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민지 해방·한국전쟁 거치며
- 귀환 동포·피란민·유랑민 이주
- 산업화 시기엔 노동자들 몰려
- 왜관·국제시장·부산항 등지서
- 불안정한 이들이 개척한 도시
- 갈등과 타협 반복하며 살아와
- 이 경험들 바탕으로 독재 저항
- 동력의 ‘찐’ 부산인 만들어지다
공간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공간을 만든다. 20세기 초 뿌리뽑힌 불안정한 사람들이 변두리였던 부산의 열악한 조건을 역으로 활용하면서 새로운 부산을 만들었다. 이 시기 부산 사람들이 부산을 만들 수 있었던 에너지의 몇 가지 요소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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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 후 용미산 아래 어시장을 출입하는 조선인, 부산박물관 소장 |
■변방에서 시작된 동력150년 전 부산은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다. 변두리에는 항상 혐오시설이 위치하는 법이다. 임진왜란을 경험한 조정 대신들은 잠재적인 위험요소를 멀리하기 위해 동래에 왜관을 설치하고 일본인들의 한양 출입을 금지했다. 왜관이 위치한 갯가 동래는 숙종 대 이후로 문과 합격자 한 명 배출하지 못한 ‘쌍놈’의 고을이었다. 정부는 왜관을 동래에서도 멀리 떨어진 바닷가에 위치시키고 철저하게 통제했다.
왜관 출입구 밖에 세워진 약조제찰비에는 규율을 어겼을 때 사형에 처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문이 붙었다. 중앙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왜관과 주변 조선인 마을에서는 조선인·일본인의 소통이 이루어졌고, 두 문화가 섞였다. 꼬마들은 왜관 안에서 떡을 팔며 나름의 생존방법을 모색했다. 변방에서는 중앙의 지배 논리 외에 불법이지만 ‘여기’만의 질서도 작동했다.
한편 근대 개항은 부산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바꾸어 놓았다. 강력한 근대식 무력에 위협을 느낀 조선 정부는 또다시 한양에서 가장 먼 부산을 첫 번째 개항장으로 결정했다. 왜관 시대를 경험한 부산 사람들은 1876년 근대 개항에 자신의 방식대로 대응했다. 근대 개항은 종전의 통제무역을 자유무역으로 바꾸어 놓았다. 자유무역은 자본이 넉넉한 일본인 상인에게는 유리하고, 자본이 미약한 조선인 상인들에게는 불평등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전근대와는 달리 누구나 무역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은 중요했다. 개항장 부산에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이 들어왔다. 조선인들 또한 왜관을 대체한 일본인 거류지를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근대시스템을 경험했다. 부산 사람들은 전통적인 왕조 사회와 다른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기도 하고 상호 갈등하면서 근대적 주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부산 사람들의 경험은 조선의 다른 지역과는 다른 분명한 차이점이었다.
■불안정한 사람들 |
| 1953년 국제시장 대화재 후 상인들이 시장을 새로 준공한 후 세운 기념비. |
근현대 부산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타 지역에서 들어왔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정책에 따른 몰락 농민, 해방 후에는 해외에서 들어온 귀환동포, 한국전쟁 때에는 피란민과 유랑민, 산업화 시기에는 도시노동자들이 대표적이다. 물론 부산으로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교육, 취업 등에 따른 자발적인 이동도 있었으나, 대부분 삶터에서 생존 기반을 상실하고, 강제로 추방당한 자들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불안정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면서 내뿜는 에너지가 부산을 만든 하나의 동력이었다. 부산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고향에서 생활하던 이념에서 벗어나 부산 생활에 필요한 방식에 적응해야 했다.
