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주·평민 집안서 자란 두 아들
- 각자 가정과 사회서 겪는 갈등
- 삼인칭 작가 시점서 세밀히 그려
- 19세기 개혁 물결 거센 러시아
- “낭만주의 늙은이” 대든 신세대
- 그들이 불안하기만 한 부모세대
- 저자는 신구세대 불화 넘어서
- 인류·국가 향해 화합의 메시지
- 전쟁·살육의 어리석음 꼬집어
부모님에 대해 아는 바를 조목조목 적어 본 적 있으신지?
여긴 부모님 관련 주제로 글쓰기를 하는 여고 교실. 한동안 고개를 숙여 얼굴이 가려졌던 학생이 펜을 움직인다. 사각사각. ‘두 분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적었다. 어디선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지도교사가 전해준 풍경이다. 제출한 종이에 이런 항목이 있었다. ‘나를 기다리시는 분들이다’.
그렇다. 부모는 자식을 기다린다. 신혼 땐 아기 탄생을 기다린다. 아이가 장성해 집을 떠나면 돌아올 날을 기다린다. 부모는 기다리며 늙는다. 투르게네프는 부모 삶을 받치는 기다림을 잘 그려냈다. 장편소설 ‘아버지와 아들(1862년)’이 그렇다. 대도시에서 대학 학업을 마치고 귀향하는 20대 아들을 아버지가 마중 나가 조바심 내며 기다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원래 책 제목은 ‘아버지들과 아들들’이다. 지주와 평민 집안에서 자란 대학 동창인 두 아들, 아르카디와 바자로프가 주인공. 저자는 두 아들이 각각 가정과 사회에서 2년간 겪는 세대 갈등을 세밀하게 들여다봤다. 두 가문을 대상으로 삼았지만, 같은 주제로 묶이기에 번역서 서명(書名)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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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아들’은 19세기 개혁으로 치닫는 러시아 사회상 속 세대 갈등을 소재로 삼았다. 1881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는 이 장면은 당시 러시아 변혁이 얼마나 강렬했는가를 드러낸다. |
■19세기 러시아 신구갈등 묘사 탁월예나 지금이나, 신구 세대는 싸운다. 가정과 사회가 들썩인다. 신세대는 진보, 구세대는 보수로 진영이 갈린다. 이념 충돌은 살벌하다. 이 고전에서 진보·자유주의자인 청년 바자로프는 싸움꾼. 가는 데마다 회오리를 일으킨다. 당시 이 책을 읽은 러시아인들이 책 속 싸움을 이어받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출간된 후 그곳 보수-진보 진영은 역사에 남는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소설 내용이 당대 현실을 끌어왔기에 이런 현상이 이상할 게 없었다. 당시 러시아는 알렉산드르 2세 치하. 농노 해방 같은 사회 개혁 물결이 일렁였다. 신세대는 예전과 달리 구세대에 대들어 공공연히 밀어붙였다. 부모들은 그런 신세대 자식들을 불안하게 지켜보며 속이 탔다.
이 고전에서 저자는 떠나보낸 자기 청춘을 되새김해 보인다. 평생 가슴속에 담아두기만 한 짝사랑, 친구를 스승처럼 대한 남다른 우정을 고백하는 듯하다. 소설 속 두 청년은 열병 같은 사랑을 앓고, 뜨거운 우정을 나누는 모습이 그렇다. 시공을 건너 현대로 그들이 달려온다.
끈끈한 가족애, 애타는 부정(父情)과 모정(母情)은 19세기 러시아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1859~1860년 사회상 같지 않다. 이 고전은 생애 두 번 이상 읽는 이가 많다. 미혼인 청년일 때 읽고, 수십 년 세월이 흐른 후 자식을 지켜보는 부모로서 일독하는 책. 삼인칭 작가 시점에서 본, 신구 세대가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애송이, 어린 막무가내들.” 구세대는 신세대를 그렇게 불렀다. “늙은 낭만주의자, 추억을 먹고 사는 늙은이.” 신세대가 구세대를 향해 내뱉는 비아냥. 두 세대는 세상을 보는 눈이 참 다르다. ‘화해는 불가능하구나’. 독자는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저자는 어떻게 결말을 지을까.
■치밀한 서사로 계층 갈등 사회상 옮겨이 소설은 서사가 치밀하면서도 설득력이 크다. 소설가 지망생에겐 교과서. 두 청년,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니와 바자로프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는 20대다. 1년 전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만나 우정을 맺었다. 아르카디가 바자로프를 따르는 쪽. 지주 집안 외동인 아르카디는 개혁을 외치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다. 반면 전직 군의관 아들인 바자로프는 야생마 같다. 실용파로 과학을 숭상하는 의대생이다. 구세대를 질색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낭만주의자이지. 스스로 온통 신경 체계를 자극하고는 결국 불안해져 균형을 잃어.” 두 청년은 모든 걸 부정하는 니힐리스트. 왜 그러냐고 묻자 “기분이 좋아서”라고 응수한다.
