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견내량에 적 출몰때마다 출격
- 삼천포진서 체찰사와 회동도
- 새해 1월 여수본영 군기 검열
- 군량 보충 위해 청어잡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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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회에는 이순신 장군 주도로 청어를 장만하여 군자금으로 활용하는 장면이 자주 보인다. ‘난중일기’에는 청어와 관련하 기록이 여럿 있는데, 위 사진에서 줄을 쳐 표시해놓은 대목도 그 일부다. 국제신문 DB |
11월24일[12월24일] 맑음.
바람이 덜해 순찰선이 나갔다가 임무를 마치고 밤 10시쯤에 진으로 돌아왔다. 변익성이 곡포권관이 되어 왔다.
11월25일[12월25일] 맑음.
식후에 곡포권관의 공식 인사를 받았다. 저녁나절에 경상우후가 투항해 온 왜인 8명이 가덕도에서 나왔다고 전했다. 웅천현감 우우후 남도포만호 방답첨사 당포만호가 보러 왔다. 조카 분과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덧 밤 열 시가 지났다.
*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눈 이분(李芬)은 공의 큰형 희신의 둘째 아들이다. 진중에서 공을 직접 보며 모셨기에 그가 쓴 행록(行錄)은 공의 전기로서 신뢰가 높다.
11월26일[12월26일]
아침에는 흐리다가 늦게 날이 들었다. 식후에 나가 공무를 봤다. 광양의 도훈도가 복병하러 나갔다가 도망가던 자들을 잡아 왔기에 처벌했다. 정오께 경상수사가 왔다. 투항해 온 왜인 8명과 그들을 데리고 온 김탁 등 2명이 같이 왔다기에 술을 먹였다. 그리고 김탁 등에게는 각각 무명 1필씩을 주어서 보냈다. 저녁에 유척과 임영 등이 왔다.
11월27일[12월27일] 맑음.
김응겸이 이년목(병기의 자루로 쓰이는 참나무 일종)을 베어 오기 위해 목수 5명을 데리고 갔다.
11월28일[12월28일] 맑음.
나라 제삿날(睿宗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유척과 임영이 돌아갔다. 조카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밤이 깊어졌다.
11월29일[12월29일] 맑음.
나라 제삿날(인종비 인성왕후 박씨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11월30일[12월30일] 맑음.
남해에 가 있는 항왜 야여문(也汝文)신시로(信是老) 등이 왔다. 경상수사가 와서 만났다. 체찰사(이원익)에게 보내는 전세(田稅)와 군량 30섬을 경상수사가 받아 갔다.
▶을미년 (1595년)12월
사기가 떨어진 군사들은 적과 싸워 이길 수 없고, 배고픈 군사들도 힘을 내 싸울 수가 없다. 고기 잡아 곡식 바꾸어 부족한 군량미 보충하고 체찰사 만날 때마다 군사들 한턱 먹이는 것도 다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다.
12월1일[12월31일]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올렸다.
12월2일[1596년 1월1일] 맑음.
거제현령 당포만호 곡포만호 등이 와서 만났다. 술을 대접했더니 취해서 돌아갔다.
12월3일[1월2일] 맑음.
12월4일[1월3일] 맑음.
순천 2호선과 낙안 1호선으로 군사를 내보내려고 하였으나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여 출항하지 못했다. 조카 분과 해가 본영으로 갔다. 황득중과 오수 등이 청어 7000여 두름을 싣고 왔기에 김희방의 곡식 사러 나가는 배에 세어 주었다.
12월5일[1월4일]
맑으나 바람이 순하지 않았다. 몸이 불편한 것 같아 종일 나가지 않았다.
12월6일[1월5일] 맑음.
늦게 경상수사가 와서 만났다. 저녁에 아들 울이 들어와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하니 기쁘고 다행이다.
12월7일[1월6일]
맑으나 바람이 순하지 못했다. 웅천현감 거제현령 평산포만호 천성보만호 등이 와서 보고 갔다. 청주 이희남에게 답장을 써 부쳤다.
12월8일[1월7일] 맑음.
우우후와 남도포만호가 와서 봤다. 체찰사의 전령이 왔는데, 가까운 시일에 소비포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12월9일[1월8일] 맑음.
몸이 불편하여 밤새도록 신음했다. 거제현령 안골포만호 등이 와서 왜적들이 물러갈 뜻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응구도 왔다.
12월10일[1월9일] 맑음.
충청도순찰사(박홍로) 및 충청수사(선거이)에게 공문을 작성하여 보냈다.
12월11일[1월10일] 맑음.
조카 해와 분이 탈없이 본영에 이르렀다는 편지를 보니 기쁘고 다행이지만, 그 고생한 형상을 무엇이라 말로 나타낼 수가 없다.
12월12일[1월11일] 맑음.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우후도 왔다.
12월13일[1월12일] 맑음.
초저녁에 종 돌세가 와서 말하기를 “왜선 3척과 소선 1척이 등산(거제 옥포의 장등산으로 추정) 바깥 바다로부터 나와 합포에 와 대어 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사냥하는 왜군인 것 같아 보이나 그래도 경상수사 방답첨사 우우후에게 정탐해보게 했다.
12월14일[1월13일] 맑음.
새벽에 경상수사 및 여러 장수들이 정탐하러 합포로 나갔다. 과연 사냥 나온 왜인들이라 죽이지 않고 잘 타일러 보냈다 한다. 미조항첨사와 남해현령과 하동현감이 들어왔다.
