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9년 9월 20일, 5척의 함대가 에스파냐의 카디스를 출발했다. 원정대장은 ‘마젤란’이라는 영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포르투갈인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였다. 이들 원정대의 목표는 향료제도(지금의 인도네시아 동부 말라카 제도 인근)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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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빅토리아호 모형.
국립해양박물관 제공 |
원정대가 떠난 후 3년이 지난 1522년 9월 6일, 누더기가 된 배 한 척이 카디스로 돌아왔다. 이 배가 바로 최초로 세계를 일주한 빅토리아호다.
그러나 귀환한 빅토리아호에 마젤란은 없었다. 마젤란은 원정 도중인 1521년 4월, 지금의 필리핀 세부에서 전투 중 사망했기 때문이다. 마젤란이 사망한 직후 문제가 발생했다. 원정대에는 ‘말라카의 엔리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향료제도 출신으로 마젤란의 노예였고, 동시에 유능한 통역사였다. 엔리케를 아꼈던 마젤란은 본인의 유고 시 엔리케를 자유인으로 해방할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원정대는 엔리케의 능력이 필요했기에, 마젤란의 유언을 무시했다. 불만을 품은 엔리케는 배신을 계획했다. 엔리케의 주선으로 세부섬의 지도자가 원정대의 간부급 27명을 초대하는 연회가 열렸다. 얼마 후 연회에 참석한 모두가 살해당했고, 배를 지키던 사람들은 황급히 세부에서 탈출했다.
카디스를 떠날 때 277명이던 원정대원의 숫자는 115명뿐이었으며, 5척이던 함대는 2척만 남았다. 남은 2척의 배도 거의 5개월을 길을 잃고 헤매다 1521년 11월 8일 마침내 목적지인 향료제도의 ‘티도레’에 도착했다.
원정대는 티도레에서 염원하던 육두구와 정향, 그리고 계피를 구매할 수 있었다. 원정대는 기쁜 마음에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향신료를 실었다. 귀향의 날, 닻을 올리자마자 한 척의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수리가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상대적으로 상태가 양호했던 한 척, 빅토리아만 먼저 귀향길에 올랐다.
귀향길도 녹록지 않았다. 배에 적재된 식량은 ‘쌀’밖에 없었다. 식수를 아끼고자 바닷물로 쌀을 끓여 먹는 상황에서 굶어 죽은 사람만 20명이었다. 쌀마저도 바닥나 포르투갈의 보급항인 카보베르데에 정박했을 땐, 향신료를 운반한다는 사실을 들켜 고초를 겪었다. 빅토리아호는 인질로 잡힌 13명의 선원을 남겨두고 26t의 향신료와 함께 필사의 탈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년 만에 카디스로 돌아온 빅토리아호에 남은 사람은 단 21명뿐이었다. 훗날 ‘최초의 세계일주’라고 불리는 원정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빅토리아호의 세계일주로 유럽인들은 많은 것을 배웠다. 지구를 한 바퀴 돌면 날짜가 바뀐다는 것, 훗날 태평양이라 불릴 거대한 바다가 있다는 것, 그리고 세계가 바다로 이어져 있어 어디든 배를 타고 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드디어 전 세계가 바다로 연결되었고,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빅토리아호가 국립해양박물관에 전시된 이유일 것이다.
※ 국립해양박물관·국제신문 공동 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