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난설헌 ‘염지봉선화가’ 등
- 52가지 우리 꽃에 관한 한시
- 저자 3인 우리말 번역하고 해석
- 조선 화가들 생생한 그림 더해
달력이 알려주는 계절은 재미가 없다. 봄에는 남쪽 지방부터 꽃 소식이 올라오고, 가을에는 반대로 단풍 소식이 남쪽으로 내려갈 때 계절은 더 생생하다. 꽃놀이 단풍놀이는 자연을 가까이 느끼고 싶은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꽃집에서 파는 꽃이나 익숙하게 보고 들어온 꽃 외에는 잘 모른다. 인간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한반도 곳곳에서 피어나는 우리 꽃은 각기 계절을 알려 주며 자태를 뽐낸다. 오래전 우리 선조도 사랑하고 아끼며 마음으로 보았던 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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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임당, ‘초충도’ 중 ‘봉선화와 잠자리’, 강릉율곡기념관. 태학사 제공 |
우리 꽃을 본 조선 시인의 마음에는 어떤 감흥이 일어났을까. ‘알고 보면 반할 꽃시’는 52가지 우리 꽃에 관하여 조선의 시인들이 읊은 한시(漢詩)를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인 성범중 안순태 노경희 교수는 모두 울산대 국어국문학부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오래전부터 한국한시학회에서 인연을 맺었고, 최근 몇 년간 매주 모여 해당 시기에 피는 꽃을 읊은 한시를 읽고 감상해 왔다. 이번에 성범중 교수의 퇴임을 기념하면서 그동안의 성과를 모아 이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이른 봄부터 늦가을에 이르기까지 계절에 따라 피는 52가지 우리 꽃에 관한 대표적인 한시를 우리말로 번역하고 해설을 수록했다. 우리 꽃의 아름다움을 한시로 읽으면 더 좋겠지만, 우리말로 옮겨진 시를 읽어도 좋다. 꽃에 대한 간략한 정보, 꽃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세시풍속과 연관된 문헌 기록 등으로 ‘우리의 꽃 문화’를 소개한다. 여기에 조선 화가들의 꽃 그림까지 더해진다. 1913년 개신교 목사였던 남편의 부임지 전남 순천에 와서 그 지역의 야생화를 직접 보고 그린 플로렌스 헤들스턴 크레인이 남긴 책 ‘머나먼 한국의 야생화와 이야기’(1931)의 꽃 그림도 다수 수록했다. 20세기 초 서양 여성의 눈에 비친 우리 꽃은 어떤 아름다움을 지녔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저자들은 출판사에 “꽃다발 같은 책으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책의 만듦새는 저자들의 바람처럼 아름답다. 52가지 꽃을 한 다발로 섬세하게 묶어낸 것처럼 정성이 보이는 꽃다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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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정, ‘연꽃 핀 못에서 오리 놀다(蓮池遊鴨)’, 호암미술관. |
연꽃을 노래한 시 한 편을 소개한다.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의 국가 기틀을 다지고 제도를 확립하는 데 공이 큰 용헌(容軒) 이원(李原, 1368~1429)의 시 ‘연꽃을 읊다(詠蓮·영련)’이다. “물 위로 바람 부니 멀리 향기 퍼지고/ 깨끗하고 곧게 자란 것이 뭇꽃과 다르네./ 생각건대 염계가 당시에 사랑한 것은/ 푸른 잎과 붉은 꽃 때문이 아니었으리.” 진흙에서 피어났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는 연꽃을 사랑했던 군자의 마음을 담았다.
꽃을 보는 여인의 마음은 허난설헌이 남긴 ‘염지봉선화가(染指 鳳仙花歌)’가 전해준다. “금동이 저녁 이슬 봉선화에 맺히고/ 예쁜 아씨 열 손가락 곱고도 길다네./ 절구로 꽃잎 찧어 배춧잎으로 싸매고/ 등불 앞에서 쌍귀고리 울리며 조심스레 살펴보네./ 새벽에 잠을 깨어 발을 걷어 올리니/ 거울에 비치는 화성의 빛 보이는구나./ 풀잎 뽑을 때면 붉은 범나비 나는 듯하고/ 아쟁 탈 때면 복사꽃 놀라 떨어지는 듯하네./ 분화장 곱게 하고 비단결 머리 손질하면/ 소상강 대나무에 피눈물이 얼룩진 듯하네./ 때때로 붓을 잡고 지는 달을 그리노라면/ 붉은 꽃비가 봄산을 지나는 듯하구나.” 봉선화로 붉게 물들인 아씨의 고운 손톱이 눈에 아른아른 하다. 올 여름에는 봉선화 꽃잎이라도 구하러 나서고 싶어질 지경이다.
옛 시인들은 꽃을 사랑했다. 아름다움을 찬양하기도 하고, 자신의 처지를 꽃에 빗대기도 하고, 고향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백성의 삶을 떠올리기도 했다. 우리 선인들의 삶과 정서는 꽃과 함께 피어나 우리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