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만스’(2022)라는 제목은 일종의 농담이다. 이야기(fabel)를 하는 사람(man)을 뜻하는 가족의 성씨는 사실 스필버그(Spiel-berg)의 철자를 뜯어보면 나오는 ‘쉴 새 없이 떠드는 긴 이야기’(Spiel)에 착안해 비틀어 본 것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작명에서부터 스필버그는 이 영화가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일종의 ‘홈무비’임을 고백하는 셈이다. 이것은 훗날 감독의 길을 걷게 될 한 소년이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던 유년기와 청소년기, 성년의 목전에 이르기까지 마주한 사건들을 다루는 성장담이다.
부모의 손을 잡고 간 극장에서 ‘지상 최대의 쇼’(1952)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새미는 선물 받은 장난감 열차로 충돌사고 장면을 재현해보려 한다. 어머니 미츠는 그런 아들의 손에 아버지 버트의 카메라를 쥐여준다. 음악가 어머니의 감수성과 공학자 아버지의 치밀함. 부모 양쪽에게서 물려받은 자질은 예술적 감각과 테크놀러지 양면을 아우르며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영화감독의 바탕이 된다.
새미는 모은 두 손을 스크린 삼아 자신의 첫 영화를 비춰본다. 소년의 시선은 손아귀에 담긴 환상의 세계에 고정되어 있고, 주변은 어둠에 휩싸여 있다. 영화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 이 구도는 ‘파벨만스’의 주제 그 자체이다. 소년은 필름 속에 담긴 빛의 세상을 주무르며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얻지만, 바깥에 도사리는 어둠, 즉 현실에선 상처와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캠핑을 촬영한 필름의 편집 과정에서 새미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동료 베니와 내연의 관계임을 눈치챈다. 그러나 완성한 필름에서 문제의 분량은 말끔히 잘려 나가고 가족의 단란한 순간만이 남는다. 영화는 몽타주로 불편한 부분을 덜어냄으로써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런 식으로 봉합되지 않는다. 부모의 이혼도, 학교생활 부적응과 첫사랑 실패도 겪어내고 버텨야 할 따름이다.
스필버그의 영화적 우상 중 한 사람이자 ‘미지와의 조우’(1977)에도 출연한 누벨바그 감독 프랑소와 트뤼포도 ‘아메리카의 밤’(1973)에서 질문하지 않았던가? “영화는 인생보다 중요한가?” 그리고 “영화는 인생보다 조화롭지. 거기엔 교통지옥도, 끔찍한 기다림도 없어. 영화는 기차처럼 질주하는 거야.” ‘파벨만스’를 통해 스필버그는 원하는 대로 통제되는 꿈, 영화의 경이와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의 녹록치 않음을 대비시키고, 한 발씩 걸친 두 세계의 균열 사이에서 괴로워한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근간을 이룬 작가적 토포스(topos)가 무엇이었는지 진솔하게 털어놓는다.
자신의 실패와 약함, 이기심마저 돌아보는 이 담담한 회고는 새미가 할리우드의 거장 존 포드를 만나고 본격적인 영화의 길로 들어서며 끝난다. (실제로는 작중 묘사보다 이른 16세 때의 일) 여기서 언급된 수평선의 화두는 이후 스필버그의 필모그래피에 일관되게 관철된다. 지평선 너머에는 불안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고, 그것은 ‘E.T.’(1982)처럼 구원의 가능성일 수도, ‘우주전쟁’(2005)이나 ‘워 호스’(2011)처럼 파괴와 절멸일 수도 있다. 영화의 세계를 피안으로 삼았던 소년은 그 창을 통해 역사를 직시하고 현실을 근심하는 노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