이들은 대학 공부를 마치고 함께 고향으로 간다. 아르카디는 바자로프 집에 초대돼 친구 아버지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와 인사를 나눈다. 이 아버지, 호인이다. 아들이 대학에 1855년 입학한 후 매해 겨울 아들에게 가서 같이 지낼 정도로 부정이 깊다. 지난겨울엔 일이 바빠 못 간 만큼 아들 얼굴을 보자 마음이 들떴다. 내색하지는 않는다. 바자로프 아버지도 마찬가지. 대개 아버지가 이렇다. 아들들은 모르지만.
투르게네프는 신구 세대를 따스하게 바라본다. 아르카디 아버지는 40대로 괜찮은 구세대. 다정하고 온화한 홀아비로 얼마 전부터 20대 처자와 연애중이다. 아들은 그걸 모르고, 아버지는 겸연쩍다. 2000헥타르 영지를 소유한 아버지는 대세인 농노 해방 물결을 받아들이고 실천한다. 신세대와 교류하려고 애쓴다. 구세대 중 모범 인물. 신세대 적수도 등장한다. 보수를 대변하는 귀족이자, 아르카디 큰아버지인 파벨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다. 독신인 그는 세상을 떠난 여인을 잊지 못하고 과거에 매여 산다. 여인들 시선을 끄는 준수한 자신 용모가 자랑거리. 여인들 구애를 거부하며 내심 즐긴다. 농민을 사랑한다지만, 그들 체취를 참지 못해 향수를 마구 뿌려대는 양면성을 보인다.
소설 속 계층 갈등이 적나라하다. 귀족과 농노는 물과 기름 같다. 귀족은 농노가 나타나면 라틴어 프랑스어를 섞어 대화해 우월감을 과시한다. 농노들 역시 만만하지 않다. 겉으론 “예~예~”하지만 속엔 능구렁이가 들어앉았다. 줄여준 소작료조차 호락호락 내지 않는다. 그들 눈에 귀족이나 지주는 “세상 모르는 어릿광대”다.
■시대 관통하는 화해·공존 가치 강조 |
| 1861년 농노 해방을 뼈대로 하는 ‘러시아 해방 칙령’이 공표되자 그것을 러시아 농민들이 읽고 있다. 2300만 명이 넘는 농노가 자유민이 되었다. 그레고리 마소예도프 작(1873년). |
집에 남아 자식들을 그리워하는 게 노부모들 일상. 그 정경이 애틋하다. 바자로프는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지루하다고 툴툴대다가 사흘 만에 같이 온 아르카디와 함께 떠나버린다. 두 청년이 탄 마차가 먼지만 가득 길 위에 남겨두고 멀어진다. 아버지는 짐짓 손수건을 힘차게 흔들다 마차가 보이지 않자 금세 풀이 죽었다. 집게손가락을 세우며 탄식한다. “지루해서 우리를 버리고 간 거야. 이제 이 집게손가락처럼 나 혼자 남았어.” 어머니는 아버지 회색 머리에 자기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린다. “자식은 날아다니는 매이지요. (자신이) 원하면 날아왔다가 또 원하면 가버려요.” 아들들은 왜 그런 부모 심경을 모를까.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아버지에게 아들이 정말 총명하다고 칭찬했었다. 그때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제일 환한 미소를 지었다는 걸 알았다면 바자로프는 집에 더 머물렀을까.
아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하던 아버지에게 감당키 어려운 슬픔과 고통이 찾아든다. 바자로프가 돌보던 장티푸스 환자가 숨진다. 그는 환자 시신을 해부하다 칼에 베여 장티푸스균에 감염된다. 아들은 며칠을 앓다 저세상으로 떠나버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여섯 달 후다. 아들 바자로프는 마을 묘지에 잠들었다. 그곳을 노부부가 서로 부축하며 찾아든다. 비석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고 흐느낀다. 여기서 투르게네프는 자문한다.“이 기도와 눈물은 정녕 쓸데없다는 말인가. 그 성스럽고 헌신 가득한 사랑은 전능하지 못하다는 걸까.” 저자는 무덤 위로 핀 꽃을 바라보며 이렇게 답한다. “그 꽃은 영원한 안식이나 자연에서 나오는 위대한 정적만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건 아니다. 영원한 화해와 무한한 생명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이다.”
투르게네프가 ‘인류가 끝없이 화해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야 한다’는 교훈을 전한다는 걸 모를 수 없는 결말이다.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파가 전쟁을 벌인다. 현 지구에서 투르게네프 전언은 무색하다. 세대 간 갈등이든 국가 간 다툼이든 결국은 화해해야 공존한다고 외쳤지만 말이다. 불화하며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세계에서 우리는 산다. 투르게네프 소설은 그 어리석음을 비추는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