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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연대라는 이름의 낡은 희망

켄 로치 ‘나의 올드 오크’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4-01-25 19:15:58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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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는 직설법의 대가이다. 은유와 상징으로 에두르기보다 정직하게 현실을 대면하는 태도에서 메시지의 진실성이 생긴다고, 그 담백함의 힘은 기교의 화려함을 넘어서고 압도하는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영화 ‘나의 올드오크’ 스틸컷. 공식 홈페이지 제공
어느덧 87세 노령으로 더는 장편영화 작업을 이어가기 어려움을 토로한 잠정적 은퇴작 ‘나의 올드 오크’(2023) 또한 그러한 정치적 신념의 산물이다. 복지의 바깥으로 내몰린 노인의 비극을 그린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4), 책임을 개인의 몫으로 떠넘기는 노동 시스템의 맹점을 지르는 ‘미안해요, 리키’(2019)에 이어, 그의 카메라는 영국 북동부 더럼의 탄광촌을 향해 옮겨간다.

스티븐 달드리의 ‘빌리 엘리어트’(2000)에서 이미 우리는 탄광촌 더럼의 현실을 목격한 바 있다. 광산업이 기간산업으로 호황을 누리던 시절은, 마거릿 대처 내각이 1984년 각 지역 탄광을 폐업하기로 결정하고 탄광노조의 저항을 무력화하면서 끝났다. 정부의 강경 대응에 노동자의 단결은 깨졌다. 서로 믿고 의지하던 이들은 파업을 지속할 힘을 잃고 정부 시책에 순응해 하나둘씩 일터로 돌아갔다. 대처 정권의 후유증을 다룬다는 점에서 ‘나의 올드 오크’는 ‘하층민들’(1991)과 ‘레이닝 스톤’(1993)에도 맥이 닿아있다.

영화는 더럼의 쇠락한 현재를 비춘다. 버팀목 역할을 하던 산업이 몰락하자 자본의 흐름이 끊긴 마을의 경기는 활기를 잃었고, 교육과 복지는 붕괴했으며, 주민은 굶주리고, 난방비와 아이들 학비 중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할지 고민할 정도로 빈곤한 지경에 처해 있다. 그러는 와중에 시리아 난민들이 버스를 타고 마을로 이주해 온다. 깔끔하고 새로운 것만으로 공간을 채우려는 자본과 국가의 욕망은 언제나 처치 곤란하고 보기 싫은 것을 주변부로 밀어내 시선 바깥으로 치워버리는 식으로 작동한다. 이등 국민으로 취급받는 현실의 절망과 박탈감을 속으로 삭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외지인은 손쉬운 분풀이의 표적이 된다.

흑백사진 스틸을 연속으로 보여주는 오프닝, 야라의 카메라를 주민들이 몰래 꺼내 사진을 찍다가 떨어뜨리는 장면은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는 말과 함께 20년 동안 닫혀 있던 올드 오크의 뒷방이 열리고, 현지 주민과 난민이 공유해 쓰게 되면서 의미를 완성한다.

벽에 걸린, TJ의 삼촌이 찍었다는 사진들은 식구(食口)로서 한데 모여 끼니를 해결하던, 오랜 세월 축적된 공동체의 잊힌 역사를 새로이 환기한다. 난민들도 참여하게 된 광부축제의 행렬에서 감독은 스페인 내전 때 참전한 국제여단의 깃발을 통해 ‘랜드 앤 프리덤’(1995)의 핵심인 국경을 넘어선 ‘계급’과 ‘연대’의 메시지를 다시 꺼내 보인다.

권력과 자본은 항상 민중을 분리해서 지배하고자 한다. 혐오를 조장하고 시민끼리 싸우게 함으로써 근대국가가 지불해야 할 사회적 비용과 책임을 외면해 왔으며, 그들의 전략은 늘 성공해 왔다. 켄 로치의 후기작에서 점점 비관과 우울의 뉘앙스가 짙어지는 건, 오랜 세월 들여다보았음에도 나아질 기미가 없는 세계의 전망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당대성의 문제를 민감하게 포착해 온 감독은 올드 오크의 뒷방처럼 낡아버린 자신의 은밀한 곳간에서 오래된 희망을 건져 올리려 한다.

연대, 오로지 연대밖에 없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의 존엄을 박탈하려는 시스템에 맞설 유일한 무기이고 가능성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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