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장님이 눈 뜨는 길/ 제 멋대로 도道 닦는 길/ 길을 잃어도 춤추고 싶은 길// 새살 돋고 허물 벗는 길/ 벽과 금기를 부숴 버리는 길/ 거인의 어깨 위에 오르는 길 (중략) 마침내 저승길까지 꽃등불 환히 켜는 길’ (졸시, ‘책 속의 길’ 일부, 시집 ‘하늘나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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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일 열린 국제신문 주최 ‘나림 이병주 문학 콘서트’ 모습. 이원준 기자 |
지난 1일 금요일 저녁, 제2회 나림 이병주문학 콘서트에 다녀왔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나림 선생과 재회한 기분이었다. 가슴 속에 절로 떠오른 게 위 졸시이다. 이병주 작가의 호 ‘나림(那林)’은 ‘어떤 숲’이란 뜻이다. 하지만 그 숲이 내겐 아주 깊고도 넓게 느껴질 뿐, 여전히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그 숲으로 통하는 수십 갈래 길 중에 어떤 길이든지 간에 좋다. 한번 들어 서기만 하면, 눈뜬장님이 눈을 뜨고, 제멋대로 도를 닦고, 때로는 길을 잃어도 겁나는 게 아니라, 춤추고 싶은 길이다. 물론 필자뿐만 아니라, 나림의 마니아도 같은 느낌이리라. 그날 저녁, 2시간 남짓 문학콘서트 내내 아주 흐뭇했다. 마치 먼지 폴폴 나던 내 마음밭에 흥건하게 단비가 내린 기분이랄까. 수 년 전 하동 이병주문학관에 처음 들렀을 때의 감동보다 갑절 이상이었다.
문학콘서트는 시종일관 흐뭇한 시간이었다. 마치 나림 문하 제자 넷이 의기투합하여 함께 콘서트를 진행하는 느낌이었다. 사회자는 나림 품에서 응석을 부리는 듯한 조봉권 국제신문 부국장 겸 문화라이프부장. ‘나림 문학 속 아나키즘’을 발제한 조광수 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의 통찰은 빛났다. 이 주제와 관련해 지난해 국제신문에 조 전 회장이 ‘나림 문학과 아나키즘’을 연재할 당시 밑줄 쳐둔 문장이 있다. “흔히 나림의 ‘지리산’과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비교한다.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아예 비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선, 두 작가의 공력 차이다.…” 이 대목에 무릎을 쳤기에 그의 발제는 더 반가웠다. 두 번째 발제인 하태영 교수의 나림 선생과의 가상 문답은 또 얼마나 재기발랄했던가. 두 시간이 금세 지나고 말았다.
다만 참가자들 중 40대 이하 젊은이는 거의 보이지 않았던 점은 못내 아쉬웠다. 웅숭깊은 나림의 세계관, 장자 맹자와도 맞짱 뜨는 내공은 AI시대에도 유효하다. 얼마든지 확산 가능하고 반향도 기대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다만 문자보다 영상에 더 친숙한 MZ세대를 위해 문학콘서트 기법의 변화도 시도하기를 제안하는 바이다.
‘나림(那林)’은 과연 ‘어떤 숲’일까? 그 숲이 대숲인지, 솔숲인지, 아니면 잡목 숲인지, 아마존 정글 같은 숲인지 여전히 나는 모르고 있다. 하지만 이번 콘서트에 참가한 뒤, 절절히 깨달은 사실은 지금이야말로 나림의 세계가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만약 나림 선생이 하늘에서 지금의 시국을 보신다면, 어떠실까? 편 가르기와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을 향해 환청처럼 들려오는 소리! 그 소리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어떤 주의를 가지는 것도 좋고 어떤 사상을 가지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주의, 그 사상이 남을 강요하고, 남의 행복을 짓밟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을 보다 인간답게 하는 힘으로 되는 것이라야만 한다.” (이병주 ‘삐에로와 국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