일제강점기 부산 인구는 191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급속히 증가했다. 아무래도 이 시대 농촌 농민은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등으로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부산으로 향했다. 한번 떠난 고향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무슨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부산에 정착해야 했다. 가진 게 없었던 이주민들은 평지에서 살지 못하고 불편한 산비탈에 움막을 짓고 도시빈민으로 살았다. 하지만 지배기구에 굴복하거나 주눅들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합벅적인 방법으로 진정을 넣거나, 저항하면서 부산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1945년 해방으로 조선과 부산에서 살아오던 일본인들은 돌아가고, 일제강점기 해외로 나갔던 귀환동포들이 입국했다. 이들의 귀국길은 쉽지 않았다. 대한해협을 건넌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겨우 부산에 도착한 이들에게 부산의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일제가 남겨놓고 간 적산은 자금과 원료난으로 운영 중단 상태였다. 해방되던 해 식량난은 전염병 유행과 함께 이들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든 해서 버터야 했다. 귀환동포들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국제시장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고향에서 강제로 추방당한 피란민들은 그나마 전장터가 아니고 구호물자라도 확보할 수 있는 부산에 정착했다. 부산은 주거공간을 비롯한 사회기반시설이 빈약했고, 생계에 필요한 일자리도 부족했다. 피란민들은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 빈 터만 있으면 판잣집을 짓고, 미군부대 유출 물자나 밀수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야 했다. 모두 불법인줄 알았지만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불안정하고 절박했던 피란민의 선택은 이들을 억척스런 사람으로 만들어 놨다.
전쟁이 끝나고 재건과 산업화 시기 부산 인구는 급증했고, 1963년 직할시로 승격하였다. 1972년 200만 명, 1973년 300만 명의 도시로 부피가 성장하였다. 이 시대는 부산이 자랑하는 섬유 고무 합판 등을 앞세운, 한국을 대표하는 공업도시였다. 특히 농촌의 여성노동자들을 부산으로 유입해 전통적인 가부장적 질서로부터 해방시켰다. 이 시대 도시노동자는 시골의 부모를 위해 봉사하기도 했지만, 자기 자신의 역량을 갖추는데 투자했다.
■근대 주체의 권리 찾기부산 사람들의 권리찾기 운동은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했다. 개항기 부산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저항했다. 봉건 잔재를 거부한 동래민란(1883년), 일본인 상인과 부당한 거래에 반발한 쌀 판매 거부 운동(1884년), 부산진 선창가 투쟁(1886년) 등 생존투쟁을 벌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식민지화가 점차 현실화되면서 근대식 학교 설립을 위한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1907년) 등은 개인의 문제가 어떻게 민족적인 과제와 결합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1919년 3.1운동이 공간적으로 부산진 동래 구포 기장 좌천 등으로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 정책이 단순히 민족적인 차별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부산 사람들의 자기 권리 찾기는 일상생활에서도 활발했다. 도시빈민들의 주택난과 산동네 위생문제, 도항제한 철폐 등 자신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행정당국을 상대로 한 진정을 펼쳤고 시민대회를 통한 권리를 행사했다. 일제는 도시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사업을 실시해야 했는데, 배려라기보다 부산 사람들이 싸워서 얻은 성과물이었다.
이 시기 일상에서 저항은 개인 단위를 넘어서 지역, 민족의 형식으로 드러났다.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이 연루된 의열단 투쟁, 청년운동, 학생운동, 신간회 및 근우회 활동, 노동운동 등과 일제 말 부산 항일 학생의거는 결코 우발적이지 않고 근대 주체 의식을 배경으로 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새롭게 부산 사람이 된 귀환동포와 피란민 등 생활기반이 불안정했던 자들은 갈등과 저항, 타협을 반복하면서 생활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대 부산 사람들의 경험은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동력으로 작동했다. 학생들의 ‘학원의 자유보장’이라는 슬로건은 장기집권을 노린 이승만정권의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권리의식의 표현이었다. 이후 부마민주항쟁, 6월항쟁 등 민주화운동 또한 자유와 평등을 갈망했던 부산 사람들이 자기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이었다.
■되돌아보는 이유이제는 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었다. 20세기 초 부산을 만들었던 주인공들은 사라져 간다.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은 시간을 초월해서 관통되는 진리이다. 역사는 인간이 마주한 당면 문제의 문제 해결 방식을 잘 보여준다. 지난 시대 주인공의 삶을 살펴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공동기획 : 국제신문, 상지건축
*‘오! 부산’ 강연 일정 blog.naver.com/osangji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