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출판의 자유 막혔던 상황
- 민중의 저항의지 들끓게 만들어
- 배포 기록은 있으나 원본 미발견
해마다 돌아오는 삼일절(3·1절)은 일본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한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동시에 3월 1일은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날이기도 하다. 요즘은 삼일절을 기념하기보다 다음 날 새 학기를 맞이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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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박물관이 소장한 1919년 당시 항일 지하신문 ‘국민회보’ 필사본. 부산박물관 제공 |
여기 한 장의 낡은 문서를 통해 삼일절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먹물이 희미해질 때까지 그치지 않고 쓴 흔적, 일정하지 않은 글자의 크기와 간격, 겹쳐 쓴 글씨,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급히 쓴 것처럼 보이는 이 문서의 첫 행에는 “國民會報 三月 一日(국민회보 삼월 일일)”이라 적혀 있다. 이 유물은 부산박물관이 소장한 ‘국민회보’ 필사본이다.
‘국민회보’는 1919년 삼일운동(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일제의 강압에 맞서 발행한 항일 지하신문 가운데 하나다. 서울 배재고보 교사였던 강매가 발간을 주도하였고, 최윤창이라는 인물이 서울에서 구한 ‘국민회보’를 본떠 등사기로 돌린 뒤 50여 통을 다시 배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진 속 ‘국민회보’ 필사본도 재배포하거나 다른 이에게 전달하기 위해 급히 베껴 썼을 가능성이 있다.
일제 경찰이 압수한 지하신문을 모아 정리한 문서를 통해 ‘국민회보’의 존재를 알 수 있으나,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국민회보’ 필사본은 부산박물관이 2019년 기증받아 현재 전시 중이며, ‘조선독립신문’ 1호와 ‘국민회보’의 내용이 한 장의 종이에 등사된 유물도 2019년 경북 영천 용화사에서 발견되어 현재 영천역사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국민회보’에는 ‘아! 우리 태상황제(太上皇帝)의 억울하게 붕어(崩御)하심이여, 슬프다’로 시작하여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 독립을 제창하고 있는 이때 간교한 일본이 친일파를 이용해 식혜에 독약을 타 고종을 독살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른바 ‘고종독살설’을 제기하면서 이완용 조중응 등 6인의 친일파 명단도 공개하였다.
특히 ‘국민회보’를 비롯한 항일 지하신문에서 보도한 고종독살설은 당시 조선인들의 분노를 한층 더 끌어내었다. 그 위력은 매우 강력하여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경성일보’가 1919년 3월 15일과 16일 자 이틀에 걸쳐 고종독살설에 대한 해명 기사를 실을 정도였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뒤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철저하게 막혔던 상황에서 삼일운동은 그간 억눌려 있던 민중의 저항 의지를 들끓게 한 기폭제가 되었다. 일제의 억압에 맞선 지하신문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 부족한 인력과 재원에도 꾸준히 발행되어 거리에 뿌려졌다.
항일 지하신문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편향된 보도에 대항하였으며, 일제의 정책과 친일파의 실체를 폭로했다. 그리고 만세운동과 독립 의지를 담은 기사가 많은 지역으로 전해져 삼일운동이 전국에 걸친 독립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삼일운동에 관한 자세한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제공하는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