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 원수 오해 어느 정도 풀려
- 일주일 몰아친 가을장마 탓
- 지붕·창문 파손 등 진영 열악
- 춘원포 등 출격해 왜적 소탕
- 원수의 잘못된 장계로 문책도
- 도둑질·탈영 징계 등 군무 지속
- 의병장 죽음엔 “참으로 슬픈 일”
8월 4일[9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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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통영시 정량동 이순신공원에서 본 바다이다. 갑오년(1594년) 8월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장군 휘하 함대가 견내량을 비롯한 한산도 주변 바다로 곧잘 출격한다. 이순신공원은 견내량과 멀지 않다. |
비가 뿌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수루 방의 도배가 끝났다. 충청수사와 순천, 발포 등이 와서 활을 쏘았다. 경상수사의 군관과 담당 아전이 지난날 명나라 장수(장홍유)를 접대할 때에 우리 여자들에게 떡과 음식물을 이고 오게 해 능욕을 당하게 한 죄를 처벌했다. 화살 만드는 장인(匠人) 박옥이 와서 화살 만들 대(竹)를 가져갔다. 이종호가 안수지 등을 붙잡아 오기 위해 흥양으로 갔다.
8월5일[9월18일]
아침에 흐렸다. 식후 충청수사 순천부사와 활을 쏘았다. 오후에 경상수사에게로 갔더니 우수사가 먼저 와 있었다. 셋이서 적 칠 일을 의논한 뒤 돌아왔다. 오늘 웅천현감(이운룡) 소비포권관(이영남) 영등포만호(조계종)와 윤동구 등이 이번 출진(13일 출진이 미리 계획된 듯함)의 선봉장이 되었다며 여기로 왔다.
8월6일[9월19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녘에 비가 왔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 10순을 쏘았다. 오랜만에 장흥부사(배흥립)가 들어오고 보성군수(안홍국)는 나갔다.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는 편안하시고 아들 면의 병도 차츰 나아진다고 했다. 고성 및 사도, 적량이 다녀갔다. 이날 밤에는 수루 방에서 잤다.
* 갑오년 7월에 흥양현감 배흥립이 장흥부사로, 장흥부사 황세득은 흥양현감으로 교체된다. 모두가 이순신이 믿고 쓰는 장수인데, 황세득은 을미년(1595년) 2월에 잡혀가고 배흥립은 병신년 3월 파직된다.
8월7일[9월20일]
하루 종일 비가 왔다
8월8일[9월21일]
종일 비가 계속해 왔다. 정조방장(정걸)이 들어왔다.
8월9일[9월22일]
종일 비가 계속되었다. 우수사 정조방장 충청수사 순천부사 사도첨사와 함께 적 칠 일을 의논했다.
8월10일[9월23일]
종일 비가 내렸다. 충청수사와 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장계의 초고를 수정했다.
8월11일[9월24일]
종일 큰비가 내렸고, 밤에는 모진 바람조차 불었다. 세 겹의 지붕이 벗겨져 날아갔고 비는 삼대같이 내렸다. 양쪽 창문은 젖어 찢겨 없어졌다. 새벽까지 앉아 밤을 지새웠다.
※당시 한산진영의 숙소와 건물은 이같이 강한 비바람을 막지도 못할 만큼 열악했다. 당시의 수루는 오늘날의 잘 지은 원두막쯤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또 추석 전 일주일가량 가을비가 내렸으니 그 당시 갑오년에도 가을장마가 있었나 보다.
8월12일[9월25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늦게 충청수사 순천부사와 더불어 활을 쏘고 있는데 소비포권관과 웅천현감이 와서 함께 활을 쏘았다. 원수(권율)의 군관 심준이 전령을 가지고 왔다. 원수의 명령은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오는 17일에 사천으로 나와 기다리라”는 것이다.
8월13일[9월26일] 맑음.
원수의 군관 심준이 돌아가고 노윤발도 보냈다. 오전 10시쯤에 배로 내려가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갔다. 별도로 날랜 장수를 뽑아 사도첨사(김완)에게 주고 춘원포 등지로 가서 대기하다가 적을 보면 무찌르라고 명령하여 떠나 보냈다. 그리고 거기서 자는데 달빛은 비단결처럼 고왔고 바람은 없어 파도를 일으키지 않았다. 해를 시켜 피리를 불게 했는데 밤이 깊어서야 그만두었다.
8월14일[9월27일]
아침에 흐리다가 저물녘에는 비가 왔다. 사도첨사와 소비포권관 웅천현감 등의 급보를 받아보니 “왜선 한척이 춘원포에 정박해 있으므로 불시에 습격하였더니 놀란 왜놈들이 배를 버리고 모두 도망가 버려서 적의 배만 빼앗고 우리나라 사람 남녀 15명을 구해 돌아왔다”고 했다. 오후 두 시쯤 본진(한산도)으로 돌아왔다.
8월15일[9월28일] 맑음.
원수를 만나러 사천으로 가기 위해 경상수사 원균과 배를 타고 월명포(통영시 산양면 풍화리 월명도)에 이르러 잤다.
8월16일[9월29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소비포에 이르러 배를 대어놓고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돛을 달고 사천 선창(사천군 읍남면 선진리)에 들어가니 사천현감 기직남이 곤양군수(이광악)와 함께 와 있었다. 그대로 머물러 잤다.
8월17일[9월30일]
흐리다가 저물녘에 비가 왔다. 원수가 정오께 사천에 이르러 군관을 보내어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곤양군수의 말을 빌려 타고 원수가 머무르는 사천현감 처소로 갔다.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간의 예를 마치고 그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해를 많이 푼 듯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원균 수사를 몹시 꾸짖으니 원 수사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우스웠다. 가져간 술을 내놓고 마시기를 청하여 8순 배를 돌렸다. 원수가 잔뜩 취해 상을 물려서 나도 숙소로 돌아왔다. 박종남과 윤담이 와서 기다리고 있어 만나보았다.