12월15일[1월14일] 맑음.
체찰사에게로 갔던 진무가 와서 18일에 삼천포에서 만나자고 하므로 서둘러 행장을 차렸다. 초저녁에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12월16일[1월15일] 맑음.
새벽 네 시쯤에 출항하여 달빛을 타고 당포(통영시 산양면 삼덕리) 앞바다에 도착하여 아침밥을 먹고, 사량도의 뒤쪽(양지리 하도 부근) 바다에 도착했다.
12월17일[1월16일]
비가 뿌렸다. 삼천포진 앞에 이른즉 체찰사(이원익)가 지금 사천에 도착했다고 한다.
12월18일[1월17일] 맑음.
아침밥을 먹은 뒤에 삼천포진으로 갔다. 정오 때에 체찰사가 진내의 보(흙과 돌로 쌓은 작은 성) 안으로 들어와 같이 조용히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체찰사가 또 같이 이야기하자고 청하므로, 밤 2시까지 이야기하다 헤어졌다.
12월19일[1월18일] 맑음.
아침밥을 먹은 뒤에 나가 공무를 보고 군사들에게 음식을 실컷 먹였다. 다 먹은 뒤에 체찰사는 떠나가고, 나는 배로 내려왔다. 바람이 몹시 사나워 출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삼천포에 머물러 밤을 지냈다.
12월20일[1월19일] 맑음.
바람이 크게 불었다. (12월21일부터 12월30일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병신일기(1596년)
설날에 어머니 뵙고 온 그는 10월에 출장을 이용해 다시 여수 본영서 어머니와 며칠 같이 있으며 수연잔치를 해 드리는데 이때 만남이 모자간 마지막 만남이다.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7월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고, 9월에는 강화협상이 결렬된다. 일본은 재침을 준비하고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12월 요시라를 이용해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간계를 부린다.
▶병신년(1596년) 1월
병신년 설날은 하루종일 어머니와 같이 지낸 뒤 다시 한산진으로 돌아온다. 왜적은 간헐적으로 견내량 쪽으로 출몰하는데 그때마다 적을 물리치기 위해 군사를 보냈다. 생선 잡아 군자금 마련해야 하는 사정이 후인들의 마음을 서글프게 한다.
1월1일[1월29일] 맑음.
한산진을 떠나 날이 샐 무렵 여수 고음내 어머니 계신 집에 도착했다. 어머님을 뵙고 인사 올렸다. 늦게 남양 아저씨와 신 사과(愼司果)가 와서 이야기했다. 저녁에 어머니께 하직하고 본영(여수)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워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본영의 군기를 검열하고 겸해서 설날 어머니를 뵈러 3박4일 일정으로 한산진을 떠나 여수 본영으로 간다. 날이 샐 무렵 고음천(곰내) 어머니 계신 곳으로 가 설날 저녁때까지 어머니와 함께한다.
1월2일[1월30일]
일찍 나가서 병기들을 검열했다. 이날은 나라의 제삿날(명종 인순왕후 심씨의 제사)이다. 부장(部將) 이계(李繼)가 비변사의 공문을 가지고 왔다.
1월3일[1월31일] 맑음.
본영을 떠나 한산진으로 가려고 새벽에 바다로 내려갔다. 아우 여필과 여러 조카들이 배 위에까지 따라왔다. 날이 밝자 서로 작별인사를 나눈 후 출항하였다. 정오에 곡포(남해군 이동면 화계리) 바다 가운데에 이르니 동풍이 약간 불었다. 상주포(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앞바다에 이르니 바람이 자므로 노를 재촉하여 자정에 사량에 닿아 거기서 잤다.
1월4일[2월1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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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구니에 담긴 청어. |
새벽 2시께 첫 나팔을 불고 날이 새자 배를 띄웠다. 이여념이 먼저 보러 왔다. 그간 진중의 소식을 물으니 모두 보통 때와 다름없다고 했다. 오후 4시쯤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걸망포(통영시 용남면)에 이르니 경상수사(권준)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마중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우후(이몽구)는 맨먼저 배 위로 올라왔으나 몹시 취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는 곧 자기의 배로 돌아갔다. 송한련과 송한 등이, 청어 1000여 두름을 잡아 널었는데 내가 본영에 가 있는 동안에 잡은 것이 1800여 두름이나 된다고 했다. 비가 크게 내렸고 밤새 그치지 않아서인지 여러 장수들이 저물녁에 떠났는데 길이 질어 넘어진 사람이 많다고 한다. 기효근과 김축이 휴가 받아 돌아갔다.
1월5일[2월2일]
종일 비가 내렸다. 먼동이 틀 때에 우후가 방답첨사와 사도첨사(김완)와 같이 문안하러 왔기에 서둘러 세수하고 밖으로 나가 그들에게 그동안의 지난 일을 물었다. 첨사 성윤문, 우우후 이정충, 웅천현감 이운룡, 거제현령 안위, 안골포만호 우수, 옥포만호 이담이 문안 왔다가 어두워서 돌아갔다. 이몽상도 권수사의 심부름으로 와 문안하고 돌아갔다.
1월6일[2월3일]
비가 계속 왔다. 오수가 청어 1310 두름을, 박춘양이 787 두름을 바쳤는데 하천수가 받아다가 말리기로 했다. 황득중은 202 두름을 바쳤다. 사도첨사가 술을 가지고 와서 “군량 500여 섬을 마련해 놓았다”고 했다.
㈔부산여해재단·국제신문 공동 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