족 성정이 살아 있다.
고려인은 밥과 국을 중심으로, 채소를 절이거나 볶은 반찬에다 여러 가지 고기를 곁들어서 먹는다. 국수도 즐기고, 김치도 담가 먹는다. 이를 보면 우리 민족 음식 원형을 제대로 이어가고 있는 듯하다. 지난달 말 광주 고려인마을을 찾아 김병학 관장의 안내로 고려인 동포가 운영하는 ‘고려가족식당’에 들렀다. 고려인 동포들이 그들의 지역에서 먹던 음식을 내는 곳이다. 100여 년 세월을 낯선 땅에서 적응하며 살아왔기에, 이제 그들의 음식은 우리 고유의 음식과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았다.

고려인이 주로 먹는 음식으로 점심 밥상을 받는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주식처럼 먹는 담백한 빵, 리뾰시카와 차이(홍차), 반찬으로 먹는 모르코브채(당근채)와 김치가 상에 오른다. ‘리뾰시카’는 밀 생산이 많은 중앙아시아 환경에 적응한 음식으로, 이를 고추기름 된장 등을 섞은 양념에 발라먹거나 절임 채소 김치 등과 함께 얹어 먹는다.

‘모르코브채(당근채)’는 고려인이 현지 재배에 성공한 당근으로 직접 만들어낸 김치 유형의 음식이다. 일명 ‘코리안 샐러드’ ‘카레이스키 살라트’라고 불리며 소련연방과 더불어 유럽에까지 대중화한 음식이다. 식물 재배가 힘들었던 척박한 땅에서 고려인은 쌀과 양파 당근을 재배해 곳곳에 쌀 문화와 양파채, 당근채 등 절임 문화를 전파한다.

■ “100그람 하러 갈까?”

고려인 동포 철학자 박일과 고려인 음식연구가 천 따찌아나가 1994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펴낸 ‘고려겨례음식’.
곧이어 ‘국시’가 상에 오른다. 얼핏 보기에는 잔치국수다. 알다시피 우리 민족은 경사스러운 날 국수를 즐겨 먹었다. 국수가 장수의 의미가 있었기에 그렇다. 고려인도 중앙아시아에서 늘 즐겨 먹던 음식이 국수다. 현지어 또한 ‘국시’다. 경북지역에서 유입된 고려인들의 영향인 듯 싶다. 한 젓가락 먹어 보니 냉 육수가 새콤달콤하다. 국수 위에 소고기볶음과 오이 당근 무 파프리카 등을 채 썬 고명인 ‘추미’를 두둑하게 올렸다. 추미는 영남지역의 고명을 뜻하는 ‘꾸미’ ‘끼미’에서 변화한 말인 것 같다. 고려인도 즐겨 먹고 잔칫상에도 올리며, 중앙아시아인들도 아주 좋아하는 고려 음식이란다.

고려인이 쌀농사에 성공하여 만들어진 또 하나의 주식이 쁠로프(기름 볶음밥)이다. 볶음밥에 알맞은 인디카 계열의 쌀로 밥을 지어 고기 양파 당근 등과 향신료 등을 넣고 볶아서 먹던 음식이다. 우즈베키스탄에는 국민 음식으로 잔칫상에도 오른다.

이어 샤슬릭이 나온다. 러시아 전통음식으로 칼처럼 생긴 기다란 꼬치에 양고기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등을 꿰어 화덕에 구워내는 음식이다. 닭고기 ‘꾸리싸’는 장작 구이 통닭처럼 구수하면서도 담박한 식감이, 양고기 ‘바라니나’는 아주 깊은 풍미에 쫄깃한 식감이 좋다.

김 관장이 샤슬릭을 앞에 두고 넌지시 묻는다. “보드카 100그람(g) 하실래요?” “예?” 보드카를 한 잔도 아니고, 한 병도 아닌 ‘100g’이란다. 고려인들은 ‘술 한잔할까?’라는 말을 ‘100g 할까?’라고 슬쩍 표현하곤 한단다. 보드카 100g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 넙죽 제안을 받아들였다. 투명한 유리병에 보드카가 담겨 나온다. 투명하고 맑다. 소주잔 크기의 잔에 약 4잔이 100g. 샤슬릭과 함께 입을 적시기에 딱 좋은 용량이다.

■ 동포의 삶에 관심을

늘 강조하지만, 음식은 국가나 민족, 한 지역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더불어 그 구성원의 기질과 정체성을 반영하고 지리 환경이나 기후조건, 자생하거나 분포하는 식재료 등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음식은 인문지리적 사유와 추론을 가능케 하는 귀중한 대상이다. 특히 대이동에 따른 음식문화의 변화를 살펴보면, 인간이 지구라는 거대한 환경 속에서 얼마나 슬기롭게 적응하며 생존해왔는지 알 수 있다. 그 범주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 ‘디아스포라 음식문화’이다.

광주 고려인 마을에는 신조야 고려인 마을 대표와 이천영 목사, 김병학 관장 등 많은 사람의 노력에 힘입어 중앙아시아에서 고국을 찾아온 고려인 7000여 명이 함께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려서 살고 있다. 이 가운데는 우크라이나에 살다 전쟁 참상을 피해 고려인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으로 온 동포도 많다.

이역의 땅에서, 고국의 음식을 잊지 않고 만들어 먹으며, 또 다른 삶을 살았던 고려인들과 현재 한국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고려인 동포들의 후손. 그들의 모국은 정녕 어디일까? 고려인 동포들의 음식을 먹으며 괜스레 목이 멘다.

차디찬 보드카 한 잔 털어 넣는다. 몸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차 오른다. 마치 고려인, 그들의 굴곡진 역정처럼 온몸이 차가우면서도 새삼 뜨거워진다. 참고자료 김병학 지음 ‘고려인 인문학 산책’(월곡고려인문화관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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