※권율은 조정의 명을 받고 이순신과 원균을 함께 불러, 수군 장수들 간의 불화(6월 4일 일기 참조)를 수습하고 다음 달에 있을 장문포 전에서 적과 싸울 일을 미리 의논하려고 한 듯하다.
8월18일[10월1일]
날씨가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한 뒤에 원수가 청하므로 나가서 이야기하다가 또 간단한 술상을 차려 내왔다. 거듭 몇 잔 마신 것이 몹시 취해 나는 그만 돌아간다고 아뢰었다. 경상수사 원균은 너무 취해 일어서지를 못하고 드러누워 오지 못할 형편이라, 나는 먼저 곤양군수 거제현령 소비포권관 등과 함께 배를 돌려 삼천포 앞바다로 와 잤다.
8월19일[10월2일]
맑다가 잠시 저녁에 비가 왔다. 아침에 사량(통영시 사량면) 안쪽에 이르렀지만 기다리던 원균 수사는 아직 오지를 못했다. 칡을 60동이나 캐고 나니 그제서야 원균 수사가 왔다. 저녁나절에 출항하여 당포(통영군 산양면 삼덕리)에 이르러 잤다.
8월20일[10월3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진(한산도)에 이르렀다. 우수사(이억기)와 정 조방장이 보러 왔다. 정 조방장은 곧 돌아가고 우수사 및 장흥 사도 가리포 충청우후와 함께 활을 쏘았다. 저녁에 피리 불고 노래하다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돌아보니 미안한(온당치 못한) 일이 많이 있었다. 충청수사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더 위중해져서 바로 흥양으로 떠나갔다.
※온당치 못했다는 것은 아마 원균과의 관계에서 나온 말인 것 같다.
8월21일[10월4일] 맑음.
외가의 제삿날이라 공무 보지 않았다. 곤양 사도 마량 남도포 영등포 회령포 소비포가 왔다. 양정언이 보러 와 만났다.
8월22일[10월5일] 맑음.
나라의 제삿날(정현왕후 윤 씨의 제사)이라 공무 보지 않았다. 경상우우후가 보러 왔다. 낙안, 사도도 왔다가 갔다. 늦게 곤양 거제소비포 영등포가 와서 이야기하다 밤이 깊어 돌아갔다.
8월23일[10월6일] 맑음.
아침에 공문 초안을 작성했고 식후에 활터 정자로 자리를 옮겨 앉아 서류를 처결해 내려보냈다. 그대로 활터에서 활을 쏘는데 바람이 사납게 불었다. 장흥 녹도가 와서 함께 쏘았다. 저물 무렵 곤양과 더불어 웅천 영등포 거제 소비포도 불러 이야기하다 초저녁에 헤어졌다.
8월24일[10월7일] 맑음.
각 고을에 수군을 징발하는 일로 박언춘 김윤 신경황을 내어보냈다. 정 조방장이 되돌아갔다. 늦게 소비포가 보러 왔다.
8월25일[10월8일] 맑음.
곤양군수(이광악) 소비포권관(이영남)을 불러 아침을 같이 했다. 사도(김완)가 휴가를 간다기에 9월 7일까진 돌아오라고 일렀다. 현덕린도 제 집으로 돌아가고 신천기도 납속(곡식을 바쳐 벼슬을 사는 제도)할 일로 돌아갔다. 늦게 흥양(황세득)이 돌아왔다. 활터 정자에 가 활 6순을 쏘았다. 정원명이 들어왔다고 한다.
8월26일[10월9일] 맑음.
아침에 각 관, 포에 공문을 결재해 보냈다. 흥양의 보자기로 있는 막동이란 자가 장흥 군사 30명을 몰래 그의 배에 싣고 도망가려 했기에 그 죄를 물어 처형하고 효시했다. 활터 정자에 올라가 활을 쏘았다. 충청우후도 와서 같이 쏘았다.
8월27일[10월10일] 맑음.
우수사와 가리포 장흥(배흥립) 임치 본영우후(이몽구) 및 충청수영우후등 여러 장수가 함께 와서 활을 쏘는데, 홍양현감(황세득)이 술을 내어놓았다. 아들 울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회를 내보내 간호에 힘쓰게 했다.
8월28일[10월11일]
밤 2시께부터 부슬비가 오고 큰바람이 불었는데, 비는 아침 6시께 개었으나 바람만은 세게 불어 밤새 그치지 아니했다. 회가 강풍 속에 잘 갔는지 몰라 심히 염려스러웠다. 진도군수가 보러왔다. 원수(권율)의 장계로 인해 문책하는 글이 내려왔는데, 이는 거의가 원수가 급히 장계를 쓰느라 잘못함에서 비롯된 일이다.
8월29일[10월12일]
날씨는 맑았으나 북풍이 크게 불었다. 아침에 마량첨사(강응호)와 소비포권관(이영남)이 와서 함께 밥을 먹었다. 늦게 활터 정자로 옮겨 앉아 공문을 처결하여 보냈다. 도양장의 목자(말 먹이는 하인) 박돌이의 도둑질 한 죄를 다스렸고, 특히 도적 3명 중 장손이라는 자에게는 곤장 100대를 치고 얼굴에 도(盜)자를 먹물로 새겨 넣었다. 해남현감 현즙(玄楫)이 들어왔는데 의병장 성응지가 죽었다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로다.
※ ㈔부산여해재단·국제신문 공동 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